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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는 구별된 존재

대상제공과 대상화 능력

나와 너는 구별된 존재: 대상제공과 대상화 능력

(I am => I am A)

대상으로 제공하기(providing)


탐구자 : 지금까지 앞에서 다룬 내용들은 어머니가 아기에게 자기 존재(공감적인 품)를 온전하게 내어 줌으로써 아기는 자신의 파편화된 상태의 몸을 하나의 몸으로 통합하고 그다음에는 몸과 정신을 통합하는 과정을 봐 온 셈이군요. 어머니는 아기에게 자신을 내어준다는 것이 아기의 인격형성에 매우 중요한 일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고요.


분석가 : 그렇죠. 아직 절대적 의존기에 있는 유아에게 이제 어머니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을 ‘대상으로 제공하는 것(providing)’입니다. 유아가 이 경험을 잘하게 되면 상대적 의존기(생애 1년 이후)로 넘어가서 ‘대상화’를 잘 시켜내게 됩니다.


탐구자 : 어머니가 자신을 내어 주면서 아기에게 ‘대상으로 제공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고, 또 ‘대상화’시킨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요?


분석가 : 본 장에서는 이 두 개념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가 되겠습니다. 유아기 초기에는 어머니와 유아는 하나로 융합된 존재라고 말씀드렸죠. 아기는 아직 행동과 감정을 일치시키는 지식을 만들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즉 유아는 아직 기억의 연속성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아기는 배고프면 어머니의 젖가슴을 본능적으로 빨아낼 뿐, 생각을 한다거나 감정을 느끼면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탐구자 : 아직 생리현상이 본능적으로, 또는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군요.


분석가 : 그렇죠. 이때는 꿈과 현실이 구별되지 않는 상태이자, ‘나와 너’, ‘나와 외부’ 와의 사이가 미분화된 상태입니다. 유아의 상태는 외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어머니만 있으면 되는 거죠. 미분화 상태에 있는 유아는 모방을 통해 모든 것을 배우게 됩니다. 차츰 한두 마디씩 말을 하기 시작하지만, 말 자체를 사물로 생각하는 때입니다.([박홍규] 제3권 245). 그렇게 되면 내 주관적인 것이 객관으로 오고 객관적인 것이 내 주관으로 오게 됩니다.(같은 책, 제3권, 246). 그래서 어릴 때일수록 외국어를 습득하기가 쉬워져서 마치 모국어처럼 배울 수가 있게 되죠.


탐구자 : 앞에서 거론된 자체성이 타자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동일성을 획득해 간다는 내용과 관련이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분석가 : 당연히 관련이 있죠. 여기서는 그 의미가 현실적으로 인격 발달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먼저 유아와 어머니가 융합을 이룰 때 처음에는 존재론적으로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아는 어머니의 존재가 자기 자신인 줄 알고 자신은 통합되지 않은 상태에 오랫동안 아무런 불안 없이, 그리고 거리낌 없이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이때 건강한 어머니는 유아가 어머니를 마치 자기처럼 여길 수 있도록 기꺼이 ‘대상으로 제공하기’를 수행해 냅니다. 이 ‘대상으로 제공하기’는 철학적 용어로 ‘타자성’에 해당됩니다.


철학자 : 이런 메커니즘을 가진 존재라면 파르메니데스처럼 일자(一者) 개념만 가지고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변화하는 현상을 대상화하다


