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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 방식(1)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임재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이 구절은 출애굽 한 후 마음이 바뀐 바로왕이 군대를 이끌고 탈출한 히브리 노예를 죽이겠다고 병거와 마병을 이끌고 멀리서 추격해 오는 것을 본 모세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성들에게 한 말이다.


이 구절은 시편 40편에서도 재연된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구약에서 발생한 사건은 신약의 관점에서 다시 봐야 한다.

구약의 관점을 현실로 가져와서 적용하면 엉뚱한 일이 발생한다.


어떤 목사님이 위의 구절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제목으로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


로 잡았다.

어떤 성도가 사업을 하겠다고 그 목사님에게 상담을 하니 그 목사님은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십시다."


어떤 청년 유학을 가기 위해 토플 시험을 여러 차례 치렀지만 원하는 점수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목사님께 공부의 어려움에 대해 상담하기를 원했다.

그 목사님은 그 청년에게


"너는 영어 공부 하지 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 믿고 시험을 쳐라"


이런 얼토당토않은 적용을 해서 이 목사님은 나중에 그 교회에서 쫓겨났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표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주신다.

구약 성경에 수많은 구절들이 하나님이 알아서 전능하심을 드러내는 사건들이 많다.

그것은 백성들에게 계시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사건들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자기를 계시하시기 위해, 그리고 구약의 내러티브를 완성하기 위해 친히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은 주로 유일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

하나님은 유일신이어서 유일신으로 계시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 백성의 인식 수준이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밖에는 인식할 수 없어 그러시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왜 질투를 하시겠는가?

그것은 당시 인간의 정서적인 수준에 맞춰 그런 모습으로 표상하신 것이다.


그 유일신 하나님이 2위 하나님으로 계시하시는 때는 바로 이사야 시대였다.

성지 하나님은 이사야가 한 아기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계시되기 시작했다.

이사야 시대는 인류 역사적으로로 중요한 계기가 형성되는 시기였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기원전 8세기에서 2세기 사이를 <차축시대>라고 불렀다.

동양에서는 공자 맹자가 인도에서는 석가모니가,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하면서, 그들은 인류 문화의 새로운 변곡점을 만들어낸 것이다.


축의 시대를 거치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신화에서 자연으로 옮아가게 되었고, 보편적 자연법칙을 탐구하려는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학문의 시작이다. 또 다른 한 편의 관심은 인간 자신에게로 옮아가 삶에 관한 보편적 법칙을 알아내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이렇듯 축의 시대를 통해 '자연과 도덕의 보편성'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인간은 '이성'과 '인격'을 가진 존재로 탈바꿈했다. 야스퍼스는 이러한 변혁을 '정신화(Vergeistigung)'이라고 이름 붙였다. 인간이 비로소 정신적 존재로 변화되었다는 뜻이다.(위키백과)


린다.

선지자 이사야가 출현하여 성자 하나님의 임재를 예고한 것이 성경사상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지금 나는 모세 시대에는 유일신 하나님만 계셨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세분 하나님이 함께 일하셨지만,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밖에는 인식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10개의 재앙을 목격하였다.

애굽의 10개 재앙이란, 애굽 사람 입장에서 보면 애굽의 중요한 10개의 신, 다신론이 무너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규정하는 것이 그들의 사고 체계상 가장 안전했다.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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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시대의 하나님은 전능자로서 백성들 앞에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직접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지만, 하나님으로서 전능하심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함을 드러내셨다.

성자 하나님은 이 약함 속에 자신의 전능함을 감추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

말하자면, 십자가 뒤로 숨은 신으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이 신을 없는 신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들은 파르메니데스처럼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라고 외쳤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성부하나님은 원래 있는 하나님이고 성자로 자칭하는 그 하나님은 없는 하나님인 것이다.

성자 하나님은 십자가 뒤에 숨으셨기 때문에 <숨은신>이 되고, < 없는 신>이 되었다.

그 숨은 신은 오직 내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고백을 하는 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셨다.


성령 하나님은 여성성으로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부끄러워 숨어계신다.

