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검
앞의 글에서 나는 유일신 하나님만 믿는 유대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유대인들은 성자 하나님을 거부한 결과 성부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만 믿는다.
십자가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 중에도 그의 믿음의 모양이 유일신을 믿는 전능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여러 글에서 언급하였다.
그런 믿음이 과연 헛된 믿음이냐를 살펴보면,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과 삶의 정황들을 살펴보면 반드시 그렇게 헛되지도 않다.
6일 전쟁은 이스라엘군이 수많은 기적의 연속으로 손쉽게 이집트를 이길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 (이하,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opendoor21&logNo=221779411163에서 인용)
몇 명 이스라엘 병사가 수천 명의 이집트 군대에 포위되었을 때 이스라엘 병사들 뒤에 수천 명의 무장한 천사들이 이집트 군대를 위협하고 있어 이집트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몇 명의 이스라엘 병사들의 포로가 되었다는 이야기.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 군대는 공격한 적도 없는데, 이집트의 장갑차 1000대와 900대의 탱크가 후퇴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파악한 결과, 이집트 병영에 엄청난 폭발이 있었고, 이는 미국이 도무지 대적할 수 없는 가공할 만한 비밀 병기를 이스라엘에 제공한 결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그런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전투 비행단이 이집트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기 위해 지중해로 우회하여 이집트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은 미스터리라고 한다. 그때 이집트 공군 비해기 300대는 전투에 참가조차 못한 채 비행장에서 이스라엘 전투 비행단의 공격을 받아 전멸당하였다고 한다.
이스라엘에서 구약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그들이 구약의 유일신 하나님, 전능자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는 결과로 보인다.
우리 주변에도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만을 구하고 그런 사역으로 각종 기적과 은사를 베푸는 사역자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이런 기사와 이적이 따르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그 문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쉽게 파악된다.
홍해를 가르는 사건, 므리바 반석 사건, 만나 사건 등 일반적인 인간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온갖 기적들을 목격하였지만, 그들은 항상 불평과 불만뿐이었다.
말하자면, 유일신 사상에 입각한 신앙의 형태는 온갖 능력과 기적을 맛볼 수는 있어도, 그들의 믿음의 형태나 삶에는 성숙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역을 하는 사역자들의 자녀들 중에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자녀들이 많다는 사실도 기억하자.
이런 사역자를 가까이에서 보면, 인간적인 면이나 인격적인 면모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아빠)가 믿는 그런 하나님은 믿고 싶지 않아!"
다른 사람은 다 속일 수 있어도 자기 가족 만큼은 속일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는 2위 일체(성부-성자)의 하나님을 믿는 형태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결과 예수님의 말씀을 잘 실천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은 참으로 따뜻해 보인다.
이런 부류의 사람의 특징은 용서와 이해를 잘한다는 점이다.
어떤 여성은 자기애적인 남편을 맞아 결혼하자 남편이 요구하는 것에 다 맞춰 살았다.
그런 남편으로 인해 늘 억압받는 삶을 살았다.
억울하거나 이해가 안 되는 면이 있으면, 교회 골방을 찾아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하며 기도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다.
이런 고통을 안고 담임 목사님과 상담을 해 보았지만,
"예수 믿는 성도가 할 수 있는 일은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어요. 남편이 원수까지는 아니잖아요? 그러니 용서 못할 일이 뭐가 있어요?"
남편이 화가 잔뜩 나 있으면 말조차 걸 수 없어, 바로 교회로 가서 기도한다.
울부짖으며 기도한 결과,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것을 기대하고 집에 가서 남편의 표정이 어떻게 바뀌어 있는지를 본다.
남편의 기분이 좀 풀려 있는 듯하면, '아하! 역시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어!' 하며 기뻐한다.
이 남편은 아내든, 자녀든 자신의 일상을 방해하거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온 가족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이런 생활을 30년을 살아오면서 남편은 직장에서 은퇴를 하게 되었다.
국민연금으로 온 가족이 살려고 하니 턱없이 줄어든 자신의 주머니가 자신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가족들을 다 모아놓고, 남편은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폭탄을 터뜨렸다.
"당신, 아이들을 데리고 내 집에서 나가 줬으면 좋겠어."
얼토당토 않게 남편에게 배신당한 아내는 즉시 자녀를 데리고 집을 나왔고, 지금은 재산분할 소송 중에 있다.
아내는 그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친구와 동업하여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평소 좋은 관계에 있던 이 친구가 함께 사업을 하면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친구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을 동업한 지 6개월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이 친구 역시 남편이 자신에게 하듯이 억압하고 휘둘러 동업의 공평함과 균형을 깨뜨리고 자기 유익만 챙기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발견했다.
그 6개월 동안 이 여성이 해 온 것은, 그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어주고, 이해해 주고, 용서해 주는 일이었다.
