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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공식

선함을 부르는 결핍

이상한 공식 : 무 = 공허 = 결핍 = 악 = 관계적 선함



탐구자 :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라면 죄를 지을 수 없게 만든 상태여야 되는 것이 아닌가요? 신학자 :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렇게 곡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물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음으로 인하여 ‘좋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창조가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것을 강조하죠. 즉 하나님의 창조 안에는 결핍이 전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결핍의 신학적 개념은 곧 악입니다.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셨다고 해서 피조물 자체가 선하다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철학자 : 아마 탐구자는 스피노자 식으로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즉 신의 충만함이 넘쳐서 자연으로 창조되는 ‘능산적 자연’을 말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모든 피조물은 다 거룩한 신성을 지니고 있게 되어 범신론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신의 한 부분으로 여겨지면서 신의 신성함의 속성을 그대로 지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피조물은 그 자체 신성함은 없습니다.


분석가: 아담과 하와는 존재론적으로 커다란 결핍을 가지고 탄생했습니다. 가장 치명적인 결핍은 부모의 부재죠. 그래서 탄생하자마자 성인으로 살아야 했고, 탄생하자마자 하와와 결혼을 해야 했던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양육의 부재라는 큰 결함과 관계 경험의 부재중에 배우자까지 맞이해야 하는 상황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양육과정도 없고, 품어주는 어머니의 품도 없이 바로 성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타락을 예고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신학자 : 아담의 (부모의 부재로 인한) 존재론적 결핍이나 무로부터의 창조로 인한 결핍이 하나님의 창조의 선하심을 훼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인간적 조건으로 인해 하나님 말씀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을 요구하셨던 겁니다.

동물의 결핍은 인간보다 더 심합니다. 창세기 3장 1절에 “뱀은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더라”라고 기록된 것으로 볼 때, 들짐승들은 아담의 타락 전부터 간교하여 본성적으로 선함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그러나 결핍이 본성적 선함은 없어 본성적으로 악을 창출해 냅니다. 그 악은 관계적 선함을 만들어 낼 수는 있습니다. 그 악은 인격적 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핍 = 악 = 관계적 선함 창출 가능성>이라는 공식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결핍은 관계적 선함을 창출


탐구자 : 아니, 악이 관계적 선함을 창출한다는 것은 너무 심한 모순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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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 : 조금만 깊이 사유하면 모순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물질로 만들어진 피조물은 ‘결핍’이 기본적인 존재 조건입니다.

뱀이 ‘짐승들 중 가장 간교하였다’는 말씀은 다른 짐승들도 다 간교하였다는 것입니다. 간교함은 그만큼 악하다는 말입니다. 간교함의 정도가 다를 뿐, 모두 악을 보유하고 있는 짐승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짐승들은 각자의 본성에 맞게 악이 있어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질서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디 그게 짐승뿐이겠습니까? 아담이 스스로 자각한 결핍은 뭐였겠습니까? 다른 짐승들은 다 짝이 있는데 ‘나는 짝이 없다’는 것이었잖아요. 그 결핍은 바로 관계성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 짝을 이룸으로써 외로움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해도, 부모의 부재라는 ‘존재론적 허무’는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허무는 그야말로 ‘실존적 허무’입니다.

물질은 형상을 이루기 위해 결핍을 동반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물질이 꽉 차기를 소망하면 아무런 형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아담이 남성성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여성성의 결핍이 필수적이고, 유리가 잔이 되기 위해서는 가운데가 텅 비워진 결핍과 공허가 필요한 것입니다. 형상은 결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결핍은 다른 형상을 불러들이는 힘이 있기 마련이죠. 그래서 결핍은 관계적 선함을 창출하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피조물 창조에 대한 선언,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결핍들을 관계적 선함으로 바꾸어 내신 것입니다.


탐구자 : 여러 말씀 중 무엇보다 아담과 하와의 ‘존재론적 허무’에 관해 듣고 보니 유아에게 어머니의 품이 얼마나 소중한가 가 마음에 탁 와닿네요. 아기의 정신성의 영역을 풍성하게 채워 주기 위해 어머니는 따뜻한 품으로 안아 주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네요. 그렇게 안아줄 때 정신이 몸 구석구석, 세포마다 기관마다 채워짐으로써 육을 가진 영적 존재로서 상호 협응력을 갖추어 현실감 있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겠군요.


Spirit vs spirit


분석가 : 몸과 정신의 통전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위니캇이 말하는 절대적 의존기(생애 첫 1년)의 두 번째 과제인 ‘인격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신학자 : 태초의 인간에게 정신의 기능은 있었지만, 정신의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지식이 없어 영혼과 몸 사이에서 통합적 관계를 이룩하거나 응집력 있는 인격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늘 몸과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해 독일의 대문호 토마스 만(Thomas Mann)의 [요셉과 그 형제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신성으로 정신을 만들어 세상의 인간에게 보냈다'. 그리하여 몸이 되지 못하고 신체로만 있었던 아담이 그 정신으로 인해 몸이 될 수 있었다. 그 정신의 사명은 '영혼과 물질로 이루어진 형체의 세계인 지금의 세상에서, 정신이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분명하다. 자신을 망각한 채 형체와 죽음에 얽매여 있는 영혼에게 보다 고귀한 자신의 신분을 상기시키는 것'이라 한다. 하나님의 신성으로 보내진 대문자 정신(Spirit)은 우리의 소문자 정신(spirit)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철학자 : 전혀 다른 차원의 두 정신(Spirt vs spirit)이 우리 각자 안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철학에서는 이 둘을 연결시켜 주는 것이 바로 내 안에 있는데, 그것을 ‘자기(self)’라고 부릅니다. 또 이 '자기'는 몸과 정신의 통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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