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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임재방식(2):현대인들에게 임재하는 방식

성령의 두 가지 사역

구약의 전쟁을 치르는 오늘날 이스라엘


이스라엘 민족은 여전히 모세시대의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있다.

그들은 성자 하나님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하나님은 여전히 전능자 하나님, 여호와다.

오늘날 유대교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계시하신 하나님만 믿을 뿐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성자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는다.

그들은 유일신 하나님의 모습대로, 분노하시는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만을 하나님의 표상으로 여긴다.

그들은 주변국가에 대해 용서나 관용이나 자비를 베푸는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오로지 구약의 전쟁, 여호와의 전쟁을 치를 뿐이다.


현대 이스라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절대적 동일성(I am)이다.

3000년 전의 이스라엘이나 지금의 이스라엘이나 동일하다는 것이다.

동일성은 곧 정체성이다.

구약의 하나님, 여호와는 I am who I am.이다.

I am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늘 주어와 보어가 늘 동일한 동일하신 하나님이 곧 구약 하나님의 정체성이다.

정체성이 확립된 후에는 I am으로만 머물 것이 아니라, I am A로 자아를 확장해 가야 한다.

즉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달라지는 모습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성자 하나님도 I am만을 고집하지 않고, I am A.로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I am the way, the truth, the life.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참람하다 하여 고발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구약의 유대인, 신약의 유대인, 현대의 유대인은 모두 전능자 하나님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생명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사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사는 삶은 죽느냐 사느냐, 즉 있느냐(존재) 없느냐(죽음)이다.


전능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서는 여전히 전능자다.

6일 전쟁 중 이스라엘은 중동의 이스마엘 후손과 싸우면서 구약적 방식으로 전쟁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여러 번 목격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어느 병사는 혼자 사막에서 헤매는 중 적의 대군을 만났는데, 갑자기 수천 명 되는 적군이 무기를 해제하고 손을 들고 한 명의 이스라엘 병사 앞에 항복하는 일 발생했다.

이 병사는 수천 명의 아랍군을 포로로 잡아 본대에 인계했는데, 본대에서도 이해할 수 없어 아랍군의 대장에게 물었다.

그 대장의 말이


"우리는 이스라엘이라는 적병과 싸울 준비는 되어 있지만, 천사들과 싸울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고 답변했다.

그 병사 뒤에는 수천 명의 천사들이 이들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인의 I am A.


파르메니데스의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는 유명한 명제는 존재와 진리의 본질에 관한 심오한 함의를 담고 있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반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 즉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은 진리나 사유의 대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


고양이의 예를 생각해 보자.

마음속에 존재하는 고양이, 즉 상상 속의 변하지 않는 존재는 사유의 대상으로서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보는 고양이는 다양한 상황과 변형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태이다.

따라서 갑돌이가 키우는 고양이는 진리의 대상이 아닌 것의 영역에 속하며 진리의 대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


이 원칙을 더 넓은 맥락에 적용하면 파르메니데스의 진술은 예수나 소피스트와 같은 인물의 존재를 이해하는 데 시사점이 있다.

유대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조롱당하고 저주받아 죽은 예수의 경우, 파르메니데스는 그의 무상함과 끊임없는 변화로 인해 그를 '아무것도 아닌 비존재' '없음의 비존재'로 분류했을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진리의 대상으로 간주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플라톤 시대에 소피스트들은 절대적인 진리가 없고 불변하는 실체와 단절된 개인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소피스트들은 절대적인 진리는 없었지만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세상을 지배하는 사회 현상에 관심을 기울였다.

플라톤은 인식론에서 소피스트들의 존재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소피스트들을 완전히 배제하면 대중의 기만, 사회 및 경제의 붕괴, 진리의 토대가 약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을 '있다'라는 동사의 '있다'와 '없다'의 이분법 사이에 위치시켜 인식의 영역에 포함시켰다.

'있다'와 '아니다'의 이러한 구분은 플라톤이 절대적 진리가 없더라도 상대적 진리의 틀 안에서 그들의 존재를 인식했음을 반영한다.


이 개념을 더 깊이 탐구한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를 진정한 원본은 없고 원본을 가장한 수많은 복제본이 난무하는 시뮬라크르의 시대라고 불렀다.

사본에 변형이 가미되더라도 원본은 단 하나만 남게 된다.

그러나 문화, 예술, 경제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이러한 복제품이 확산되면서 사람들의 삶은 무궁무진하게 풍요로워졌다.

비존재로서의 소피스트의 부재는 인간 경험의 다양성과 다원성에 기여함으로써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


말하자면, 한때 진리를 고민하는 철학자, 신학자만 살아있는 삭막한 세계가 음악가, 미술가, 체육가, 과학자, 경영학자, 경제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들어와 다양한 학문과 가치가 서로 상통하며 시너지를 내는 확대 사회가 된 것이다.


플라톤은 Be 동사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소피스트의 비존재를 집어넣어 <~이다>의 형식에 맞춰 집어넣었다.

소피스트들은 플라톤 입장에서 보면 절대적 진리가 없는 비존재에 불과하지만, 세상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사회적 현상에 주목하였다.