자기 밖에 모르는 남편과 한번도 싸워 본 적이 없으니, 자기 밖에 모르는 친구가 나타나서 여러 모양으로 침범해 들어와서 방어할 줄을 모른다.
그 결과 매달 나오는 수익의 대부분을 동업 친구가 챙겨가고, 나는 빈털터리가 되는 결산을 하게 된다.
그것은 30년 동안 남편의 불합리한 요구, 비합리적인 행동에 대해 늘 이해해 주고, 용서해 준 결과, 동업 관계에서도 부당한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가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이 여성은 아버지가 부자이고, 남편은 백수다.
이 여성은 장애자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특별한 배려를 받으며 살았다.
결혼 당시에는 남편이 직장인이었지만, 장인어른이 부자라는 사실만 믿고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놀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당신 아버지한테 생활비 좀 받아와"
그렇게 받아 온 생활비가 2000년대 초반 매달 800만 원이었다.
어느 날 남편은 차가 낡았다고 아내에게 장인어른에게 가서 BMW 살 돈을 받아 오라 해서 6000만 원짜리 BMW를 샀다.
남편은 BMW를 몰고 나가 폼을 좀 잡으려는 데 젊은 아이들이 스포츠카를 타고 싱싱~ 달리는 것을 보고 너무 부러웠다.
아내는 "나 스포츠 카를 사야겠어"하는 남편의 한 마디에 아버지에게 달려가 2억 원의 돈을 받아 스포츠카를 사 줬다고 한다.
30년 넘게 부부로 사는 동안, 아내는 별의별 일을 다 겪었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여성은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이런 남편을 이해하고 나니까 세상에 이해 못 할 일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말씀을 얼마든지 실천할 수가 있어요."
위의 두 케이스를 놓고 볼 때, 그들은 2위 하나님을 받아들였지만, 복잡한 현실에서 갈등을 겪어내는 건강한 관계성을 중시하는 3위 하나님의 관계를 상실하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교회에서도 목사님들의 대부분 설교가 그리 삼위일체적이지 못하며, 대개 2위 일체적 설교에 그친다.
가정의 갈등, 부부갈등, 현실적 갈등의 문제를 가지고 신앙상담을 요청하면, 지성소에만 있어 현실감각이 없는 목사님들은 멘트를 거의 정해 놓고 있다.
원수사랑, 사랑하는 자가 복 받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소 실천하신 용서라는 이슈에 매몰되어 현실에서 치열하고도 복잡하게 이루어지는 관계성에 대해서는 무지하게 되었다.
복잡하고 치열한 현실 관계라는 것이 꼭 바깥세상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관계성의 훈련장으로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정이라는 장을 마련해 주셨다.
예수님은 두 눈을 부릅뜨고 적나라하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
"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태 10:34~36)
눈을 부릅뜨게 만드는 구절이지만, 목회자들은 이 구절을 설교범주에서 배제한다.
왜냐하면 평소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과는 너무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상반되는 것은 구약에도 나타난다.
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곧 그들 가운데에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사람이리로다 (미 7:4 b-6)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언 27ㅣ17)
구약에도,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에도 성령의 검의 사역이 있었던 것이다.
성령의 검은 서로의, 그리고 각자의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들이 위해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고, 어긋난 부분을 바로 잡으며, 굽은 곳으 펴는 일에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늘 삼위로 계시고, 삼위로 일하신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유일신에서 삼위하나님으로 되어가는 과정이 성경을 통해 보여주신다.
모세에게는 유일신으로, 2위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예언되었다가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신다.
예수의 승천으로 오순절에 성령 하나님이 120문도에 혀같은 불로 임함으로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삼위하나님이 되신다.
하나님을 유일신으로만 알면, 유대인들처럼 성자와 성령의 존재와 역사하심을 부인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2위 일체로만 알면, 세계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가족 관계 등을 알지 못한 채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용납하는 일에 앞장서느라 세상에 대한 면역력과 경쟁력을 잃어버린다.
오늘날 성도를 사회적 관계안에서, 가정적 관계 안에서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게 만든 것은 교회의 책임이다.
세상에 공격성 없는 사랑을 가지고 나가면 호구가 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시고, 서로 협력하시면서, 각자의 모순을 상호간에 극복해 가시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아울러 우리는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관계성으로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상황에 따라 하나님을 때로는 전능자 하나님으로, 때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으로, 때로는 현실 관계 안에서 칼을 들고 싸우는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뜨거운 성령의 역사로 만날 수도 있고, 차가운 분별력을 가진 성신의 검으로 만날 수도 있어야 한다.
성도의 삶의 목적은 성화에 있음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성숙한 신앙은 하나님의 다양한 사역을 만나지만, 어느 한 지점에 고착된 신앙은 하나님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 버린다.
내가 자유롭지 못하면, 하나님을 자유롭지 못하게 묶어 버리고,
내가 자유로우면 삼위일체적 하나님, 삼위 중 각각의 하나님을 상황에 맞게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