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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와 집단무의식

잃어버린 개별화

개성화보다는 개별화


칼융은 인격의 최종 목적으로 개성화(individualization)로 놓고 있다.

개성화를 위한 과정으로


첫째, 그림자 인식

둘째, 심혼(아니마, 아니무스)의 분화


를 중시한다.

내가 보기에 칼융의 개성화은 일반인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 세계에서 칼 융이나 칼융급의 몇몇 사람이나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어느 누구도 개성화를 이룬 적은 없다.


그것은 기독교에서 '성화'의 의미와 유사하다.

성화를 이룬 사람은 없으며, 단지 그 과정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상담의 현장에서는 개성화보다는 개별화 과정(individuation)이라는 개념이 더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다.

개별화는 집단무의식 및 집단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개별화 과정


대부분 사람이 집단적 사고를 하기 때문에 자신이 이런저런 현실에서 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잘 모른다.

그 답은 바로 집단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것에 대한 해결책이 바로 개별화이다.


특히 공황장애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집단적 사고를 한다는 것이다.

왜 연예인들이 공황장애를 많이 겪는가 하면, 연예인이라는 직업자체가 집단적 투사를 받고 그에 따라 집단적 사고로 반응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이 공황장애에서 벗어나기 위한 특별한 비책이 바로 개별화 작업이다.


개인의 성장과 자아 발견에 중요한 개별화 과정에는 무의식을 의식으로 통합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그러나 개별화의 욕구를 잃은 개인은 종종 집단 무의식에 압도당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바리새인들은 매우 집단화되어 있기 때문에 집단의식과 집단무의식에 쉽게 굴복한 상태에 있다.


개별화는 개인이 자아를 개발하고 무의식적 요소를 의식적 성격에 통합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여기에는 의식의 기초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는 것이 포함된다.

이 섬세한 균형에 참여함으로써 개인은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응집력 있는 성격을 구축할 수 있다.


페르소나 강화 -> 개별화 실패


바리새인들은 내면의 세계와 단절된 채 개별화의 필요성을 소홀히 하는 개인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공적인 페르소나를 엄격하게 고수하고 내면의 자아를 무시함으로써 내면의 신 원형과 접촉하지 못하고 만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집단 무의식에 쉽게 압도되어 집단의식적 행동으로 이어간다.


개인이 개별화에 실패하면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하나님 원형과 동일시하여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과대평가한다.

이런 사람이 힘주어 강조하는 바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믿음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하나님만이 해결해 줄 수 있다.

기도만이 해결의 열쇠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만이 살 길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주장을 잘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나의 믿음만이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

하나님은 나만 사랑하신다.

나의 기도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나의 신앙은 다른 사람과 다르다.

나는 다른 목회자와는 달리 나만이 하나님 앞에서 전능하다

하나님은 오직 내 편이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믿는 하나님과 다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느새 그의 페르소나가 되어 끊임없이 자신의 전능함을 나타내려고 한다.


자기 전능감(페르소나)으로 실패한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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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전능하신 사역을 통해 온갖 기적과 이사를 행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한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모세가 바로 그런 실수를 했다.


광야 생활 중에 반석에서 물을 내는 사건이 두 번 나온다.

처음 사건은 호렙산에서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원망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몰이 나오리니"(출애굽기 17:6)


두 번째 사건은 신광야에 이르렀을 때, 백성들이 또 물이 없다고 원망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민수기 20:8)


이때는 모세와 아론이 원망하고 반역한 백성들에게 화가 잔뜩 나 있었다.

그때 모세는 페르소나를 발동하여 하나님의 전능함 대신, 자신의 전능감에 젖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행동한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수기 2:10~11)


모세는 두 가지 실수를 범했다.

첫째, 물을 내는 데 있어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고 말함으로써, 초자연적이자 전능한 능력을 행하는 데 있어 주체가 모세와 아론이 되어 버렸다.

둘째, 이번에는 반석을 치지 않고 반석에게 말로 명령하여 물을 내게 함으로써 말씀으로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시고자 하였으나 모세와 아론은 혈기로 지팡이로 반석을 치고 말았다.


이 두 가지 실수는 모세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범죄에 해당된다.