유대인들은 저주받은 나무에 달려 죽은 수치스러운 하나님이기에 하나님이 수치스러운 존재일 리가 없다면서 성자 하나님을 배척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나무 위에서 낮아지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자 하나님은 왜 약한 하나님이 되셨나?


마귀가 가진 가장 강력한 권세는 사망 권세이다.

이 강력한 사망권세를 이기기 위해 성자 하나님은 더 강력한 힘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가장 약함으로 강함을 이기신 것이다.


신약시대는 구약시대와는 다른 패러다임을 만들어낸다.

전능자 대신에 숨은 신으로, 약함이 강함보다 더 강력한 것으로 등극한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전능자 되기를 소망해서는 안 되며, 약함을 가지고 겸손의 모드로 섬겨야 한다.

파르메니데스의 명제처럼, 있는 것(전능자 하나님)은 여전히 있지만, 없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없지 않다.

왜냐하면 죽은 것이 죽은 것이 아니고, 성자의 죽음은 부활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의 명제에서는 진리가 될 수 없는, 없음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구제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의 현상을 구제해야 하는 것이다.


현대 시대에 하나님의 임재 (1)


가끔 선교사들 중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산업화되지 못한 저개발국가나 아직도 원시사회를 지향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구약의 방식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선교지에서는 선교사로 하여금 온갖 기사와 이적을 행하게 하신다.


어느 중국 선교사의 이야기다

탈북 청소년을 돌보고 있던 선교사의 집에 중국 공안이 이들을 붙잡기 위해 들이닥쳤다.

선교사는 급한 김에 4개의 방 중 현관 입구에 있는 방에 탈북 청소년들을 몰아넣었다.

그리고 선교사는 얘들이 들키지 않기를 기도한다.


"하나님, 저들의 눈을 멀게 하여 주시옵소서"


공안들이 온 집안을 다 뒤지는데 희한하게도 현관 입구에 있는 방을 마치 없는 방처럼 여기고 뒤지지 못한 채 그냥 지나치더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고비가 있었다.

그때는 탈북 청소년들이 앞이 트인 집마당에서 공놀이를 하며 놀고 있었다.

그때 공안들이 들이닥쳤다.

선교사는 아이들을 숨길 여유도 없이, 그냥 "얘들아 튀어!!"라고 말하는 동안 공안은 뒤쫓아 가기를 10미터 간격만을 앞에 남겨두고 있었다.

이때 역시 선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하나님! 저들이 아이들을 따라잡지 못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때 하늘에서 검은 안개 한 덩어리가 공안을 덮쳤다.

아이들은 안전하게 도망가는 동안, 공안은 안개 때문에 오리무중에 오합지졸이 되어 버렸다.

그 사이에 탈북 청소년들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이 선교사는 다행히도 한국에 들어오면 하나님이 중국에서 역사하는 방식과 한국에서 임재하시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선교사는 인도네시아에 파송되어 기도 중에 아무런 쓸모없는 습지대를 인수하라는 응답을 받았고, 그 습지대를 관광호텔을 세워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여러 가지 기적들을 간증하였다.

그리고 겨우 개척교회를 감당하는 나약한 목회자들을 '믿음의 부족'으로 질타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의 부족으로 아직도 개척교회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선교사 자신의 믿음을 특별하게 구별하셔서 자신이 하는 일마다, 손을 대는 사업마다 복을 주신다고 다른 목회자들과 자신을 차별화시켰다.

그 간증을 듣고 있던 몇몇 목회자는 회개기도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그런 간증을 전하는 선교사나 그 간증을 듣고 회개하는 목회자가 모두 전능자 하나님이 자신의 사역에 임재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들은 현대에 살면서 구약의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신약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방식이다.

그들이 전능자 하나님을 찾고자 함이 '여호와의 증인'이 신약에서 사라진 구약의 여호와에 대한 증인이 되고자 하는 노력과 다를 바가 없다.

전능자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결국 자신이 전능하여 높아지고자 하고, 다른 사역자들과 차별화함으로써 자신만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에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어떤 모양으로 임재하시는가?

다음 편의 글로 미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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