페르소나의 위험(7): 여성의 잃어버린 여성성(5)

<어머니의 딸>의 전형, 현모양처

<어머니의 딸>의 어머니와의 동체성


어머니의 딸은 어머니를 매우 닮았으며 어머니의 특성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순종적이고 양육적인 이들은 다른 사람을 돌보는 데 탁월하며 다양한 책임을 기꺼이 맡는다.

어머니의 딸이 왜 이렇게 모성성을 많이 사용하느냐 하면, '여자는 남자를 9배 더 사랑한다'는 명제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의 리비도는 남성이 가진 리비도의 9배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다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남편과 자녀를 사랑할 뿐 아니라, 식물도 키우고 고양이 멍멍이를 키우며, 갈수록 양육되는 대상의 수가 늘어나기 마련이다.

여자는 자신의 에너지를 다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히스테리를 발동하여 여성적 에너지뿐만 아니라, 남성적 에너지, 모성적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에너지를 적절하게 배분한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여성성을 외면하게 된다.


대부분의 딸들은 어머니의 딸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머니와 동체성을 이루고, 어머니의 모성성을 차용해서 사용한다.

이런 딸은 오랜 세월 동안 어머니와 정서적, 정신적, 신체적으로 매우 복잡하게 엉킨 관계맥락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유형의 딸은 일평생 모성성을 사용하면서 그것이 여성성인 줄로 착각하며 산다.


궁극적인 자기를 찾지 못하게 되면서 자기 정체성을 차츰 잃어버리게 된다.

그 결과 여성은 자기 불신과 자기 절제, 그리고 자기 모멸감으로 살아간다.

이런 아내는 남편이 아내를 평가해 주는 그 말이 곧 자기 정체성이 되고 만다.


'현모양처'라는 페르소나

대개 ‘어머니의 딸’은 결혼하여 남편에 대한 내조와 자녀 양육에 최선을 다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꼭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모성성으로 살뿐, 자신의 고유한 여성성으로 살아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딸>이 추구하는 가치는 '현모양처'다.


'현모양처'


이 단어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숭고한 개념을 보유하고 있는 페르소나다.


현모양처는 가부장적 질서에 순응하며 한 남자의 아내로, 자녀들의 충실한 어머니로 살아가기를 자처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많은 여성이 이렇게 살았다.

당시의 여자는 유교적 사회가 표준모델로 제시해 준 '현모양처'라고 하는 역할극을 충실히 수행해 내었다.

그 결과 그들에게 '화병'이라는 것이 찾아왔다.


우리나라 여성의 대표 질병으로 '화병'도 한때 한류를 탔다.

연세대 민성길 교수가 1980년대 후반부터 '화병'에 대해 체계적으로 조사하여 DSM-4에 진단명 목록에 올릴 수 있었다.

화병은 크게 세 가지 증후군으로 나뉜다.

우울장애, 신체화 장애, 불안 장애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복합장애는 나지오가 말한 '슬픔에 차 있는 자아'라는 말로 대체될 수 있다.


나답게 살아 본 적이 없는 여성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로 인해 자기 존재로 ‘나답게’ 살아본 적이 없는 여성이 많다.

'현모양처'로 살기로 자처하였지만, 그것은 사실상 자신의 본성을 억압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녀는 결혼 초기에는 한편으로는 자신을 스스로 억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의 권위에 눌러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만다.


남편은 나를 가르치려 든다

남편은 강한 근력과 냉철하고도 이성적인 합리적 판단 위에 세워진 남성성에 근거하여 여자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남성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든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든 모르든, 어떤 남자들은 그렇다. 여자라면 누구나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이런 현상 때 문에 여자들은 어느 분야에서든 종종 괴로움을 겪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나서서 말하기를 주저하고, 용감하게 나서서 말하더라도 경청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길거리 성희롱과 마찬가지로 젊은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여자들을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자기 불신과 자기 절제를 익히게 되는 데 비해 남자들은 근거 없는 과잉 확신을 키운다.([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김명남 역, 2015, 창비) 15)


솔닛이 말한 대로, 가르치는 남편으로 인해 아내는 자기감정을 억압하고 말할 기회를 상실한다.

자기 불신과 자기 절제를 익히며 사는 여자는 ‘어머니의 딸’ 일 공산이 크다.

‘아버지의 딸’은 이런 상황이 되면 맞서 싸우고 만다. 그녀는 주장과 감정을 참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남편이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을 참고 견딘 결과, 그녀는 남편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진다.

아내가 듣기에 앞뒤가 안 맞는 말을 남편은 너무나 자신 있게 주구장창 밀어붙인다.

그녀는 남편의 막무가내식 주장을 연속적으로 받아낸 결과 판단력이 흐려지면서 ‘내가 잘못되었나 보다’라는 자기 불신을 새롭게 무장한다.

그녀는 남편의 말이 앞뒤가 안 맞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남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비난한다.

