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즘의 시대, 관계성을 잃어가다
창세기 1:26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의 형상>은 하나님의 영혼과 인격을 인간에게 심어주셨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동물과 달리 영혼을 가졌고, 이성 능력과 감정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모양>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이를 하나님의 삼위일체 관계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을 손수 지으시고 동물들의 이름을 지으라고 명하신다.
이 일을 통해 아담은 각 동물들을 깊이 관찰하게 되었다.
이로써 각 동물의 특성과 본성을 파악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모든 동물들의 본성에 걸맞게 이름을 지어 준 후, 아담은 스스로 자신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모든 동물이 다 짝이 있으되, 나에게는 짝이 없다.'
이로써 하나님이 아담으로 하여금 동물들에게 이름 짓게 하신 이유가 밝혀졌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그냥 배우자를 준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욕망을 일깨운 후 대상을 주셨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담은 그의 갈빗대로 지은 여자를 보자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를 헌정한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이로써 홀로 있던 아담은 짝을 찾아 2위 일체를 이루었다.
타락 후, 아담과 하와는 자녀를 낳아 3위 일체의 가족구성원을 완성하였다.
이로써 아담은 가족을 온전히 구성함으로써 하나님의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사회에 공통적으로 허락하신 두 가지 제도가 있다.
그것은 가족제도와 국가제도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 두 가지 제도는 매우 견고했다.
특히 조선시대 이후 유교적 전통이 유지되면서 우리 사회에서 가족제도는 그리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견고하던 가족제도가 최근 이대남 이대녀의 출현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부장적 사회에는 거대한 상징적 질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가부장적 권력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이 가부장적 권력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 가부장적 권력이 흔들리고 있다.
과거에는 남녀가 결혼하면서 서로 누군지를 모른 채 결혼했다.
결혼하고 보니, 여자가 남자의 본모습을 알게 된다.
비록 남편이 무능력하고, 술중독자이며, 폭력까지 행사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그런 남편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남편 뒤에는 거대한 상징계적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상징계적 질서란 곧 가부장적 권력을 의미한다.
세상에는 남자 위주의 권력이 오랜 역사에 걸쳐 촘촘하게 짜여 내려온 것이다.
그래서 많은 여자들이 남편으로부터 해괴망측한 일을 당하고, 폭행을 당하고, 술주정을 당해도 꼼짝없이 당해야만 했다.
그러한 상징계 질서가 최근에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다.
그것은 곧 이대남 이대녀의 출현 때문이다.
1990년대 생이 사회에 출현하면서 세대 간 불연속적인 차이가 발생한 것이다.
이들은 이데올로기기가 별로 없어 과거의 상징적 질서, 가부장적 권력 따위는 이미 분리수거한 지 오래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 살던 시절, 여자가 한 남자를 남편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촘촘하게 짜여 있는 상징계적 질서 내에 있는 한 남자로 보았다.
남자는 상징계 질서와 가부장적 권력의 보호를 철저하게 받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여자로서는 함부로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 시대에는 여자가 이혼을 하고자 하면, 온갖 시선을 다 의식해야만 했다.
모든 사람들이 가부장적 문화적 시각을 가지고 이혼한 여자를 바라본다면, 그 여자는 그 시선에 압도될 것으로 예상하여 이혼을 쉽게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유교적 이데올로기에서 확 벗어나 있는 이대남 이대녀는 그런 시선을 일절 의식하지 않는다.
결혼을 한다고 해도 이대남 이대녀는 시월드의 상징계적 질서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대녀라면 고부간의 갈등은 염두에 두지도 않는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시선을 의식하고 눈치 보며 잘 모셔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어느 가문 있는 집 아들이 결혼할 생각을 일절 하지 않다가 30세가 넘어가면서 여자와 교제하게 되었고 결혼까지 약속하게 되었다.
관계가 깊어져 가면서, 아들은 어쩔 수 없이 먼저 어머니에게 결혼하겠다고 귀띔을 주었다.
어머니는 기뻐 날 뛰었다.
"이제 며느리를 보면, 그동안 혼자 하던 제사상도 며느리와 같이 준비할 수 있고... 집안의 그 많은 일들을 함께 할 수 있는 며느리가 들어온다니 너무 좋다. 아들!!!"
어머니의 그 말씀을 듣고 아들이 말하기를,
"그런 것 안 하기로 하는 조건으로 결혼하는 건데?"
이 한마디에 어머니의 모든 기대와 상상력은 종말을 고했고, 가족 내 복잡한 상황들이 단숨에 정리되고 말았다.
2000년 이전에만 해도 사람들은 사회가 정해 놓은 스케줄 대로 사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때는 30세 이전에 모든 것을 다 해결해야 했다.
30세 전에 대학졸업, 군 전역, 취직, 결혼까지 다 마쳐야 했다.
