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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3) : 현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

거룩함에서 세속화로


존재와 비존재


파르메니데스가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고 명제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상태를 보여준다.

셰익스피어는 이 명제를 햄릿의 고백으로 바꿨다.


"죽느냐 사는 이것이 문제로다"


번역이 잘못되었다.

"To be or not to be, this is the question."


파르메니데스 관점에서는, be와 not은 함께 쓸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be)와 <비존재>(not)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에게


"There is no book on the desk."


라는 문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is와 not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햄릿의 고백이 가능한 것은 역시 플라톤의 <~이다>가 도입된 결과 덕분이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천국은 저 하늘에 있고, 지옥은 아예 없는 것이지만, 플라톤 덕분에 천국과 지옥이 우리 삶 속에 들어왔다.

알고 보니 소피스트들이 이 세상을 천국과 지옥으로 만들어 놨던 것이다.

사실은 저 하늘에 있는 천국과 알 수 없는 곳에 있는 지옥을 이 땅에 가져온 자는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결국 파르메니데스를 친부 살해한 플라톤이 자신의 제자에게 자신이 한 모양 그대로 당하고 만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스승이 저 하늘에 있다고 했던 이데아를 이 땅에 가져왔다.

어떤 사물이 있으면, 그 사물이 있기 위해서는 저 하늘의 이데아 덕분이라고 주창했던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사물마다 자체 안에 이데아를 다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저 하늘에 있는 천국과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지옥을 이 땅에 다 가지고 내려왔다.

말하자면 신적 거룩함이 세속화되어 버린 것이다.


거룩함에서 세속화


칼융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영과 적 그리스도의 영이 공존한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영과 적 그리스도의 영의 구조 또한 파르메니데스의 구조, 즉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의 명제에서 못 벗어난다.

결국 우리 안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이다.

선과 악의 공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악을 제거하려는 것이 유대인들의 전능자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상이다.

그래서 유대교 근본주의 이슬람 근본주의는 무섭다.

선과 악을 분명하게 갈라놓고 있는데, 각자는 선이고 상대방은 악이라는 규정이 그들의 싸움을 잔인하게 만든다.

이런 구조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집증과 분열증 상태에 머물게 만든다.

편집증과 분열증조차 거부하면 그 사람은 자폐증자가 되는 것이다.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멜라니 클라인에 의하면, 유아는 첫 6개월 동안은 편집-분열적 자리에 머물고 6개월 후부터는 우울적 자리에 머문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여섯 부족을 쫓아내기 위해 치르는 여호와의 전쟁은 편집-분열적 자리에서만 나올 수 있는 잔인함이 있다.

이것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치르는 전쟁의 전형이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의 유일신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구약의 잔인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다.

그들이 포기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이다.

그 거룩함은 세속화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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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증자는 자신의 몸과 정신의 신성함을 포기하지 못한 것이다.

자폐증자의 신성함은 세속화되지 못한 결과이다.

자폐증자는 온몸을 상징화하여 신적 상징화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폐증자는 일반적으로 병에 걸리지 않는다.

병은 세속화된 몸에 침투하여 발생하는 것이지 거룩하게 상징화된 자폐증자의 몸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다.


내가 아는 자폐증자는 오랜 기간 나의 주변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고등학생이 되면서 코로나에도 걸리고 캠프에 들어갔을 때는 엉덩이에 큰 염증이 생겨났다.

이것은 그 아이가 자폐증이라는 완벽하게 짜인 신성함의 상징성을 포기하고 세속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자폐증자를 건드릴 자가 없듯이 오늘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드릴 수 있는 나라가 없다.

이스라엘은 내부적인 거룩함과 외부의 어떤 원리로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상징적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 작은 나라는 거대한 나라 미국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거룩한 나라가 되었다.

성부 하나님의 거룩함과 신성함 그리고 전능함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들은 절대 세속화될 수 없다.

이슬람 근본주의나 유대교 근본주의는 세상의 각 나라에 있는 다양한 종교, 다양한 문화, 다양한 관점들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키는 데 헌신할 뿐이다.


서구 근대사회의 다양성


서구의 중세시대는 교황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사유의 중심에 있었다.

하나님을 부정하면 그는 사회적으로 추방되거나 매장당한다.

하나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조차도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 바로 중세사회였다.

대중은 성경을 그대로 믿어야 했고, 지도자는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대로 통치하여야 했다.

여기서 어긋나면 교황청의 종교재판이 기다리고 있다.

그 결과 백성들은 갈수록 바보가 되어 갔을 것이다.

성직자 외에는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황청,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사유하고, 판단하고, 느껴야만 했다.

중세인들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자연은 하나님의 숨결이 흐르는 곳이고, 세상은 하나님이 세우신 교황과 교회 지도자가 다스리는 곳임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오직 하나님 만이 진리였고, 그 진리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곳은 바로 교황청이었다.

과학, 철학, 문화, 예술, 문학 등도 이 원리에서 벗어나면 언제든지 종교재판에 회부될 수 있다.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 갈릴레오에 대한 종교 재판이 대표적인 예이다.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옹호하여 태양계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임을 믿었다.

그것은 당시의 진리 체계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지동설의 포기를 명령받았으나 <황금 측량자>를 저술하여 지동설을 고집하였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생애를 교황청의 명령에 따라 가택에서 구류되어 보내야만 했다.


그렇지만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누가 봐도 당연하게 여겨 왔던 것을 과학법칙으로 만들어낸 것으로 어느 누구도 시비를 걸 수는 없었다.