그리하여 ‘어머니 딸’인 그녀는 남편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다.

남편이 아무리 이치에 닿지 않는 주장을 해도 그녀는 존귀한 남편이 하사하는 고결한 말씀으로 듣고 마음속 깊이 아로새긴다.

남자는 온갖 실수와 허술함 때문에 곳곳에 구멍을 내고 다니면 여자는 구멍 난 곳을 찾아 메워준다.

남편이 직장에서 사고를 쳐도 아내가 개입하면 수월하게 해결된다.

사소한 일이나 일상적인 일에서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면 남자는 쉽게 포기하지만, 여자는 어떻게든 창조적으로 해결해 낸다.


여성적 창조력과 여성성의 출현

여자의 창조력은 결혼초부터 남편이 제시하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해 온 ‘폭넓은 이해력’에서 나온다.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남편을 깊이 이해해 온 만큼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게 되고 억울함을 깊이 쌓아간다.

남편에 의해 억압당하는 압박감과 해야 마땅함에도 못다 한 억울함과 상처는 오랜 세월 내면에 쌓여 화석을 형성한다.

오랜 세월 지구상에 서식했던 유기체의 잔존물들이 화석층을 형성한 결과 어느 순간에는 화석연료가 되어 뿜어져 나오듯이 그녀 안에 쌓이고 쌓인 상처와 아픔과 고통이 마음속에 누적되어 오다가 어느 순간 강한 폭발력을 가진 에너지로 뿜어져 나오는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그녀의 갱년기이다.

여성이 갱년기를 맞으면 감정을 주체할 수 없고, 말에 힘이 생기고, 내면에 억압되어 있던 에너지가 신체화되면서 위로 올라와 얼굴이 화끈거리며 빨개진다.

그동안 억압하여 억지로 삼켜서 내장 속에 잘 보관하여 효과적으로 잘 통제되었던 감정과 억울함이 가슴을 거쳐 머리끝까지 올라와서 어느 순간 갑자기 굉음 같은 폭발음과 함께 펑! 터지는 순간이 온 것이다.

이때부터 남편과 아내의 권력 구조가 바뀌기 시작한다.

그녀의 자기 불신과 자기 절제는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확신에 넘쳐 결의에 찬 얼굴로 남편을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이제 남편의 가장으로서 권위는 추락하고, 남편의 언어적 힘은 폭포수같이 내리꽂는 그녀의 비명 같은 소리에 압도된다.

그동안 남편은 아내의 밀알 같은 존재를 산산조각 내어 가루로 만들었지만, 남편의 앞뒤 안 맞는 말에 순종하면서 자신을 가루로 만든 그 밀알이 썩어져 새로운 모양의 생명으로 피어난다.

남편은 아내에게 재를 뿌렸지만, 그 재가 거름이 되어 그녀는 새로운 생명으로 쑥쑥 자란다.

그녀는 이때부터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그녀는 자기 불신과 자기 절제 그리고 수치심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창조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

여성에게 갱년기는 더 이상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지금 60대 여성의 평균수명이 100세라면, 40대는 110세를 살고, 20대는 120세를 산다.

갱년기가 40대 후반에 온다면 아직 절반도 살지 못한 나이이다.

<어머니의 딸>은 이때부터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진정한 의미의 여성성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딸>은 갱년기 이전의 결혼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지만, 갱년기 이후에 새로운 삶을 만날 수 있다.

여성은 중년기 후반 '여성성'이 나오면서, 더 이상 남편을 이해해 주지 않게 되었다.

남편에 대한 이해보다는 자신의 감정이 더 중요해졌다.

그래서 '지금-여기'의 감정이 바로 여성성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화병'이 오는 이유


최소한 40대 이상의 남성은 자신의 배우자를 찾을 때, '어머니 같은 여성'을 선호했다.

그런 여성은 대개 <어머니의 딸>이다.

남성의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안전한 선택은 없다.

대개 <어머니의 딸>은 기본적으로 히스테리화된 여성이기 때문에 그렇게 성적 매력을 풍기고 다니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아내 곁을 항상 지키고 있지 않아도 된다.

이런 아내를 둔 남편은 직장에 나가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다.


남편은 자기가 익숙한 여성성을 투사하여


"당신은 내 아내로서 모름지기 이렇게 저렇게 살아 줬으면 좋겠어."


하며 요구한다.

아내는 가부장적 질서에 익숙한 <어머니의 딸>이기 때문에 남편의 요구대로 사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다.

남편이 요구하는 아내의 상은 <어머니의 딸>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매우 익숙해 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렇듯이, 아내는 남편이 요구하는 아내의 상을 자신의 여성성으로 알고 살아간다.

그렇게 사는 긴 세월 동안 아내는 자신의 고유한 여성성을 억압하며 살게 된다.


이렇게 보면, '화병'은 여성의 고유한 여성성이 내부에서 일으키는 반란임에 틀림없다.