그래야 55세 정년 계획에 맞춰 미래를 기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년이 되기 전에 아들 딸 결혼까지 마치면, 이제 65세~70세 죽을 준비만 하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결혼도 하나의 해결해야 할 과제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니 남자는 여자가 누군지 모르고, 여자는 남자가 누군지 모르게 결혼을 했다.
그때만 해도 남자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권위의 후광을 받아 아내를 존중하지 않았다.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 순종을 궁극적인 미덕으로 여겼다.
2000년이 넘어가면서, 민주화시대를 맞아 페미니즘의 발흥으로 여성의 권익이 크게 신장되었다.
PC(political correctness)의 등장으로 여성뿐 아니라 약자에 대한 배려가 크게 향상되면서 약자들의 목소리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 가부장적 권위를 덮어주던 천장을 뚫어 버렸다.
상징계 질서에 속하던 합리성과 인류 보편적 가치, 상식적인 도덕이나 윤리는 점점 퇴출되기 시작했다.
기존에 당연하게 여겨져 오던 진리의 기준이 달라진 것이다.
거기에다 진보정권의 법적 보증이 뒷받침되면서
<약자의 고통스러운 피해 호소>
가 진라의 유일한 기준이 되었다.
그리하여 사회는 여성들의 피해호소를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며, 남녀 간에 발생하는 문제에서 고소당하는 남자는 <유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상황판단에 무딘 대부분의 남자는 말 한마디 잘 못 한 것 때문에 고소를 당하기 일쑤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은 남성을 성적으로 곁눈질하는 혐오스러운 대상으로 여기며 잠재적 성 범죄자로 몰아가는 경향성이 생겼다.
남성은 조직 생활 중이거나 데이트 중에도 여성에게 말 한마디 잘못하면 혐오스럽게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게 된다.
이것은 과거의 남성들이 여성을 연약한 존재이며, 마땅히 남성의 보호가 필요한 존재로 여겨 왔던 것과는 크게 상반된 입장이다.
서로 다른 성이 만나 서로에게 반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는 자연스러운 연애 과정에 이제는 PC가 들어오고, 페미니즘과 미투까지 염두에 둬야 하는 관계의 어려움이 남녀 사이에 끼어들었다.
특히 미투는 공소시효가 없으니, 멋진 연애를 하고도 헤어지고 나면 그동안 사랑과 애정의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 성적 수치심이나 상처로 남게 되면 언제든지 고소당할 수 있는 남성의 취약한 법적 지위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대남 이대녀는 연애도 철저한 계산 하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래서 이대남 이대녀가 합의하에 성관계를 해도 혹시 모를 나중의 미투 사태까지 예방하는 차원에서 성관계하는 장면을 녹화나 녹음을 합의하는 전제로 이루어지는 상황까지 도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남성의 입장에서 봐도 여성을 알지 못한 채 멋 모르고 결혼하는 시대는 지났다.
남성은 이제 여성을 단순히 연약한 존재, 보호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이제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
남성은 조금만 상황판단을 잘 못하면 여성은 내 인생을 파멸로 몰아갈 수 있는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
남성은 더 이상 여성을 함께 지낼 수 있는 커플로 보지 않게 되었다.
과거에는 여성들 중 어머니의 딸이 많았다면, 요즘은 아버지의 딸들이 많아졌다.
그 말은 현모양처를 꿈꾸는 여성보다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믿고 혼자 살겠다는 여성이 많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꼭 아버지의 딸이 아니더라도, 자기애적이어서 나 밖에 모르는 여성, 공주병에 걸려 있는 여성이 많아져 다른 사람과 교류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나 혼자 잘 났으니, 세상에 나 혼자 세워나가면 되는 사람들이다.
특히 능력 있는 여성은 20대 후반, 30대를 넘어가면서 다음과 같은 고민을 해 본다.
"내가 이렇게 능력이 있어 혼자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굳이 결혼을 해서 시월드에 들어가서 복잡한 인간관계에 휘말려들 필요가 있을까?"
더구나 페미니즘이 판을 치는 세상이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가 옆에 없어도 남자보다 더 강력한 사회적 보호가 있으니 사회적 안전망은 충분히 확보된 상태라고 안심할만하다고 생각한다.
또 인터넷의 발달로 여성이 보기에 다양한 사회적 현상 속에서 보이는 남성의 모습은 너무나도 유치하고 어린아이 와도 같아 보인다.
개인의 삶이 소중해진 이 시대에 여성은 굳이 내가 나의 개성과 능력을 희생해 가면서 한 남자를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의문을 가진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오늘날 이대남 이대녀의 결혼관은 위에서 언급한 이런저런 이유로 창세기 1장 26절에 말한 <우리의 모양>이라는 삼위일체적 관계성을 많이 벗어나기 시작했다.
나의 탁월함과 전능감에 젖어 굳이 다른 사람과 섞여 사는 것에 대해 큰 부담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추구하는 유대교의 신앙적 편향성과도 통한다.