그 동안 모세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큰 일을 행한 것에 비하면 별것 아닌, 매우 사소한 실수였지만, 하나님은 이 실수를 용납하시 않으셨다.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늘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페로소나와 동일시 되어, 자신의 본성을 잃어 버리는 것이었다.

모세는 온유한 사람으로 하나님이 칭찬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자기 전능감에 빠져 하나님 권위를 대신하는 자기 우상화는 용납받지 못하는 범죄로 취급되었다.


오늘날에도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수많은 목회자들 및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능력과 은사를 행사하였지만,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내가 했다" "내가 전능하다" "하나님은 나만을 특별히 택하셔서 나를 통해서만 이런 일을 행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나의 전능함으로 귀결되어 성도들 사이에서, 그리고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특별한 지위와 위치를 가지기를 원한다.

모두 집단적 사고로 뭉쳐진 페르소나의 완고함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대개 기독교 안에서 하나님의 원형적인 능력을 행하는 사역자들은 집단적 사고에 젖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만이 특별하다'는 특권의식으로 페르소나의 완고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하나님의 전능함을 나의 전능함으로 바꾸는 자기애적인 교만은 늘 경계되어야 한다.


교회의 두 번째 목적은 성화


이렇게 집단적 사고에 젖은 목회자의 지도를 받고 있는 성도라면 어떻게 신앙적인 개별화를 경험할 수 있겠는가?

개별화되어 본 적이 없는 성도는 원형적인 사역을 행하는 목회자의 집단적 사역에 휘둘려 모든 성도가 집단적 사고를 하게 된다.


오늘날 교회를 보면 교회론에서 벗어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 시대에 이미 대형교회나 중형교회가 되었다면 거의 100% 목회자에 의해 강요된 집단의식과 집단 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면 된다.

목회자가 성도를 개별화시켰다면, 그 교회는 절대적으로 중형화되거나 대형화될 수 없다.

성도들을 집단화시켜야 중형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교회는 교회의 두 번째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교회가 있어야 하는 첫 번째 목적이 구원의 방주의 역할에 있다면, 두 번째 목적은 그렇게 구원받은 성도를 성화시키는 것이다.

성화는 절대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화는 하나님과의 관계, 가족관계, 이웃과의 관계에서 개별화되는 것이 그 시작이다.


일상에서의 집단적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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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일상 속에서 집단적 사고로 텍스트화되어 있다.

텍스트화되었다는 것은, 씨줄과 날줄로 짜인 텍스타일과 같다는 말이다.


이부영 교수는 자신의 저서 [분석심리학]에서 페르소나가 일상화되어 집단적 사고를 하는 경우들을 다음과 같이 들었다. (97~98쪽)


우리나라 말 가운데 페르소나에 해당하는 말은 '체면, '얼굴', '낯'과 같은 것이다. 어른의 체면, 남편의 체면, 교육자의 체면, 선생의 체면, 숙녀의 체면 등 그것은 모두 어떤 사회 집단이 그 집단의 특수한 성원에게 한결같이 요구하는 일정한 행동상의 규범이며 제복과 같은 것이다.


체면이라는 말을 '사명', '역할', '본분', '도리'라는 말로 바꾸어도 같은 설명이 성립된다.

'감히 뵈올 낯이 없다', '얼굴을 들 수 없다' '어디다 낯을 들고 다니느냐'는 등의 표현은 체면 상실의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행동 규범의 일반성을 표시할 때 '모름지기', '무엇이란' 등의 말을 잘 쓴다. '남자란, 여자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은 '페르소나'를 강조하는 말이 된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라고 시작하는 주장은 모두 그런 집단규범이다.

'국민 된 도리', '민족의 일원', '선배로서', '후배로서'. '상사로서' '아랫사람으로서' 할 때도 모두 페르소나의 차원을 말한다.


페르소나를 사용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집단적 사고를 한다는 말이다.

개별화한다는 것은 이러한 집단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페르소나를 마땅히 사용해야 하지만, 그 가운데서 내가 어느 때에 집단적 사고를 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렇게 페르소나에서 집단적 사고를 떼어내는 능력이 바로 개별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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