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 동사에서 일어난 친부살해
탐구자 : 지금 이 주제를 보니, 처음 영어를 배울 때 중학생 시절이 생각나네요.
문장구조로 보면, 1 형식과 2 형식을 말하는 것이고요. be 동사의 두 가지 용법이 제시되는 두 문징.
이네요.
철학자 : 철학사로 보면, 인간의 의식의 분화를 나타내는 두 문장입니다. 우리나라의 언어는 be 동사의 두 가지 용법이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있다'와 '이다'. 그런데 다른 언어권에서는 be 동사가 그렇게 확연하게 구별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철학사의 큰 줄기를 만들어 낸 파르메니데스의 절대적 동일성 철학에서 비롯됩니다. 파르메니데스의 단편 2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탐구의 어떤 길들 만이 사유를 위해 있는지, 그중 하나는 있다(estin)라는, 그리고 있지 않을 수 없다
라는 길로 페이토(설득)의 길이며.... 이 있지 않는 것을 그대는 알게 될(gnosis) 수도 없을 것이고,
지적할 수도 없을 것이기에...
위의 기록을 단순화시키면 다음과 같습니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당시 파르메니데스의 진리관은 영원불변하는 존재(있으)에 대한 것입니다. 변화하는 것, 움직이는 것,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있는 것에 속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현상이 있고, 삶의 현실이 있다는 것이지요.
소피스트들은 바로 '있음'과 '없음' 사이에 있는 현실세계에서 사기를 치고 속임수를 부려 수많은 사람들이 사기를 당하고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한 사람을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이 없습니다. 법전에는 '있는 것''불변하는 것'만 진리이니 소송을 받아주니 없는 것에 대해서 속아 넘어간 것은 네 잘못이다. 그러니 그건 소송거리도 안 되는 것입니다.
탐구자 : 그렇게 말씀하시니 1970년대 산업화 이전 시대가 생각이 납니다. 그때는 무엇보다 생존이 중요했습니다. 적은 월급을 가지고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지출을 해야 했고(없어지는 것 => 없는 것), 그나마 돈을 아끼고 아껴 저축이라도 하면 그것은 남는 것(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있는 것은 통장에 저축된 것이고, 없는 것은 최소한을 생활을 위해 소비해야 하는 돈인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사회가 1970년대부터 산업화가 되면서 과거보다 어느 정도 풍족해진 사람들의 주머니는 저축과 소비 사이의 삶의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 문화적인 공간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저축과 소비라는 생존을 목표로 하는 삶에서 벗어나 잉여 자산이 늘어나자 문화적인 욕구가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기업은 이윤을 늘리기 위해 생산물 공급이 늘였고, 이 상품이 잘 필리게 하기 위해 광고라는 것을 하게 되었죠. 사람들은 그 광고의 유혹에 이기지 못해 새로운 상품을 사게 되면서 점점 문화적으로 윤택한 삶을 살게 된 것이죠. 사회적 부, 개인의 부가 늘어나면서 그런 문화적 공간이 어느 정도 충족되자 요즘에는 사람들이 보이스피싱이라는 유혹에 많이 넘어가는 것 같아요. 이렇게 보면, 삶의 질이라는 것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있는 공간이 얼마나 풍성한가 빈약한가의 문제가 되겠네요.
철학자 : 그렇습니다. 파르메니데스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플라톤이 발견한 것은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피스트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광고주들이고, 사기꾼, 상품 판매자들,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이 바로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 존재합니다.
파르메니데스에게는 I am만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I am a boy. 를 파르메니데스 식으로 해석하면, '나는 소년으로 있다'가 됩니다. 이렇게 밖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의 사기행각으로 당하는 대중들을 구제하기 위해 불변하는 존재 외에 현실에서 드러나는 '현상'을 구제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에게는 I am. 만 있는 것이라면, 플라톤은 I am A(나는 A이다). 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사람은 있음, 또는 생존만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문화공간을 통해 자신이 성장하고 성숙, 발달해 갈 수 있는 존재임일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A의 자리에는 B, C, D 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떤 것도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의 존재가능성이 무한하게 확대된 것이죠.
플라톤은 자신이 발견한 이러한 문장의 분화를 '친부 살해'라고는 과격한 용어로 표현합니다.
