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서 일어난 부친살해
유일신 사상은 근본주의를 통해 드러난다.
유일신 사상(monotheism)에 철저할수록 근본주의도 철저하게 지켜진다.
구약에서 근본주의는 비느하스에게서 나타난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렀을 때, 백성이 모압여자들과 음행 하기 시작한다.
백성들은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 함께 절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샀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이를 보고 분연히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음행 하는 자의 막사에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창으로 꿰뚫어 죽이니 여호와의 진노가 멈췄다.
비느하스의 여호와에 대한 열심을 계승한 자들이 신약시대의 열심당원이었다.
그들은 혁명분자였으며, 언제 어디서든지 비느하스의 분노를 실천하기 위해 항상 칼을 품고 다녔다.
베드로를 포함한 몇몇 제자들도 열심당원으로서 늘 칼을 품고 다녔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는 품고 있던 칼을 꺼내 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랐다.
근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법칙과 정의를 중시하며, 이를 위해 결코 양보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여호와의 진노를 실천한 비느하스의 열심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을 새롭게 하고 여호와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었다.
비느하스의 근본주의적 열심은 유일신 사상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여호와께서도 그의 열심을 보고 백성에 대한 진노를 멈추셨다.
하지만 비느하스의 근본주의적 열심은 유일신 사상체계하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직도 근본주의를 마땅히 수행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그들은 여전히 구약시대의 율법의 체계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칼을 꺼내 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 행위에 대해 예수님은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태 26:52)
유일신 사상체계가 아닌 2위 일체 하나님의 관계에서는 근본주의는 폐기되는 것이다.
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여전히 아버지 종교에 머물러 있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써 아들의 종교가 되었다.
아버지의 종교는 전능하신 아버지, 즉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놓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무능한 신은 더 이상 신이 아니다.
그것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다.
오이디푸스 시기(3~6세)가 되면, 아동은 자신과 어머니 사이에 끼어드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아동의 환상을 '부친살해 환상'이라 불렀다.
기독교가 아버지의 종교에서 아들을 종교가 되는 과정에서, 부친살해 환상이 작동한다.
그리고 그 환상은 십자가 위에서 실제로 예수의 죽음으로 실행된다.
분명히 아들을 죽였지만, 결과적으로 아버지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써 기독교라는 아들의 종교가 탄생하게 된다
유대인들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지만, 그 죽은 아들이 부활함으로써 아버지의 이름이 죽고 유일한 구원자로 등극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십자가 사건을 놓고
"그리스도교는 아버지의 종교에서 나와 아들의 종교가 되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부친 살해의 환상을 떨쳐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부친 살해의 환상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복종과 반역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고 말했다.
그렇다면 아들은 아버지의 자리를 찬탈했는가?
아니다.
헤겔은 [종교철학]에서, 아들이 승천하여 아버지가 되셨다고 증언한다.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지나는 아들은, 만일 그가 정서적으로 건강하다면, 아동기의 부친살해 환상을 작동하여 심리적 부친살해를 감행한다.
아들은 이 과정을 아버지를 넘어서는 계기로 삼는다.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면서 자신의 자녀이기만 하도록 키우는 것이 아니다.
부모는 아들을 장차 아버지로, 한 아내의 남편으로 키워야 하고, 딸은 장차 한 어머니로 한 남편의 아내로 키워야 한다.
아들에게 아버지의 자격을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 자신이다.
딸에게 어머니의 자격을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어머니 자신이다.
아들이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야 여자를 만나 결혼하여 당당한 아버지가 되고 남편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를 넘어선다는 것은 심리적 부친살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아들이 아버지를 상대로 부친살해를 감하하지 못하면 어른이 되어갈 수 없다.
그런 아들은 영원히 어린아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의 아내는 어른이 되지 못한 영원한 소년을 대하기가 매우 힘들다.
아버지와 아들이 부친살해를 감당해 냄으로써, <부친살해 환상>은 <부친살해 상징>으로 바뀐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친살해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늘 복종과 반역을 반복한다.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 백성들은 광야에서부터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왕조를 이루고, 두 왕국으로 갈라지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등 그들이 반복하는 것은 복종과 반역이다.
행위로는 율법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겠다는 다짐으로 하나님께 복종하지만,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 지킬 수록 하나님을 반역한다.
바리새인은 율법에 대한 복종이 곧 하나님께 반역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부친살해 환상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쪽쪽 부친살해를 감행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하여 그들의 복종은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보다 자기의 를 세우게 된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부친살해 환상을 잘 받아주면 아들은 더 이상 부친살해 환상에 머물지 않고 부친살해 상징으로 넘어간다.
부친살해 환상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직장에서, 조직에서 아버지 같은 사람만 보면 공격한다.
그 환상을 통해 부친살해는 자신의 권위자에 대한 공격으로 일평생 동안 실천된다.
부친살해 환상이 부친살해 상징으로 넘어가지 못한 결과이다.
사울이 그랬다.
그는 분노하는 바리새인이었다.
그래서 스데반이 십자가 복음을 전하다가 사람들의 돌에 맞아 순교할 때 그것을 지켜보는 증인이 되었다.
사울은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대로 살려둬서는 안 되겠다 싶어,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간다.
부친살해 환상으로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다.
그는 이때 타고 가던 말에서 떨어져 거꾸러뜨림을 당한다.
여기서 급진적인 전향이 일어납니다.
칼융은 이러한 극적 변화 장면을 두고, 에난치오드로 미아(Enanchiodromia)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사도바울은 부친살해 환상으로 분기탱천하여 그리스도인을 체포하러 가는 중, 에난치오드로미아를 경험하면서 진정한 부친살해를 한다.
그는 하나님의 개념을 바꿔버렸다.
율법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뀐다.
부친살해 환상에서 부친살해 상징으로 바뀐다.
이렇게 하나님의 개념을 전향적으로 바꾸었지만, 사람의 의식을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울은 유일신 성부 하나님에 대해 부친살해하고, 제2위 하나님, 성자 하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신앙의 방향을 바꾸었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인이 갑자기 복음전파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충격을 완화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심령 안에서 율법의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유일신을 떠나보내는 애도를 해야 했다.
그래서 갈 1:17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에 삼 년 만에 게바를 방문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모시다가 이제 2위 일체 하나님을 받아들여야 하기 위해 긴 애도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사울은 에난치오드로미아 사건으로 성령을 뜨겁게, 급작스럽게 쏟아붓는 양적 은혜로 만났다.
사울은 곧장 복음전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곧장 아라비아 사막으로 들어갔다.
아라비아 사막에서의 성령과 만나는 과정은 곧 성령을 통한 인격화 과정이다.
그는 이 긴 과정을 통해 사울에서 바울로 바뀐다.
사울에서 바울로 이름이 바뀌는 과정은, 유일신(바리새인일 때)에서 2위 일체 하나님을 경험(에난치오드로미아 사건)하고 아라비아 사막에서 자신의 내면에서 성령을 인격화 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완성되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