내 인생에서 나를 구원할 자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영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에서 혼자만의 나르시시즘적 세계에서 구원해 줄 사람은 바로 배우자인 것이다.
결혼이란 배우자와 함께 살면서 자신의 전능함을 내려놓고 상대방에게 맞춰 살 줄 아는 '낮아짐'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다.
이대남 이대녀는 자기중심이라는 구심력이 너무 강해서 남에게 나를 헌신할 생각이 없는 경우가 많다.
어떤 여성은 장성한 아들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이 아들은 결혼을 할 생각이 없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물으니,
"결혼을 하면 내가 번 돈으로 아내와 자녀가 모두 같이 써야 한다는 게 용납이 안 된다. 내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엄마 왈, "너는 여자 친구도 있잖아? 서로 사랑하는 것 같던데, 걔랑은 결혼할 생각이 없는 거야?"
아들 왈, "응, 우리는 결혼을 안 하는 조건으로 연애를 하는 거야."
엄마는 충격을 받는다.
자기중심적인 이대남 이대녀는, 나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데 나만의 전능함을 추구하며 사는 게 무슨 문제가 되나?
그것은 유대인이 전능자 성부 하나님을 찾는 이치와 똑같다.
'저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저주받은 자, 창에 찔림을 당한 자, 피 흘리는 자, 조롱을 당하는 자, 이런 자를 내가 왜 받아들여서 내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거지?'
이대녀의 고민은 다음과 같다.
'내가 혼자서 살아도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왜 결혼이라는 관계의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
이자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대남 이대녀 중에는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 조건에 합의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되면 부부간 2자 관계도 위태로워진다.
배우자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자녀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어떤 면에서는 자녀는 부부 결혼에 대한 안전망이 된다.
내가 어울리지 않는 배우자를 만나 당장이라도 이혼하고 싶지만, 자녀가 있기 때문에 고난과 위기를 극복해 가는 중에 각자가 성숙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대남 이대녀 중에는 자녀를 안 낳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2위 관계까지는 확보하였으나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모양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녀를 낳아도 최소한 셋을 낳아야 삼위일체적 관계성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하나를 낳아도 고맙고 둘을 낳아도 넉넉하지만 셋을 낳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모양으로 낳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가 계속 발전하고 진화함에 따라 사람들이 연결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디지털 기계에 대한 조기 노출을 비롯한 다양한 요인에 기인할 수 있으며, 이는 어린이의 언어 능력 상실과도 관련이 있다.
통계에 따르면 어린 나이에 디지털 기계에 노출되면 주로 남성에게서 발견되는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과도하게 생성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호르몬 불균형은 언어 능력 저하와 관련이 있다.
이 놀라운 발견은 디지털 시대가 미래 세대의 인지 발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컴퓨터 기반 업무를 주된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아이를 임신하고 특히 아들을 출산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믿어지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개념은 일화처럼 보일 수 있지만, 디지털 시대가 인간관계와 생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나타낸다.
과거에는 조직 내에서 업무가 할당될 때 개인이 함께 모여 얼굴을 맞대고 토론하고 아이디어를 브레인스토밍하며 효과적인 해결책을 공동으로 모색했다.
아날로그 시대는 대인 관계와 팀워크에 대한 강한 유대감을 조성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조직은 이제 협업보다는 개인의 숙련도에 더 의존하여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개인을 우선시한다.
보다 독립적인 업무 문화로의 전환은 의심할 여지없이 개인적인 관계의 감소로 이어졌다.
업무 완수를 위한 기술 의존도가 대면 상호 작용의 필요성을 대체하면서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할 기회가 줄어들고 고립감을 조장하고 있다.
또한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가상 커뮤니티가 생겨나면서 사람 간의 진정한 상호 작용이 온라인 연결로 대체되었다.
디지털 시대는 즉각적인 만족과 정보에 대한 즉각적인 접근을 추구하는 문화를 도입했다.
기술은 의심할 여지없이 수많은 혜택과 발전을 가져왔지만, 빠른 해결과 짧은 집중력에 익숙한 사회를 만들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려는 의지가 줄어들었다.
대신 개인은 소셜 미디어의 좋아요, 공유, 댓글을 통해 즉각적인 확인과 만족을 추구한다.
이처럼 디지털 시대는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의 생활과 업무 방식에 혁명을 일으켰다.
디지털은 편리함과 효율성을 가져다주었지만, 개인 간의 연결이 단절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디지털 기계에 대한 조기 노출과 그로 인한 언어 능력에 대한 영향, 독립적인 업무 문화로의 전환, 가상 연결의 확산 등이 모두 이러한 상실에 기여한다.
디지털 사회가 되면서 사람은 삼위일체적 관계성을 더욱 잃어 가고 있다.
사회가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여 기술 발전과 진정한 인간관계의 보존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