신학자 : 인간 역사 중 사상사적으로 큰 변천을 볼 수 있는 것이, I am에서 I am A.로 확장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성경 안에서 가장 크게 부각되는 주제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I am who I am>입니다. 하나님이름 자체는 문장의 1 형식과 2 형식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존재 상태를 보여주고 있죠.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은 동어반복입니다. A=A보다 더 큰 진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에 뭘 더하거나 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그렇죠. 하나님은 영원불변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외부에서 더할 것도 내부에서 뺄 것도 없는 완벽한 신입니다.
탐구자 : 그렇군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화(성육신)되면서 I am A가 되는 것인가요?
신학자 : 맞습니다. 하나님은 성육신 하면서 다른 이름을 얻게 되죠. 임마누엘, 예수라는 이름이 그것이죠. 예수 자신이 스스로를 규명할 때 I am A로 표현했습니다.
1. I am the bread of life.(요한 6:35) Ἐγώ εἰμι ὁ ἄρτος τῆς ζωῆς
2. I am the light of the worl.d(요한 8:12) Ἐγώ εἰμι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
3. I am the door.(요한 10:7) ἐγώ εἰμι ἡ θύρα τῶν προβάτων
4. I am the good shepherd..(요한 10:11) 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ὸς)
5.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요한 11:25)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
6. I am the way, the truthe, the life.(요한 14:6) Ἐγώ εἰμι ἡ ὁδὸς καὶ ἡ ἀλήθεια καὶ ἡ ζωή·
7. I and the vine.(요한 15:1) 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ἡ ἀληθινή,
이처럼 하나님이 <I am who I am.>에서 <I am A>로 자기 계시를 하신 것은, 사람을 위한 자기 비하입니다.
탐구자 : 그런데 정작 바리새인들, 율법사들은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에 대해 시비를 걸었었죠.
신학자 : 그 시비가 바로 Ἐγώ εἰμι(나는 있다)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기 때문에 '참람하다(신성모독이다)'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런 말을 한마디씩 할 때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죽여야 되겠다는 생각을 굳혀 갑니다.
철학자 : 그런 모함은 철학사에서도 일어납니다. 데카르트가 시대적 및 사상사적 전환점을 만드는 유명한 명제를 고안해 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I think therefore I am.> 이 명제에 대해 교황청에서 문제 삼은 것은 바로 <I am>이었습니다. 그 분노의 내용은 "네가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써? 참람하다"였습니다. 바리새인이나 교황청이나 똑같은 주제로 신성모독으로 몰아갔습니다. 데카르트 이전시대까지만 해도 먼저 I(나)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탐구자 : 그래서 데카르트는 종교재판을 받았나요?
철학자 : 그럴 뻔했죠. 데카르트는 영리한 사람이라 미리 빠져나갈 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제에 대해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제가 생각해 보니까, 신이 존재하더라고요."
데카르트는 이렇게 교묘하게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탐구자 : I am과 I am A 사이에는 인류사에서 엄청난 변곡점이 있었네요. 제가 보기에는 철학사에서는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의 명제를 분화함으로써 '친부 살해'를 감행했다면,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의 절대성과 전능성을 저격하는 '친부살해'를 단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학자 : 신학적인 친부살해는 성자께서 친히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아버지의 종교인 유대교를 살해하고 아들의 종교인 기독교를 탄생하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탐구자 : I am에서 I am A로 발전하는 것은 한 개인의 발달사에서도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의 첫 1년 동안의 과제가 바로 I am(나는 있다)를 획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폴 리쾨르는 동일성(sameness)이라고 하지요. 이 동일성은 일평생 유지되는 것이며, 결코 변할 수 없는 자기 정체성의 핵심입니다. 이 동일성은 유아기의 나, 아동기의 나, 청소년기의 나, 장년기의 나, 노년기의 나가 동일한 나라는 것을 확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I am은 약 3세까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확고하게 동일성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3년 이후에는 아이가 아버지와의 관계로 확장해 가면서, I am A.로 존재 확장과 존재 분화가 일어납니다. A라는 자리에는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보어들이 들어오게 되죠.
이 I am A를 폴 리쾨르는 자기성(selfhood)이라고 부릅니다.
이 두 가지(동일성과 자기성)는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을 이루는 두 요소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