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망령, "신은 죽었다"
모든 신들 중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빌립보서 1:19-30
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앞의 글({집단무의식과 하나님의 은혜})에서 신앙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일상적인 관계성으로 발달해야 하는 것에 대해 짧게 언급하였다.
사도 바울은 둘 사이에 끼여 있는 존재임을 밝힌다.
한편으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내 몸에서 존귀히 되게 하기 위해 죽는 것도 유익하며(20-21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소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23절)고 말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24절) 하며,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기 위해 바울 자신이 이 땅에 살아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믿음을 하나님과 나 만의 관계로 국한하면, 그것은 많은 것을 배제하며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만을 생각하면 죽는 것이 낫다.
그런 신앙은 2자적 신앙으로 세계와의 관계, 일상의 삶, 가족 및 주변 이웃과의 관계를 배제한다.
오직 구원받은 기쁨만을 가지고 산다면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할 필요가 없으며, 빨리 죽는 것이 가장 유익하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을 보면 예수 믿는다고 해서 그 기쁨으로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예수 믿는 기쁨을 가지고 세상에 더 욕심과 탐욕을 가지고, 심지어 시기심과 불의와 짝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그것은 신앙이 하나님과 2자적 관계에 그치며, 그 믿음을 가지고 사회화시키지 못한 결과이다.
교회는 두 가지 기능과 역할을 해야 한다.
하나는 구원의 방주로서의 역할이다.
또 하나는 구원받은 성도로 하여금 성화의 삶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첫 번째 기능만 할 뿐, 구원받은 성도를 성화의 삶을 살도록 그 역할을 일절 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어느 교회든 예외가 없다.
교회의 오랜 전통이자 폐단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비난할 대상도, 비난받을 대상도 없어 이에 대한 어느 누구도 책임질 사람도 없다.
오직 예외적으로 프리드리히 니체가 교회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판한 사실 때문에 이단아로 낙인찍힌 일 외에는 아무도 없다.
교회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2자 관계, 평면적 관계를 맺는데 그치게 만들기 때문에 성화의 도구로 사용되는 관계성을 배제해 버린 것이다.
교회가 성도의 성화를 위한 기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성도의 성숙은 없다.
구원받은 백성에게 성화를 위한 설교는 없고, 성도가 평생 듣는 설교는 구원설교이다.
앞의 글에서, 치유집회를 다녀온 어느 권사가 집에 와서 마귀의 시험에 걸려들지 않으려고, 또는 받은 은혜를 쏟지 않으려고 가족들과 대화를 끊어 버리는 이야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치유를 경험하였지만, 그 치유된 내면을 가지고 현실의 모순, 가족관계의 역기능성과의 갈등을 겪어낼 힘이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니까, 세계는 열광했다.
오랜동안 교회는 인간의 수많은 행위들을 죄로 규정해 왔고, 그런 행위를 할 때마다 양심과 도덕, 그리고 성경적 진리를 강조해 왔다,
그런데 신은 죽었다고 하니, 더 이상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게 되면서 도덕과 윤리, 그리고 양심을 저버리고도 마음 편하게 행동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 보좌에 좌정하셔서 온 우주를 다스리고 수많은 별들을 운행하시며, 하늘과 땅에 관한 모든 일을 관장 하시며, 인류의 역사와 개인의 삶에도 개입하셔서 다스리시는 전능자 하나님은 바로 성부 하나님의 대표적 표상이다.
사람들은 이 하나님을 일반적으로 신(God)이라 부른다.
흔히 '신은 죽었다'라고 하니까, 멀쩡하게 살아 있던 신 자체가 니체의 선언으로 죽어 버린 것으로 오해를 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한 것이 있다.
그 오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삼위일체 개념을 알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신)으로 세 분 하나님이시자, 곧 한분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니체의 선언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세 분 하나님을 각각 죽일 수 있어야 하다.
니체의 선언으로 사람들은 성부 하나님의 죽음을 예견하고 기뻐 날 뛰었지만, 니체는 성부 하나님을 죽일 생각은 일절 없었다.