종교는 과학에 밀려나기 시작하면서, 교육, 문화, 예술, 경제, 문학에 의해서도 배제되면서 여러 선택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이로써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여러 다양성 속에서 자신의 참된 신앙을 찾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유대교 근본주의, 이슬람 근본주의는 오로지 신만 바라보는 관점 외에는 다른 다양성이 배제 되었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에 유교를 국시로 삼으면서 불교를 몰아내었지만 산으로 쫓아내는 정도에 그쳤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두개의 종교가 중첩된 상태에 머물면서 신앙의 모양도 중첩되는 경우가 많았다.

구한말에는 유불선을 통합한 천도교가 종교의 주류 중 하나가 되면서 백성들은 다양한 관점을 가지게 되었고 그만큼 선택의 여지가 많아지게 되었다.

3.1 운동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은 주로 여러 종교의 종교인들이었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이처럼 이미 우리나라는 다양한 관점에서 자기 신앙을 지킬 수 있는


과학에 밀린 하나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래샴의 법칙은 하나님과 과학사이에도 적용된다.

중세시대에만 해도 하나님의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가치 및 척도였다.

그것은 사회적 판단과 도덕적 틀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어떤 상황이나 사실적 판단에서 하나님이나 성경의 어느 구절을 언급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며 도덕적 권위를 가질 수 있었다.


과학 지식의 출현과 발달로 인해 하나님의 탁월함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보편적 가치를 보증하는 하나님이 변방으로 밀리고 과학적 지식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은 우리의 물리적 세계를 지배하는 힘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제공했다.

그러한 과학 법칙의 성공과 실제 적용은 결국 과학 지식을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위치로 끌어올렸다.

결과적으로 이전에 보편적 가치를 갖고 있던 하나님은 특정 지적 논의에서 주변부로 밀려났다


이처럼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과학 법칙이 널리 인정되고 수용된다.

과학적 탐구를 통해 축적된 지식과 기술의 발전은 우리 삶에 혁명을 가져왔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맹목적으로 하나님과 종교적 신념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회의주의, 무시, 심지어 광신주의라는 비난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다.


즉, 인식된 과학적 지식의 우월성이 종교적 신념과 가치를 가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과학적 원리는 경험적 기초와 관찰 가능한 증거로 인해 신뢰할 수 있고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한편, 종교적 가르침은 가시적인 증거보다는 신앙에 기초한 주관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과 페미니즘이 들어오면서 더 이상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옳다고 여기지 않게 되었다.


2000년 이전에는 누군가 영문과나 독문과를 다닌다면 마땅히 배워야 하는 필수 고전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4대비극, 밀턴의 실낙원, 괴테의 파우스느 등이 필수 과목으로 지정되었지만, 요즘은 그런 고전을 사라졌다고 한다.

더 이상 보편적 가치를 중시하지 않으며, 그동안 합리적이라 여겼던 것조차 과거 무지했던 시대의 편견 정도로 여긴다.

요즘 진리로 여기는 것은, "피해자의 고통스러운 호소"이다.

모두 pc(political correction)의 영향이다.


정치적 올바름(PC)의 영향은 이러한 현상을 더욱 악화시킨다.

PC는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판단이 훼손되고, 가치체계가 파편화될 위험이 있다.


더 나쁜 것(피해자라는 주관적인 호소)이 더 나은 것(이성과 도덕적 판단의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을 만드는 그레샴의 법칙을 적용하는 것은 합리성의 침식뿐만 아니라 신과 과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사회적 변화를 반영한다.

그리고 보편적 가치. 과학적 지식은 의심할 여지없이 가치가 있지만, 이성과 종교적 신념의 중요성을 인식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보다 전체적인 이해가 보장된다.


이 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


과학과 종교를 갈라놓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무지개는 비 온 후에 공중에 있는 물방울에 빛이 굴절되어 우리에게 비치는 빛의 조화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똑같은 무지개를 보면서, 하나님이 노아에게 준 무지개 언약을 묵상한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하나님 존재의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믿음의 색채가 분명해진다.


4차 혁명, 인공지능, 메타버스가 현실화됨으로써 하나님이 필요 없어지며, 스스로 시대적 전능자가 되어 하나님을 자처하는 시대가 와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그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는 법이다.

만일 지금 이 시대에 출애굽을 한다면,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기보다는 지나가는 여객선을 동원해서 백성들을 구원할 것이다.

과학 문명과 기술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스스로 전능자가 되고자 하지만,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은 모든 문명과 기술로 채운 주변환경이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고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도구들이라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믿음의 사람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영적 민감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생명공학의 발달로 사람의 수명이 200년이 되고 300년이 되어 마치 삶과 죽음이 내 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여도,

호흡은 나의 코끝에 있으나 생명은 아버지 하나님께 달려 있음


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는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오히려 구원받는 자와 구원받지 못하는 자가 구원의 이슈에 있어 자기 원인을 분명하게 가지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 같다.


계모가 신데렐라에게 왕자가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재를 뿌린 중에 있는 산 콩과 죽은 콩을 가려내게 하듯, 현대인들은 과학기술혁명이라는 재 속에서 산 콩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산 영을 죽은 영으로부터 가려내는 데에 있다.


인공지능으로 전능자가 되겠다는 발상 자체가 잘 못 되었다.

인공지능의 목표는 인간이 되는 것이지만, 인간의 목표는 신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도 자기 백성을 신으로 만드는 데에 있다.

하지만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자들은 인공지능으로 신이 되겠다고 목표를 삼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시대는 성도가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을 추구하는 차원을 넘어 성신의 차가운 능력으로 인격화되어 가기를 소망하는 백성이 많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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