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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화와 교육현실

대상화 하기

플라톤의 [국가]에서 대상화 개념과 오늘날 교육 현실


철학자 : 플라톤이 자신의 저서 [국가] 중 제1권에서 ‘정의로운 사람’의 주제를 다루면서 바로 그런 부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존경하는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등장시켜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세 사람과 논쟁을 합니다. 그중에 마지막 논쟁이 트리시마코스라는 소피스트와의 논쟁입니다. 트리시마코스는 ‘정의란, 강자의 편익이다’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논박하면서 ‘마술(馬術)을 가지고 있는 마부는 자기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가 가진 기술의 대상이 되는 말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말로 트리시마코스를 제압합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의사도 그가 의사인 한, 처방 속에 자기 자신의 이득을 생각하지 않고 병자의 이득을 생각하네. 왜냐하면 진정한 의사란 육체를 백성으로 간주하는 통치자이며, 단지 돈벌이를 일삼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네.”라고 말하면서 소피스트의 궤변을 뒤집어 버립니다. 그런데 트리시마코스는 그리 쉽게 물러 설 소피스트가 아니죠. 그는 소크라테스에게 아주 모독적인 말로 싸움을 걸죠. “당신에게 유모가 있소? … 당신에게 유모가 있다면 지금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것을 닦아 주었으면 하오. 그리고 당신은 그만큼 어리기 때문에 양과 목자의 구별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분석가 : 하하하. 트리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를 제가 아까 말씀드린 ‘주관과 객관’을 구별하지 못하는 유아기 사람으로 취급했군요. ‘양과 목자의 구별’을 못한다는 것은 운동과 운동체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이죠. 그때는 아기는 어머니와 자신을 구별하지 못하는 때이기도 하고요. 달리 말해 트리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는 ‘대상화’를 못 시키는 존재로 비하한 것이죠.


철학자 : 바로 그 말입니다. 그러면서 트리시마코스는 “소를 먹이는 목동이나 양을 치는 목자가 소나 양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할 뿐 소나 양들을 살찌게 하고 돌보는 목적이 주인이나 자기 자신의 이익과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라고 반박하죠.


탐구자 : 결국 누가 이기나요?


철학자 : 소크라테스의 논법의 초점은 상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주장을 무력화시키는 데에 있습니다. 유의할 점은 오늘날에도 트리시마코스의 주장이 현실에서는 더 큰 동기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 소크라테스의 논법을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의대를 가는 사람들 중에는 환자의 유익을 위해서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가는 사람보다는 다른 직업에 비해 돈을 크게 벌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는 사람이 많은 것이 현실이지요. 그래서 경쟁률이 높죠. 대상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술을 가진 사람 자신, 권위자 자신을 위해 기술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소크라테스 보다는 트리시마코스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고 있습니다.


분석가 : 상담실에서는 다양한 상황에 처한 내담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이 분석을 받으러 오는 이유가 대개는 부모님과의 관계가 초기부터 어그러져서 개선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지금에 와서야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부모님들이 자녀를 양육하면서 자녀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지 못하고 부모의 자아실현의 도구로, 또는 부모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자기애적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도구로 자녀를 사용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 프로그램인 PISA는 세계 각국의 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업성취도를 조사합니다. 그 프로그램에서 한국 학생들은 성적으로는 최상위권이지만, 공부에 대한 흥미도는 최하위권이라는 기이한 현상을 보여줍니다.. 왜 공부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한국 학생들의 대표적인 답변이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랍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부작용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청소년 4명 중 1명은 우울증을 앓고 있고,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에서 제일 높다(2014년 OECD ‘factbook’)는 점이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가 자기 존재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도록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가 부모님께 부귀영화를 바치겠다는 일념 때문이거든요. 그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도록 만들어 주지 못한 데서 비롯됩니다. 말하자면 부모들이 자녀를 대상화를 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자를 대상화하는 의사


탐구자 : 그런 일이 플라톤의 [국가]에서의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는 어떤 형태로 일어나게 되는지가 궁금해집니다.