니체가 무슨 힘이 있어 성부 하나님을 죽이고 말고를 할 수 있겠는가?
단지 니체는 신의 죽음의 현상을 알려 줄 뿐이다.
니체는 자신의 선언을 통해 성자의 죽음을 확실하게 알려 주었다.
성자는 분명히 십자가에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지만, 니체의 눈에는 부활하신 성자를 다시 죽인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제도권 안에 있는 당시 성직자들 뿐 아니라, 교회의 긴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복음과 영생, 그리고 이 땅에서의 생생한 삶을 전하는 대신에 교회의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은 결과 영원히 부활하지 못하도록 성자를 죽여 버린 것이다.
'신은 죽었다'
신은 왜 죽었는가?
"바로 너희가 그 신을 죽였다"는 것이 니체의 정확한 워딩이다.
이렇게 보면, 당시의 성지자들, 교회 역사 속에서 권력 장악으로 복음을 대신한 성직자들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니체가 볼 때, 교회 권력을 행사하는 성직자들의 마음속에 복음 전파의 기쁨보다 인간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권력욕, 탐심, 시기심, 불의함이 가득 차 있었다.
니체가 보기에 그런 성직자들의 마음속에 마땅히 있어야 할 성자 예수는 죽어 있었다.
니체가 보기에, 성직자들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진리가 죽어 있었다.
니체가 보기에, 교회는 영원한 생명을 전파하는 복음보다는 제도의 완고함과 권력에 대한 탐심, 그리고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차 있어 교회는 생명력을 잃었다.
그래서 바른말을 하지 않고는 못 베기는 니체는 이러한 현실을 보고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신은 죽었다"
이렇게 성자의 죽음은 니체에 의해 선포되었다.
성경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모든 신들 중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2)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시 95:3)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시 82:1)
그래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은 다신론이고, 그중에 우세한 여호와라는 신이 있는 것이다."라는 오해.
시편 82:6에서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라고 기록되어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니,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항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요 10:34-36)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는 신이요, 신적 존재이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사람은 모두 영적 존재라고 하는데, 이 영적 존재가 곧 신적 존재인 것이다.
왜 영과 신을 같은 개념으로 보는가? 하면 사람의 영안에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영은 곧 성령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영과 성령이 같은 것은 아니다.
성화란, 우리의 영의 상태가 곧 성령의 상태로 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만일 우리의 영이 성령과 무관하게 살아간다면, 그것은 내 안에서 '성령의 죽음' 곧 '신의 죽음'에 해당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그의 내면 안에 '성령의 죽음'이 선포된 것이다.
만일 하나님과 나만의 신앙으로 2자 관계에서 그쳐 버리면, 성령의 기능을 제한하는 것으로 이것 또한 부분적인 성령의 죽음이다.
만일 하나님을 만나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존귀하게 되는 기쁨에 멈춰 그 신앙으로 세상과 관계하지 않거나 주변사람들과 관계에서 하나님의 자녀에 걸맞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부분적인 성령의 죽음이다.
믿음은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됨으로써 기쁨을 얻는 일이지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이 땅에서 고난 받는 것 또한 마다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고난은 곧 내 삶의 성화를 위한 것이다.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면, 그것은 교회는 연결성, 또는 관계성을 추구하는 영이시다.
(엡 2:20-22)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꼭 기억해야 하는 점은, 성령 하나님은 '여성성'으로 내 안에 계신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성령은 부끄러워하면서 내 안에 숨어 계신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래서 우리는 내 안에 숨어계신 하나님을 놓칠 수도 있고, 자칫 잃어버릴 수도 있다.
나는 이 성령 하나님을 어떻게 찾아내야 하는가?
그것은 성화의 삶으로 가능하다.
기도한다고 충만해진 성령 하나님은 2자적 관계에서나 가능한, 인격을 배제한 낮은 존재 차원에서 만나는 하나님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