탐구자 : 일자로만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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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 쉽게 말하자면, 전체 우주의 한 부분, 또는 조직의 한 부분으로만 존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작은 존재라 할지라도 자기 동일성을 가져야만 존재로서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법입니다. 파르메니데스가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는 명제를 가지고 ‘존재와 무’를 논하고자 할 때, 불변하는 실체(實體)만이 진리라고 봤습니다. 그리하여 철학의 긴 역사 속에서 변화하는 것, 생성하는 것, 심지어는 생명현상까지도 진리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관계성도 성립될 수 없고, 대상화될 수 있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플라톤 시대에 소피스트들이 설치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사기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들을 파르메니데스처럼 유령 취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진리에서 벗어난 존재들이지만 그들을 인식 밖에 둘 수가 없게 되어 그들을 대상화시켜야 할 필요가 생겨난 것입니다.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절대적 명제를 어겨가면서 불변하는 진리 밖에 있는 현상을 구제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살리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가 외면했던 현상을 대상화시킴으로써 현실 인식의 중요한 방편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외부 세계, 사람들, 변화무쌍한 각종 현상들을 객관화할 수 있게 되었고, 인식의 대상으로 대상화가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소피스트는 현실을 만들어낸다


탐구자 : 오늘날에도 보이스 피싱에 피해를 당하거나 다단계에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끝까지 당하고 나서야 겨우 현실감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이들이 바로 소피스트들 같은 존재가 아닌가요? 그런 사기에 빠져들거나 피해를 당하는 경우는 어떤 것인가요?


분석가 : 결국 그런 사람들이 당하는 것은 소피스트 같은 사람의 현란한 말에 넘어가는 것이거든요. 그들은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는 언어, 대상화시키는 언어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란한 말속에는 존재가 없음, 또는 실재가 없음을 자각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데,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은 이미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당할 것 다 당한 결과, 탈탈 다 털리고 난 후입니다. 탐구자가 언급한 보이스 피싱이 좋은 예가 되겠군요. 누군가가 집집마다 보이스 피싱으로 수천만 원 사기를 당하고, 사기를 치기 위해 납치 행각을 벌이고, 인질극이 일어나고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정작 정부당국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해 주지 않으면서 ‘이런 일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니 보이스 피싱 전화를 받지 말고 신경 끊으세요’하는 립 서비스(lip service, 말로만 하는 서비스)만 하는 겁니다.


진리와 현실감각


신학자 : 소피스트들이 일으키는 부작용은 신앙생활 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의 가정에서 물리적 또는 정신적 폭력, 침범, 상처받는 일등이 일어나고 있지만 정작 취할 수 있는 조치는 교회에 가서 기도 하는 것, 기도하면서 자기 억울함과 원한들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하나님한테 맡겨 버리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마는 겁니다. 그 결과 가정 내 갈등은 갈수록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주일이 되어서 예배를 가면 ‘원수를 사랑하라’ ‘남편에게 복종하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등의 설교를 듣게 됩니다. 그러면 한층 더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는데, 정작 집 안에서의 갈등이 깊어지는 것, 그래서 상처받는 일이 더 많아지고 더 깊은 상처를 받게 되는 것 등을 단순히 자신의 ‘믿음의 부족’으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어쩌다 담임 목회자에게 가정 문제로 상담이라도 청하게 되면 그것은 신앙상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목회자의 카리스마 있는 강력한 기도로 끝나 버립니다. 목사님의 기도와 설교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불순종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앙생활의 일반적인 현실입니다.

상담을 전공한 목회자를 청빙 하여 말씀목회와 상담목회를 병행하라고 권하면 ‘말씀’으로 다 되는데 무슨 상담이 필요하느냐는 식입니다. 그야말로 소피스트들이 들끓어서 온갖 사기행각이 다 벌어지고 있는데, 파르메니데스의 일자 사상에 의하면 ‘그건 진리가 될 수 없고, 가짜니까 신경 쓰지 말고 진리만 추구하면서 살라’는 충고만 듣고 끝나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오로지 하나님 세계만 진리가 있으니 세상은 다 가치 없고, 가짜로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매일 기도하느라 현실감각이 떨어지거나 가족관계를 다 놓쳐 버리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탐구자 : 어떤 아이는 어머니가 신앙생활하면서 은사를 받고 능력도 행하는 가운데 집에 있는 날보다 기도원에 있는 날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남편이 어떤 인생을 살건, 자녀가 공부를 어떻게 하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건 일절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 어머니는 이런 모든 일을 다 세속적인 일이라 여겨서 쳐다보지도 않고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서 살아가더라는 겁니다. 그런 어머니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자녀들은 그런 어머니를 보고서 평생 교회에는 발을 끊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입니다.