철학자 : 어떤 사람이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칩시다. 이 환자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죽음에 관한 선고를 받게 됩니다. 물론 ‘얼마 후에 죽습니다’가 아니라 ‘앞으로 얼마를 더 살 수 있습니다’의 형태로 통보를 받죠. 이러한 진단에 의해 죽음을 앞당기는 환자가 많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환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환자는 그런 진단을 받고도 오히려 더 독하게 살아야 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면서 병원 치료에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날 길을 스스로 찾아 나서게 되죠. 그런데 어떤 환자는 이러한 진단과 더불어 갑자기 삶이 위축되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며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의사가 말하는 대로, 병원에서 이끄는 대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병을 낫게 하는 사람은 본인 자신이고, 의사는 이를 돕는 사람임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권위자에게만 자신을 맡기고 자기 자신에 대한 권위를 놓아 버리게 되면 주체로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는 겁니다. 훌륭한 의사는 환자를 예속화시키지 않고 대상화시키는 의사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의사는 소크라테스의 격언을 기억해야 합니다.


분석가 : 거기에는 의사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환자 스스로도 스스로를 대상화시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인이 자기 몸에 대한 주권과 자체적인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상황 또는 주변 사람들의 의도에 쉽게 휘둘리게 됩니다.



서로 대상화시키지 못한 어느 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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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자 : 그런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 같아요. 어떤 어머니와 딸의 갈등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어머니는 이제 사춘기를 지나가는 딸에 대해 온갖 트집을 다 잡아서 딸로 하여금 화나게 만들어 꼭 싸우는 상황으로 몰아간다는 겁니다. 그 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어머니는 자신의 남편에게 항상 불만이 많은데 남편에게 일일이 따지기는 부담스럽고 해서 만만한 딸과 싸우게 되는 거죠. 그 딸은 휘말리고 싶지 않지만 어머니가 갈등으로 몰아가는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더라는 겁니다. 또 이 어머니는 딸의 학교성적관리, 학원관리, 등하교 픽업까지 다 해주고 있어서 딸은 어머니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 못 되더라고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고 아버지의 기분에 따라서 딸이 어머니로부터 그대로 그 분위기를 전달받게 되니까 어머니와 딸 사이의 갈등관계는 늘 일상이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가 바로 어머니와 딸 사이에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지 못하고, 서로를 대상화시키지 못한 관계가 아닌가요?


분석가 : 맞습니다. 아마도 그 어머니는 딸에 대해 어머니 자신의 이상화 목표를 정해놓고 늘 거기에 도달하기를 바라고, 그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부분이 많았을 겁니다. 그런 어머니는 자신의 남편을 통해 그런 영광을 누렸어야 하는데, 남편에게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에 딸을 자신의 영광을 얻는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죠. 나중에 딸이 나이 30세쯤 되면 내가 그동안 어머니한테 얼마나 휘둘리며 살았는가를 깨닫게 되는데, 그때조차도 어머니로부터 독립한다는 것은 전향적인 방향전환이 있지 않은 한 쉽지 않습니다.


탐구자 : 그런 것 같아요. 그 딸이 대학진학 문제를 놓고 자신이 목표를 세우기도 전에 어머니가 먼저 세워놓고 맨 날 학원에 실어다 나르고 해서 딸이 어머니 목표에 이르도록 밀어붙였으니까요. 그런 사람은 어떻게 자신을 대상화시켜야 하나요? 대상화는 부모가 시켜 줘야 가능한 건가요?


