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무의식과 하나님의 은혜

양적 차원에서 질적 차원으로 바뀌어야 하는 신앙



집단무의식의 의식화


집단무의식은 주체가 어떤 계기를 만들어 내는 일이나, 주체로 하여금 새로운 동기부여를 하는 측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것은 에너지의 양적인 측면에서 해일처럼 밀려오는, 스스로도 감당치 못한 에너지로 모아진다.

집단무의식의 작용으로 어떤 특별한 계기를 만든 후에는 개인의 의식적인 차원에서 집단무의식에서 일어난 과정을 분화를 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집단무의식의 차원에서 아무리 좋은 일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려지든지, 또는 집단무의식적 내용들이 의식에 개방됨으로써 무의식의 내용들이 의식적 인격 안으로 통합해 되어야 마땅하다.


집단무의식으로 임재하는 성령

1980년대 이전에는 교회마다 부흥회라는 행사를 개최하여 성도들은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온갖 은사와 치유와 부흥의 기적 등의 일을 많이 경험하였다.

하나님은 각개인과 개별적으로 만나주시기도 하지만, 그 시기에는 부흥회와 같은 집단적 모임을 통해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적으로 바꿔 이야기하면, 하나님도 집단무의식을 잘 활용하여 성도들에게 은혜를 내리신다고 말할 수 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이 '혀 같은 불'의 모양으로 120명의 예수 제자에게 임재하여 집단의 규모로 임재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성령 임재는 집단무의식의 상황에서 집단의식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집단무의식의 형태로 나타난 이런 환경에서 성도가 하나님을 만나는 근원적 체험은 집단 무의식 속에서 양적 체험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경험을 이러한 양적 체험의 형태로 안주해 버린다.

그리고 이것으로 신앙에 관련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으로 여긴다.


양적 은혜에서 질적 은혜로

집단무의식의 형태로 하나님을 양적으로 체험한 사건은 반드시 의식의 차원에서 질적이 모양으로 하나님을 내면화할 필요성을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의 개별적 관계로 만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개별적 관계 안에서 만난다는 것은 양적으로 체험한 하나님 은혜를 질적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하나님과의 개별적 관계로 만난다는 것은, 곧 나의 일상적 삶 속에서, 그리고 일상적인 관계 안에서 인격을 개별화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성도가 치유집회를 다녀왔다.

그녀는 치유집회 동안 많은 은혜와 내적 치유를 경험했다.

집회를 마치고 돌아올 때, 치유담당 목사님이


"이제 치유와 은혜를 많이 체험하였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마귀라는 놈이 그 은혜를 쏟아버리게 만들려고 반드시 시험에 빠지게 만들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여기서 실컷 치유 잘 받고, 그 은혜를 집에 가서 혈귀로, 분노로 쏟아내지 마십시오.

그러니 집에 가면 가장 가까운 가족이 시비를 걸어올 것입니다.

그때 시험에 넘어가지 말고 시험을 이기십시오."


하나님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관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창세기 1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our image)과 모양(our likeness)으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그리고 인격성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까닭에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는 영혼과 이성이 있고, 이 부분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양은 바로 삼위 하나님 간의 관계를 말한다.

즉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우리 인간에게 구현되며, 그에 따라 아버지 어머니 자녀가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그렇다면 한 가정에 자녀가 많으면 5 각관계, 6 각관계가 이루어지는가?

그렇지는 않다.

아무리 자녀가 많아도 부모와 자녀라는 삼각관계가 있을 뿐이다.

부모는 각각의 자녀와 각각의 삼각관계를 형성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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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구조와 오이디푸스 구조

이러한 부모와 자식 간의 삼각관계를 프로이트라는 정신분석가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틀로 설명하고 있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듣자마자 누구나 그 용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복잡성과 난해성이 머리 위를 맴도는 것 같다.

기독교 신학에서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작업이듯이, 인간관계에서 삼각관계를 이해한다는 것 역시 매우 난해한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이러한 삼각관계에 대해 생각을 닫아버리고 싶어 한다.


대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경험하여 오이디푸스 구조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복잡한 상황, 복잡한 관계를 회피하고 싶다.

어떤 사람은 2자 관계에서는 순조롭게 잘 지내지만, 세 명만 모였다 하면 관계가 깨지는 일을 많이 겪는다.

그런 사람은 내면에 오이디푸스 구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서 그런 일들을 겪는다.


복잡한 상황 또는 복잡한 관계를 건강하게 잘 소화해 내고 잘 겪어낸다는 것은 복잡다단한 갈등 안에서 고민하게 되고, 고통을 당할 수 있으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을 감당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최초의 삼각관계는 바로 나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 관계가 왜 중요한가 하면, 생애 초기 3년간의 어머니와 아이 간의 2자적 근친상간적 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초기 3년에는 어머니와 아이가 경험하는 2자적 근친상간적 관계는 매우 정상적 관계과정이다.

그러나 초기 3년이 지나면서 어머니-아이 사이에 아버지라는 존재가 의미 있게 개입해 들어온다.

이때 아기는 처음에는 어머니와의 좋았던 관계를 깨뜨리는 아버지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말한 '부친살해 환상'이다.

아이가 이 환상을 극복하면서 아버지의 개입을 받아들이게 되고, 심리적으로는 '오이디푸스 심리구조'를 획득하게 되면서, 아이는 이제 사회적 존재가 된다.


신앙은 관계적이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치유집회를 다녀온 성도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내 내담자 중, 어머니가 치유집회를 다녀온 이후 말이 없어졌다고 한다.

어머니의 변화 덕분에 잔소리도 줄어든 효과가 있긴 하지만, 여러 모로 답답하게 느껴진 것이다.

너무 답답해서 어머니에게 다른 가족 몰래 여쭤 보니, 위에서 언급하였던 집회 목사님의 말씀을 들려주시더란다.


나의 내담자는 '과연 그게 맞는지' 물어왔다.


나는 그런 신앙은 1970년대부터 이어 진 부흥 집회의 영향인데, 오늘날 현대인의 신앙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물이라고 답변했다.


진정한 치유는 내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동기화되어 외화 되어 가족과의 갈등관계 안에서 소화되어야 한다.


혼자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양적으로 받은 것이지만, 그 은혜를 가족과의 갈등관계에서 겪어낼 때 그것은 질적 차원으로 바뀌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일상적인 관계 안에서 경험되면서 내면의 갈등을 해소해 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관계로 들어오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리 좋아도 그것은 하나님과의 2자 관계에 머물러 있는, 평면적, 또는 근친상간적 신앙에 불과하다.


하나님과 2자 관계적 신앙은 '내가 천국 가는 것'을 신앙의 유일한 목표로 삼는다.

그런 신앙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지 못하고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신앙을 가질 수 없다.

2자 관계적 신앙은 오로지 '나르시시즘적 신앙'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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