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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근본주의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만나기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다


기독교에도 근본주의가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성경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며 기독교 교리와 실천에 엄격한 접근을 취하는 신앙적 입장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진리로 간주하며, 이를 모든 측면에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따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신념은 종종 다양한 주제에 대한 보수적인 견해와 결합될 수 있다.

여기까지는 근본주의에 대한 문제점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위의 서술에서도 근본주의의 문제점이 보인다.

'성경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은 성경을 절대적 진리로 믿는다는 표현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무조건적 신뢰라는 것은, 맹목적 신뢰를 말한다.

그 뜻은 시대적 사회적 맥락을 살피지 않고 성경이 진리이기 때문에 상황파악에 있어 절대적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관점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면 참으로 불행한 일들이 많이 발생할 수 있다.


과거 오리게네스 학파가 그랬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 지 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가 4:43~)


이 구절 때문에 오리게네스와 그의 제자들은 손과 발을 잘랐다.

심지어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이 괴로워 스스로 고자가 되었다.


만일 오리게네스 학파가 뇌가 가장 민감한 성감대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자신의 모가지도 잘랐을 것이다.

이런 것이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들의 행태이다.


산상수훈은 지키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내가 신대원을 다닐 때 좀 무시무시해 보이는 신학생들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현실의 삶을 살면서 마치 전쟁터에 나가기 직전의 결기에 찬 듯해 보이는 용사와도 같은 신학생들이었다.

그들의 특징은 산상수훈을 예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반드시 실천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매우 순수한 근본주의자들이었다.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주장을 했다.


"산상 수훈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이렇게 할 수 없다는 한계를 정해주신 것이다."


그들은 나의 이런 말을 듣고 나를 버러지 취급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느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기에는 끊임없이, 그리고 일상적으로 실패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본모습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껏 죄를 지으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사람이 정서적 건강함으로 가는 첫걸음이 바로,


"죄지을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자폐자나 강박증 환자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다.

그들은 죄지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죄책감이 자신의 일상적인 삶의 자유함을 빼앗아 가 버린다.


죄지을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한 후에 우리는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는 산상수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모든 기독교인이 산상수훈을 지키려 들면 세상의 법체계가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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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산상수훈을 주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만일 사람이 산상수훈을 다 지킬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십자가가 필요 없게 된다.

십자가는 죄인들의 자기 죄를 고백하는 공간을 표상한다.

'죄지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죄인이 산상수훈 앞에서,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산상수훈을 주신 산 저편에 있는 또 다른 산, 골고다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바로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이다.


고 김동길 교수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니라"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닌,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산상수훈을 다 지켜 낼 수 있고, 죄를 안 지을 수 있다는 자부심은 바리새인의 근본주의적 자부심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2자 관계에 머문 근본주의 신앙


오늘날 성숙한 기독교인을 보기가 쉽지 않다.

이때 성숙함이란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위상에 맞게 하나님을 삼자 관계로 만난 사람의 삶을 말한다.

많은 성도가 성부하나님만 찾는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만 찾고 고난을 받고자 하지 않는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성도의 기도를 들어보면, 맨날 '주시옵소서' 기도이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할 생각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어느 목사님이 선교사를 지원하여 호주에서 선교훈련을 받았다.

한국 선교사들은 어느 나라 선교사보다 뜨겁게 그리고 길게 기도한다.

미국의 어느 선교사는 30분도 안 되는 기도를 하고 룰루랄라 하더란다.

그 목사님은 속으로 그를 비난했단다.

그 목사님이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은, 나는 맨날 하나님께 뭘 달라고 기도해 왔는데, 내가 해달라고 한 그것을 그 목사님은 내가 기도하는 동안 직접 행동으로 옮겨 몸소 실천하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 목사님은 크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으로 나가지 못한 채 하나님께서 직접 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내 뜻은 보잘것없으니 하나님의 뜻대로 해 달라고 기도한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것을 보고 목사님께 울부짖으면서 와서 기도해 달라고 전화를 드렸다.

목사님이 그 아들에게 호통을 쳤다.


"아버지가 그 지경이면 112를 불러 병원으로 모셔야지 왜 나를 부르느냐?"라고.


누군가 병원에서 치료를 잘 받아 몸이 회복되었으면,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한다.

좋은 병원과 좋은 의사, 그리고 좋은 의술을 통해 낫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군가는 배우자가 말기 암에 걸려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사망하게 되자 하나님을 원망한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고쳐 주지 못하시는가?"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며 믿음을 떠났다.


삼위일체 하나님 만나기


이 모든 현상들이 하나님을 전능자 하나님, 성부 하나님만 찾는 근본주의적 신앙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영광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도 함께 받아야 제2위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된다.

성령님을 만나는 방식이 관계성 안에서 갈등을 해소하며 인격발달을 이루어가는 신앙의 형태를 이해하고 실천해 갈 때에야 비로소 삼위일체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많은 성도가 기도할 때,


"보잘것없는 내 뜻을 버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제 심령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은 내 인격을 무시하고 나 인생을 장악하는 비인격적 존재이다.


자기를 비하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다.

내 뜻이 하나님의 뜻이 되게 힘써는 믿음이 진정한 신앙이다.


이에 대해 사도바울은 정확한 표현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정립해 준다.


"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열정, 꿈, 계획을 통해 일하셔서 그들의 삶에 기쁨과 영광을 가져다주기를 원하시며, 궁극적으로 그들의 각자의 욕망을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과 일치시키기를 원하신다는 점을 강조한다.

젊을 때부터 내가 꿈꿔오던 것을 몸소 실행하며 도전하고자 하는, 나의 꿈과 소원을 두고 충분히 연구하고 기획하여 도전하는 것이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성령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전에 먼저 내 안에서 나의 기쁨을 위해 먼저 꿈을 꾸고, 다음에는 도전하고 계획하며 실천하여 나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 곧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하는 것임을 내가 알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여 내 삶이 내 인생에서 얻는 기쁨과 영광이 곧 하나님의 기쁘심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고 삶의 개인적 측면과 관계적 측면 모두에서 성품의 성장을 추구하는 것을 포함한다.

개인이 신앙과 관계에서 성숙해지면, 그 안에 계신 성령께서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적극적으로 그 여정을 인도하고 형성해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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