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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신

삼위일체의 관계성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몇 년 전 우리는 탁월한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재미있게 봤다.

이 게임에서 처음 나오는 게임은 바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였다.

어릴 때 국어 교과서에서 철수 남우 주연이라면 철수 옆에는 항상 영희라는 여우가 주연을 했다.

교과서 안에 나오는 영희는 천진난만한 한국 소녀였다.


<오징어 게임>에서 나온 영희는 국어 교과서에서 나오는 모습을 그대로 그려졌지만, 더 이상 천진난만한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매우 잔인한 죽음 놀이를 하며 수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는 Netflix를 통해 전 세계적인 놀이가 되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숨바꼭질 놀이의 변형이다.


유아기에는 늘 곁에 있어 주던 어머니가 아동의 눈앞에서 자꾸자꾸 사라지니까, 이렇게 수동적으로 당하기만 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옛 아동들은 놀이를 만들어냈다.

숨바꼭질 놀이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Green Light/Red Light, " "Grandmother's footstep, " "Annemaria Koekkoek, " and "Eins, Zwei, Drei, Ochs am Berg" 등의 이름으로 세계 각국에서 아동들 사회에서 숨바꼭질 놀이가 행해졌다.


이 숨바꼭질 놀이에 대해 로버트 풀검(Robert Fullgum,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의 저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숨바꼭질보다 다른 놀이를 더 좋아한다. 그 놀이에서는 한 사람이 숨고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찾아 나선다. 숨은 사람을 찾아낸 사람은 그 옆에 같이 숨는다. 그러다 보면 작은 공간에 빼곡히 함께 숨게 된다. 얼마 안 가서 누군가 킥킥거리고, 또 다른 누군가 웃음을 터뜨리고, 그러다 모두 들켜버린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신을 숨바꼭질과 비슷하게 ‘숨은 신’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나는 신이 이 놀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놀이에서는 함께 모인 사람들의 웃음소리 때문에 들킨다. 신도 이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발견되리라 생각한다.


아이들은 이 놀이를 통해 숨겨진 것을 발견하고 감추어진 것을 찾기 위한 탐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풀검의 말처럼, 신은 숨는 행위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서 발견되는 기쁨과 웃음을 통해 발견된다.


삼위일체 하나님


성경 속의 하나님은 처음부터 삼위일체임을 예시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이때 '우리'는 쌍수가 아니라, 복수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처음부터 삼위일체이지만, 성경 속에서는 그냥 '내가 삼위일체다'하고 제시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삼위일체임을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내신다.

즉 하나님은 자신이 삼위일체임을 그냥 개념적으로, 또는 존재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긴 역사적 관계 속에서 스스로 삼위일체임을 증명하신다.


일위의 하나님(유일신)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유일신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믿는 종교이다.

이것을 빼놓으면 기독교가 기독교 될 수 없다.

기독교는 다신교일 수도 없고, 범신론일 수도 없다.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만 유대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유대교가 기독교보다 더 유일신종교라 할 수 있다.

유일신 개념은 모세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애굽에서 10개의 재앙을 행한 것은 애굽의 다신교적 성향을 무너뜨리고 오로지 유일한 신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종교로 출발하였다.


이위 일체의 하나님

하나님의 일위 개념, 즉 유일신 개념은 이사야에 의해 이 위 일체 하나님으로 확장된다.

이사야는 제2위 성자 하나님의 탄생을 예언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이사야 9:6)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 (이사야 53:2)


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여전히 아버지 종교에 머물렀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써 아들의 종교가 되었다.

아버지의 종교(유대교)는 전능하신 아버지, 즉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놓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들의 종교로 넘어오지 못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오직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어야만 했다.

전능한 하나님이 아닌,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어야만 했던 그의 아들, 예수의 이름을 믿어 성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오직 저주받은 나무에 오른 자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나무에 올라 죽임을 당함으로써 유대인들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숨은 신이 되었다.


삼위일체 하나님

삼위의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숨은 신으로 계신다.

성령은 모든 사람 안에 숨어 계신다.

성령님은 여성성이라 우리 안에 숨어계시면서 부끄러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성령 하나님은 오순절 다락방에 사도들에게 '혀 같은 불'로 임재함으로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임을 드러내셨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자기 몸 안에 성령은 영원히 숨은신으로 존재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자는 성령이 내 안에 있는 것을 알고, 믿음의 고백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렇지만 많은 성도가 성령이 내 안에서 어떻게 계시고 어떻게 작동하는 영인지 알지 못한다.


양적 차원에서 질적 차원으로


내 영이 성령과 일치되어 가는 과정은 곧 성화의 과정이며 인격화의 과정이다.

성령을 뜨겁게 만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양적으로 만나는 현상에 불과하다.

성령은 불같이 뜨거운 역사만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물처럼 차가운 역사를 행하시기도 한다.


찬송가 183장에서 "성령의 단비를 부어"라는 말은 잘 안 맞다.

성령 대신에 성신이라는 용어가 있다.

성령은 불같은 사역이라면, 성신은 물같이 차가운 사역을 하신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운행하시는 모습'이 오순절의 혀 같은 불보다 더 근원적인 모습이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하기 위해 뜨겁게 다가가신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경험한다.

이것은 양적 차원에서의 은혜이다.

이 양적차원의 은혜는 질적 차원으로 바뀌어야 한다.

질적 차원은 성신의 차가운 역사로 일어난다.


성신의 역사는 싸늘한 칼로 나타난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언 27:17)


질적 차원은 궁극적으로 원수를 사랑하는 과정으로 귀결된다.

원수사랑은 평생에 주어진, 긴 인생 역사 속에서 이루어가는 고통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원수가 바로 가족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가족이 미운 원수로 보이는 것은, 내 안에 원수 같은 마음을 투사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결혼의 목적이나 가족관계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성화에 있다.

가족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밖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여기에는 성화의 과정이 없다.

오직 부부사랑을 통해서 원수 사랑이 이루어져야 한다.

부모-자녀 관계의 승화를 통해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다.


배우자, 자녀가 바로 내 안에 숨은 신이다.

가족은 하나님의 은혜를 질적 차원으로 바꾸게 해 주는 대상이다.

원수 사랑을 통해 내 안에 숨어계신 성령님이 내 안에서 더 이상 숨지 않고, 인격화된다.


숨바꼭질 놀이는 궁극적으로 내 안에 숨은 신을 찾는 놀이를 상징한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한 17:11)


이 기도는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마지막 기도이다.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같게 되기를 아버지께 간구하셨다.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길은, 오직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나의 인격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존재의 본질과 정신적 깨달음의 추구에 대한 심오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 삶에서 평범해 보이는 것들의 의미를 재고하고 우리 안에 내재된 신성한 잠재력을 인식하도록 초대한다.

술래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친 후, 되돌아볼 때 모두가 얼어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은 내게 쉽게 발견되지 않으려고 내 안에서 얼어붙어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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