'화병'이 DSM-5에서 사라진 이유


DSM-5로 개정되면서, DSM-4에 힘겹게 올려놓은 '화병'이 진단목록에서 사라졌다.

그 진짜 이유는 DSM 측에서 잘 알겠지만, 우리는 그 이유를. 우리 사회 안에서 능히 찾을 수 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여성권익이 높아져 페미니즘이 성행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가정 안에만 갇혀 있던 <어머니의 딸>들이 이제 외부 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두드려졌다.

여성들이 이제는 페미니즘이라는 페르소나를 쓰게 되었다.


얌전하고 다소곳하던 <어머니의 딸>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남성화가 된 것이다.

하와로만 살다가 중년이 되면서 갑자기 내면 깊숙이 있던 릴리스(Lylity)가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하와로만 살다가 릴리스가 튀어나와 갑자기 다른 삶을 산다고 해서 여성의 인격이 통합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의 딸>로서 하와의 삶을 시작하였지만, 릴리스로 나왔다 해도 여성이 자신의 고유한 '여성성'을 찾는 일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여성 50세가 중요해진 100세 시대


중년기 심리학인 칼 융(Carl G. Jung)의 분석심리학에서 중년기는 35세에 시작하였다.

오늘날에는 100세 시대를 맞아 중년기가 50세가 되었다.

2010년부터 우리 사회에서도 여성들이 나름 매우 용기 있는 선택들을 많이 했다.


황혼이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여성들이 살아가는 삶의 변화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대개 일본은 한국보다 사회적 현상이 20년 앞서 있었다.


1990년에 일본에서 '황혼이혼'이라는 신조어가 나왔다.

우리나라에서도 2010년이 되면서 '황혼이혼'은 일상용어가 되었다.

2011년부터 2021년까지 통계를 보니, 전체 이혼 비율을 줄어드는데, 황혼이혼 비율은 늘어나고 있다.

7900건에서 17900건으로 늘어났으니, 두 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황혼이혼을 요구하는 측은 아내이다,

60세, 70세 평균수명일 때는 조금만 참으면 죽는다고 생각했지만, 100세 시대가 되니 더 이상 이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내 삶을 살고 싶다'라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지를 비명소리가 '황혼이혼'인 것이다.


졸혼

졸혼도 일본 수입품이다.

2004년 일본에서 출간된 [소쓰콘을 권함](스기야마 유미코)이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서서히 알려졌다.

'졸혼'을 하려면 반드시 '졸혼 계약서'를 써야 한다.

그 계약서를 쓰는 순간부터 결혼 때의 '성혼 서약'의 의무는 멈추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외도'나 '바람'이라는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황혼이혼이 부담스러워 나온, 결혼과 이혼 중간 단계로서 하나의 문화라 자리 잡았다.


여성의 삶의 전환기, 50세

지금은 100세 시대이니, 중년기는 50세이다.

여성의 나이 50이 되면서, 이제 살만큼 다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까지 유지해 오던 남편과의 관계도 이제 굳히기에 들어가는 시기이다.

더 이상 남편과는 작업을 한다거나, 관계 개선을 한다는 생각이 멈추는 시기가 딱 이 시기이다.


여자 나이 50세 면, 자녀들은 대학도 들어갔거나 군대를 갔을 것이다.

이제 자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대학졸업이나 결혼 밖에 안 남았다고 한숨 돌리는 시기이다.

이 나이가 되면 여성은 이제 살만큼 다 살았다고 생각하면서 더 이상 삶의 변화의 여지를 갖지 않으려고 한다.

이 나이에 만일 남편과 각방을 쓰고 있다면, 더 이상 변화의 여지는 없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기억하기 바란다.

여성 나이 50이면, 이제 딱 절반 살았다는 사실을...

앞으로 50년을 어떻게 살 것인가?


나이 50에 이미 인생 살만큼 다 살았다고 여기면서 더 이상의 변화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의 삶을 드라마에 비교해 보자.


좋은 드라마는 최종회 마지막 순간까지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계속 긴장하게 만드는 드라마이다.

시청자로 하여금 계속 긴장하게 만드는 드라마야 말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파워를 가진다.

어떤 드라마는 16회 중 10회까지 시청자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들더니 11회가 되면서 모든 갈등들이 다 해소되면서 16회까지 계속 달달한 내용으로 이어져 갔다.

나는 이 드라마 중 13회를 넘기지 못하고 도중하차하게 되었다.


50세가 넘어 긴장을 놔 버리는 여성의 삶이 바로 이와 같다.

50세가 되면서 그녀의 인생은 그냥 달달한 내용으로 채워나가는 매우 지겹고 재미없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제 자기만의 고유한 여성성을 찾아 나서야 하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평생 여성적 페르소나만으로 살아온 것으로 만족하고 마는 것이다.


'잃어버린 여성성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는 또 다른 주제이니 다른 글에서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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