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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과 신체의 완충지대인 정신

정신 : 영혼과 신체의 완충지대


탐구자 : 정신이라는 단어의 한자도 신(神)이 들어가잖아요? 영어로 spirit인데, 정신도 내 안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나요?

분석가 : 맞습니다. 이 주제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주제라서 다음에 기회가 되면 더 자세히 다뤄야 되겠지만, 오늘은 개괄적으로만 이야기해 보죠. ‘나’라는 존재는 영과 육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 둘을 연결시켜 주는 것이 ‘정신’(spirit)입니다. 식물도 동물도 혼이 있어요. 식물 혼, 동물 혼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영이 없기 때문에 영혼이 없는 것입니다. 정신의 한자는 신(神)을 정(精)하게 만드는 것인데, 그 정(精) 자를 보면, 찧을 정, 묘할 정, 아름다울 정, 순일할 정, 밝을 정, 깨끗할 정, 정성스러울 정, 전일할 정, 익숙할 정, 날카로울 정, 정기 정, 마음 정, 신령 정, 정화할 정 등 많은 의미들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의미들을 내 정신성으로 깨우쳐 나가고 실천해 나갈 때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만들어 가는 것이죠.

영과 육체는 딱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영역을 매개로 완충지대를 충만하게 만들어서 영을 풍성하게, 육을 생생하게 만들어 내게 됩니다.

신학자 : 그 말씀을 하시니 생각나는 소설이 있습니다. 독일의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 이 쓴 [요셉과 그 형제들]이죠. 이 작품은 만이 16년에 걸쳐서 쓴 대작이에요. 이 책 제1권 초반부에 사람의 인격의 세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영혼이 있었다. 여기서 영혼이란 최초의 인간다운 존재를 말한다. 물질과 마찬가지로 처음에 도입된 원리 중의 하나였던 영혼은 생명은 가졌으나 지식은 소유하지 않았다. 아는 게 얼마나 없었으면, 평안과 행복이 지배하는 높은 세상, 그처럼 가까운 곳에서 신을 모시고 살던 세상을 마다하고, 아직 형체를 갖추지 않은 물질에 마음이 기울었을까? … 영혼은 물질과 몸을 섞어 형체를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나서 아래로 내려간 것이다. … 신은 자신의 신성으로 정신을 만들어 이 세상의 인간에게 보냈다. 정신은 인간의 육신을 안방 삼아 쿨쿨 잠만 자고 있는 영혼을 깨워 아버지의 명령을 상기시켜야 했다…. 영혼으로 하여금 이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 정신의 사명이다. … 영혼을 고향으로 데려오기 위해 파견된 ‘두 번째 사자’인 정신은, 여하튼 영혼과 아주 유사하다. 하지만 영혼 그 자체는 아니다. 그 이유는 정신이 영혼보다 젊기 때문이다. 영혼이 먼저이고, 정신은 나중에 생겼다는 뜻이다.”(6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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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자 : 토마스 만은 영과 육 그리고 정신의 상호 관계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은데 혹시 인간의 타락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닌가요?

신학자 : 맞습니다. 만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의 실마리를 이렇게 풀어가고 있는 겁니다. 제가 볼 때는 소설의 이 부분은 토마스 만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적 조건을 들어 하나님께 항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지식을 얻어 영과 몸 사이의 완충지대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데, 아담과 하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지식은 정신의 내용이 되는 셈이지만, 정신을 채울 수 있는 지식이 없어 정신이 영과 몸 사이에서 완충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영은 몸이 잡아당기는 대로 딸려 하강하여 몸을 선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몸이 영을 주도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원래는 영이 몸을 이끌어 상승운동을 해야 하는데, 몸이 오히려 영을 끌어당김으로써 영의 하강운동을 하면서 추락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명백히 영의 직무유기이자 타락입니다. 영이 몸을 이끌고 상승운동을 해야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령한 복을 받고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땅의 기름진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정신의 영역이 풍성하고 견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에게는 정신영역의 작동이 불가능했습니다.

정신이란 삶 속에서 경험과 사유를 통해 축적되는 것인데 태초의 인간은 살아온 삶의 지식이 없어 영과 육의 완충지대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영은 몸이 요구하는 대로 빨려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신도 못 하는 게 있다고?


분석가 : 그러한 상황은 정신분석의 대상관계 측면에서 보면 보다 명확하게 설명이 될 수 있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담은 태생적인 결핍이 있습니다. 신학적 입장에서 보면 불경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결핍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도 채워줄 수 없는 근본적인 결핍입니다.

탐구자 : 아니, 하나님도 못하시는 것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분석가 : 끝까지 한번 들어보세요. 이런 이야기는 신학자도 철학자도 할 수 없는 이야기로서, 오직 대상관계 입장에서만 말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창조하신 아담이었지만 그의 정서적 상태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을 겁니다.

유아의 영은 정신의 내용을 갖지 못한 채 몸에 붙어서 몸의 욕구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태인 셈이죠. 정신의 기능이라는 것은 영이나 몸처럼 그냥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출발해서 삶이 전개되어 가는 과정 속에 그 내용들이 축적되어 가면서 기능을 작동하는 것입니다. 정신의 영역은 어머니로부터 시작해서 아버지와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 친인척, 이웃들 그리고 세상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가면서 동일시, 투사와 내사 등의 정신기제를 작동시켜 인격으로, 그리고 성격으로 형성되어 가면서 발달해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초의 인류는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하게 되었을 때 성장 나이는 0세인데, 몸은 이미 성인의 신체였어요. 몸의 나이와 성장 나이의 간격은 태생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의 삶을 가동해 줄 부모가 부재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각자의 부모의 부재라는 문제는 전능한 하나님조차도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죠. 그래서 태초 인간에게는 배꼽이 없는데, 그렇다고 그들에게 없는 배꼽을 만들어 준다고 해서 부모가 뚝딱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아닌 겁니다. 무로부터의 창조를 몸으로 겪어낸 사람들이기에 ‘존재론적 허무’가 삶 속에 깔려 있었겠죠.

탐구자 :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어야 했던 것이라고 봐야 되는 것 아닌가요?

분석가 : 신학적으로는 그렇게 반발할 수도 있겠어요. 우리는 제삼자로서 그들을 향하여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믿음의 부족이라고… 그러나 토마스 만이 어필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런 부분들 인 것 같아요. 그렇게 순종할 수 없는 ‘존재론적 허무’가 있었는데, 그것을 메워줄 수 있는 정신영역은 텅 비어 있었고, 그래서 영은 몸의 욕망에 끌려 하강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탐구자 : 그렇다면 태초의 인간에게는 태생적으로 존재론적 허무가 있었다면 이미 타락이 전제되었던 것이 아닌가요? 하나님은 창조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렇다면 선한 창조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심에 어떻게 결핍이 있을 수 있을까요?

신학자 : 그 부분은 이해를 잘해야 합니다. Siegel은 타락 전의 아담의 상태를 ‘선한’ 상태가 아닌 ‘순진한’(innocent) 상태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죄를 짓지 않은 상태일 뿐이지 죄를 지을 수 없는 선한 상태라는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또 죄를 짓지 않은 상태라는 것은 언제든지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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