분석가 : 건강한 어머니는 자녀의 존재를 존중하기 때문에 자녀를 예속화시키지 않고 대상화시키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여기고 실현해 냅니다. 이런 자녀는 공부든 친구관계든 미래를 꿈꾸는 일이든 스스로 자발성을 발휘하게 되죠. 그때그때 때에 맞게 부모로부터 분리 독립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건강하지 못한 부모의 슬하에서 대상화되지 못한 자녀가 부모에게 늘 휘둘리기 때문에 학교에 가서 자기보다 약한 아이들을 대상화시키지 못하고 휘두르게 됩니다. 학교에서 왕따는 그런 프로세스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어머니에게 늘 휘둘리면서 살아온 딸이 스스로 대상화 과제를 수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자기 스스로 부모로부터 대상화되기 위해서는 부모의 욕망을 차단하는 일입니다. 자녀 입장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부모의 욕망과 겹치지 않도록 부모에게는 낯선 영역에서 자신의 역량을 키워 나가는 것이죠.


자아를 대상화하지 못한 카프카


철학자 : 지금 분석가께서 하는 말은 굉장히 중요하다 여깁니다. 우리가 잘 아는 카프카의 경우를 보면, 그의 문학세계는 워낙 심오해서 문학평론가, 철학자, 심리학자, 법학자등 여러 분야의 대가들이 매우 깊이 있는 평가들을 다양하게 내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카프카가 쓴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읽고 그의 문학 세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한 것이 있습니다. 카프카의 문학은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한 결과, 아버지의 권위를 물려받지 못하여 어떻게 해서든 아버지를 만족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작품을 남긴 결과물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남들이 볼 때는 카프카가 위대한 작품을 남긴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카프카 자신은 자신의 작품이 고작 아버지의 조롱거리에 불과해 짐으로써 전문가들의 높은 평가와 칭찬과 찬사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카프카의 위대한(?) 불행입니다.


탐구자 : 아버지를 만족시키기 위해 작품을 썼는데 아버지의 칭찬을 받지 못했다손 치더라도, 쓰는 것마다 대작이라면 대단한 것 아닌가요?


철학자 : 아무리 남들이 탁월하다 칭찬해도 아버지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해서 자기만족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은 늘 불행하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특히 카프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변신]을 보면, 어느 직장인이 출근하기 싫어서 벌레로 변신해 보는 상상을 작품으로 옮긴 것이거든요. 부성 콤플렉스에 사로 잡혀 있는 카프카가 외부 세계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아버지가 카프카 자신에게 세계를 상징화시켜 주지 못한 결과, 외부 세계는 곳곳에 공포가 서려 있는 장소들입니다. 그래서 카프카에게 외부세계는 심리적으로 대상화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카프카는 외부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벌레로 변신을 해서라도 바깥 세계를 기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탐구자 : 아버지와 외부세계와의 관계가 상징화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좀 와닿지 않는군요.


분석가 : 오이디푸스 시기(만 3~6세 기간)의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시함으로써 외부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뒤에는 바깥 세계가 있고, 아버지는 바깥 세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 역할을 하게 되죠. 만일 아들이 아버지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채 세계에 나아가게 되면 광대무변하고 드넓은 바깥 세계에 의해 자신의 작은 존재는 압도되어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릴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으로 한 발자국도 나아가기가 쉽지 않죠.


탐구자 :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증상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바깥 세계에 대해 이런 공포감을 가지고 있겠군요.


철학자 : 카프카의 유명한 글 중에 [법 앞에서]라는 A4 용지 한쪽 정도 되는 작품은 철학자들, 법학자들이 복잡하게 분석해 냅니다. 그들의 분석과 평론은 모두 타당합니다. 그러나 각 분야의 평론가들의 분석과 평론과는 별도로, 카프카 개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작품들은 아버지의 법을 넘어서지 못한 아들의 지질함을 드러내는 작품에 불과합니다.


분석가 : 그렇습니다. 카프카는 아버지로부터 자신을 대상화시키지 못했고, 스스로를 대상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작품을 남겼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을 아버지로부터 대상화시키지는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그의 작품은 열린 세계로 대상화되어서 카프카의 내면적 세계와는 별개로 생명력을 얻어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카프카 자신의 자아는 대상화시키지 못했지만, 자신의 자기(Self)는 작품을 통해 대상화되었고, 자기는 작품을 대상화시켰다고 봅니다. 다만 카프카 자아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철학자탐구자 :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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