진위를 알기 어려운 시뮬라크라의 시대에 현대인들은 단 하나뿐인 빈곤한 원본을 위해 복제품이 제공하는 풍요로움을 포기할 것 같지 않다.

소피스트와 같은 비존재는 인간의 노력에 활력을 불어넣고 발전시켜 사회의 성장과 진보를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있는 것'과 '없는 것'에 관한 파르메니데스의 선언은 흥미롭고 복잡한 철학적 질문을 제기한다.

존재의 본질과 진리, 그리고 절대적 존재의 영역 너머에 있는 실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우리를 도전한다.

플라톤은 Be 동사의 <있음>에서 <이다>를 분화시키면서 소피스트들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았다.


현대 시대의 전능자

파르메니데스의 절대적 동일성(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은 모세의 유일신의 이름과도 같다.


I am who I am.


주어와 보어가 정확히 같음으로써 절대적 동일성임을 증명한다.

전능자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다.


모세(유일신개념)가 파르메니데스라면, 플라톤은 차축시대의 이사야(2위 하나님을 예언)와도 같다.

4차 혁명시대를 앞두고 있는 현대인은 하나같이 전능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같은 인공지능시대, 제4차 혁명 시대, 메타버스의 도래를 기다리는 시대에 무슨 신을 믿는가?"


신은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존재하지만, 인류의 문명이 꽃피면 사라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신은 불안한 시대 인간의 필요에 따라 있고 없고 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능력이 다방면으로 갖춰져 가고 사람들 간의 공유와 사회적 연대 및 결속력이 견고해지면서, 사람은 스스로 전능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1950~60년대의 보리고개를 넘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생존을 위해 울부짖었다.

70~80년대에 개발도상국으로 진입하게 되면서, 성도들의 기도 응답과 국가 경제발전은 궤를 같이 했다.

새벽기도, 철야예배, 부흥회를 부지런히 참석하면서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 개인적인 어려움들에 대해 응답받았고, 그들의 신앙은 국가의 경제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이때는 정말이지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생존을 위해 부르짖었다.

전능자 하나님이 아니면 생존이 불가능했다.


2000년이 넘어오면서, 특히 2020년대가 되면서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 더 이상 전능자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하늘을 바라보며 전능자의 임재를 구하지 않는다.

내가 전능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다.


<있다>와 <이다>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던 현대인은, 골고다에서 죽으신 하나님을 묵상하지 않는다.

과학적 지식만 갖추면 내가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 없이, 내가 직접해 낼 수 있으면 그것을 끝이다.

세상에는 전능자가 너무 많아서 여기서 이겨내기 위해서는 낮아짐은 지난 시대의 철 지난 가치관이 되었다.

I am의 전능자 하나님은, 알고 보니 내 안에도 I am이 있음을 발견한다.

이제 내가 전능자가 되면 된다.


성령의 두 가지 사역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태 5:3)


심령이 가난해지기 위해 재산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갈 필요까지는 없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허무한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이 필요 없어져 나 스스로 전능자가 되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내 통장에 100억 원의 현금이 저축되어 있어도, 내가 한 끼 밥상 앞에서


"일용할 양식은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는 자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내가 이 땅에서 내 삶에 넘치는 것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으로 내가 나를 자랑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주 예수를 앙망하는" 고백을 하는 겸손이 바로 심령이 가난함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나의 구주시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이런 고백이 있으면, 그다음에는 성령 하나님의 인침과 약속을 보증하시는 사역이 이어진다.

이때 대부분의 성도는 성령을 뜨겁게 만난다.


이렇게 성령을 뜨겁게 만나면서 은사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그 순간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양적으로 한 번에 받은 것이다.

대부분의 성도는 이 뜨거운 성령 체험을 리바이벌하기를 원한다.

성령의 뜨거운 은혜는 리바이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 뜨거움이 차가움으로 전환이 일어날 것을 예고한다.

이 은혜를 내 삶의 성숙으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성령의 양적인 은혜를 질적으로 바꿔야 한다.


성령의 뜨거운 양적 은혜를 질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성령의 두 번째 사역이 내 안에서 일어나기를 소망해야 한다.

성령의 뜨거운 역사는 성신의 물같이 차가운 역사로 전환되어야 한다.

성령은 뜨거운 감정으로만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이 내 안에서 인격화되기 위해 성신의 차가운 역사, 즉 이성적이고 합리적 판단력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성령의 뜨거운 역사는 오순절 때 처음 나타난 것이지만, 성신의 차가운 역사는 태초부터 있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성신의 차가운 이성과 판단력은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창 1:4),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 물을 나누시며(창 1:6), 땅과 바다를 나누셨다(창 1:10)

뿐만 아니라 성신의 차가운 역사는 궁창에 광명체들을 만드시고. 각종 가축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시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모든 생물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다.

성령은 흙으로 만든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 생령이 되고, 성령의 입김은 우리의 호흡이 되었다.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면적 의미로는 나를 창조하신 과정이기도 하다.

창조 과정에서 하나님의 영은 끊임없이 나누고 분화시켰다.


내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영은 나의 인격을 통해 끊임없이 분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현대를 사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임재 방식이다.

인격으로 분화하고, 관계적으로 분화하고, 삶으로 분화하여, 하나의 덩어리로 살고자 하는 전능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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