분석가 : 그 어머니는 진리만 찾느라고 현실을 대상화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라카니안 백상현은 이런 말을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가치를 판단하지 않고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예술이나 뉴욕의 예술을 비교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시장의 가격이 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판단을 포기하면 자본주의시장 권력이, 정치권력이 판단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탐구자 : 이 말을 들으니,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고흐, 고갱 같은 미술가들은 자신의 그림의 가치를 그림을 그리는 일 자체, 즉 예술적 가치, 창작의 가치에 두었어요. 그래서 그림을 그려 시장에 내어 놓으면 겨우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받고 팔았지요. 그런데 그림 장사군들이 나타나서 그 그림을 시장의 가치로 바꾸니까 몇십만 원 받고 팔았던 그림이 시장에서는 수십억 원 이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철학자 : 파르메니데스가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명제를 내세우면서, 그는 있는 것, 존재 진리만을 사유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다른 것은 모두 현상이요, 환상이니 판단의 대상으로 삼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는 사이에 시장 권력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들이 바로 소피스트들이다.

절대적 진리, 존재, 있음만 바라보던 철학자들의 시선 밖의 현실에서는 소피스트들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진리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 진리만을 바라볼 수 없는 일반 대중들은 존재라는 절대적 진리보다 소피스트들의 상대적 진리가 더 설득력을 가진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런데 소피스트들은 속이는 자요, 사기 치는 자요, 장광설로 설득하여 쉽게 돈을 뜯어가는 자들이었습니다.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자, 오직 '있음'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철학자는 세상에서는 이런 현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은 다 환상이요, 거짓된 현상일 뿐이니 인식의 대상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외면했습니다.

이때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의 유혹으로 타락해 가는 현실을 구제하기 위해, 파르메니데스의 절대적 동일성, 즉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절대적 진리를 무너뜨린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 맞지만, 없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의 라캉이 자신의 진리개념을 'ex nihilo'라고 했죠. 바로 무로부터 나오는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는 무다'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에게 진리는 '있음'(변치 않고 동일하게 있음)이지만, 무가 진리가 될 수는 없죠. 그러나 세상에는 진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피스트들이나 사이비 정치인들이 만들어내는 현상도 있습니다. 파르메니데스는 현상은 환상이니 없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플라톤은 현상은 있는 것(I am)은 아니지만, ~이다(I am A)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탐구자 : 오늘날 교회가 진리만 외치고 세계에 대한 판단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치가가 모든 판단을 대신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파르메니데스라면, 정치가는 소피스트들이죠. 오늘날에는 교회 대신 정치 권력자가 진리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철학자 : 그 책임은 우리 철학자들에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철학자들은 학문적 진리만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동안, 사이비 정치인들이 유사진리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온갖 유언비어, 괴담, 비양심적인 이야기,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진리를 만들어 내어 유포하면, 진리를 잃은 수많은 대중들이 추종하고 무조건적이 맹종 세력들이 그 유사진리를 목숨처럼 지킵니다. 소피스트들이 사기를 치고, 가짜 뉴스를 배포하고, 사실을 조작해서 양심의 가책을 가지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계속 외치기만 하면, 어느 순간 참 진리, 사실을 이겨 버리죠. 오늘날 정치인들이나 소크라테스 시대의 소피스트들이나 모두 시대를 초월한 현상인 것 같습니다. 바로 이때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플라톤이죠. 그는 절대적 진리와 보이스피싱 같이 사기 치는 현실 사이를 연결하는 철학자입니다. 그것이 바로 I am에서 I am A로 분화되는 것입니다. 개념이 좀 어렵지만 차차 풀어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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