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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적은 여자다

아프로디테와 프시케


그리스 신화는 현대인에게도 인류 보편적 원형을 제시한다고 보기에 무리가 없습니다. 


로버트 A. 존슨이 쓴 시리즈, <She> <He> <We>는 각종 신화, 


즉 여성 신화와 남성 신화를 통해 오늘날의 남녀 관계, 부부관계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들을 통해 인류 보편적 원형을 보여 주는데 그치지 않고, 


현대인이 그 원형을 어떻게 분화시키면서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저자가 신화를 가지고 해석한 것을 필자는 다시 한 번 심화해 보고자 합니다. 





프시케 / 에로스


여성 신화는 프시케(Psyche)에서 시작합니다. 많은 이야기가 왕국에서 시작됩니다. 


그 왕국은 바로 우리 마음의 왕국이기 때문에 우리의 흥미를 끕니다. 


프시케는 셋째 딸입니다. 존슨의 말대로, 대부분의 이야기 속에서 첫째와 둘째는 존재감이 없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의 여주인공도 셋째 딸이고, 최진사댁 노래의 주인공도 셋째 딸입니다. 


우리 속담(속담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에 ‘셋째 딸은 묻지 않고 며느리로 데려간다’는 말이 있다. 


셋째 딸이 제일 존재감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프시케가 여성 신화의 시작이라고 할 때, 그 이전에는 여신이 없었는가? 





비너스의 탄생


프시케 이전에 가장 아름다운 여신 아프로디테가 있지만, 


<프시케는 아프로디테의 새로운 버전>입니다. 여자들은 압니다. 


이 짧은 괄호 속에 보이지 않는 여자의 질투심 또는 시기심이 들어있다는 것을. 


아프로디테와 프시케는 출생에서부터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보티첼리의 그림 <비너스의 탄생>을 보십시오. 


그 비너스는 아프로디테의 로마 버전입니다. 비너스는 우라노스의 성기가 잘려 바다에 떨어졌을 때 


바다가 그 씨앗을 잉태하여 탄생한 여신입니다. 파도에서 태어나 넓은 조개껍질 위에 서 있습니다. 


아프로디테는 바다라는 거대한 무의식에 거주하는 여신입니다. 


그리하여 비너스는 인간을 압도할 만큼 거대한 모성성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프시케는 엄마의 몸, 즉 흙에서 태어나 감정으로 가득 찬 나약한 여성입니다. 



프시케 / 에로스


아프로디테와 프시케,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거울을 가진 계모왕비와 백설공주와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프시케 앞의 아프로디테는 며느리 앞의 엄격한 시어머니이자, 백설공주 앞의 표독한 계모 왕비입니다. 


즉 아프로디테는 시어머니이자 계모입니다.  아프로디테는 두 시녀를 두어 한 시녀는 몇 발자국 앞에서 거울을 들고 서 있고, 


또 한 시녀는 끝없이 향수를 만들어냅니다. 아프로디테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은 


백설 공주의 계모가 거울로 의붓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통제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끝없는 향수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에로스로 하여금 프시케에 흠뻑 빠지지 않도록 


아들의 관심을 계속해서 끌어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프로디테는 프시케를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며느리 앞의 시어머니, 신데렐라나 백설공주 앞에 있는 계모가 드러내는 표상은 <표독함>입니다. 


<표독함>이란 여자가 독을 품고 남성화된 메두사의 표독함과 통합니다.


 중년이 되면 표독해지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여자가 남성화될 때 그 남성화의 극치를 이르는 것이 <표독함>입니다. 


중년이 되어 표독해지는 여자는 자신의 남편에게 아프로디테적인 모성성을 많이 발휘한 여성입니다. 


프시케에 대한 아프로디테의 시기심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또는 계모와 의붓딸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젊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시기하는 계모 어머니, 시어머니에게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여자의 적은 여자입니다. 


만일 여성의 적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인류는 생존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것은 여성이 남성을 적으로 여긴다면 살아남을 남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놓고 손자와 공동의 적으로 삼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적으로 삼지 않고 며느리로부터 보호하려고 합니다.


 아프로디테가 보기에, 프시케가 에로스에게 여성성을 주지 않고 모성성을 줄 때 경쟁심을 느끼게 됩니다.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남편이 시어머니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정서를 끊어 놓지 않으면 


남편과 아내로서 온전한 관계를 성취해 갈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가 차린 밥상 앞에서 투덜대면서 반찬타령을 합니다. “우리 엄마가 만드는 것과 맛이 다르다” 


“엄마한테 요리하는 법을 좀 배우고 오라” 남편은 엄마의 모성성을 아내가 계승해 주기를 원합니다. 철없는 남자의 표상입니다. 


바깥 세계에서 호령을 하는 남자도 집에 들어오는 순간, 철없는 남자로 변신하는 것은 


바로 모성성의 부족 때문에 아내에게 젖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코끼리가 새끼를 낳으면 코끼리들끼리 공놀이 하듯이 이리 저리 굴리는데, 


이런 행위는 곧 아기 코끼리가 숨을 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이라고 합니다.(출처 : [she]) 


결혼한 남자는 아기 코끼리와도 같습니다. 철없는 남자는 이렇게 두 여자가 


성숙한 남자로 살려내기 위해 주고받는 발길질의 게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해야 철없는 남자는 겨우 숨을 쉴 수가 있습니다. 철없는 남자가 누구냐고요? 바로 당신입니다. 



아프로디테 / 프시케


그러는 중에 어느 날 프시케가 심리적 진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여성성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아프로디테는 프시케가 더욱 괘씸해집니다. 현실에서는 아들의 결혼에 앞장섰던 시어머니였지만 


며느리가 여성성을 사용하는 순간부터 며느리를 본격적으로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프시케의 심리적 진화가 남편에게 큰 진보를 가져다줍니다. 


이 진보는 그 동안 엄마 품 안에 있던 아들이 다른 모양의 아들로 변형해 가기 때문입니다. 


가문의 전통도 무시하고 전혀 다른 혈통의 문화가 접목되는 것을 보면서 


아프로디테는 분기탱천하게 되지만 그 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그 분노는 아들이 아프로디테의 바운더리에서 벗어나 프시케의 품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분노가 되어 버립니다. 아프로디테는 표독해 지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아프로디테에게서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남편에게 프시케도 표독함으로 맞서게 됩니다. 


남자는 어떻게든 여자의 표독함을 피하고자 합니다. 남자에게 여자의 표독함은 너무 끔찍한 일이거든요. 


여자를 표독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남편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미워해서 싸우거나 이혼을 할지언정, 


남자를 적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만일 아내가 남편을 미워해서 적으로 여긴다면 다른 남자와도 재혼할 생각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여자가 남자를 적으로 여겼다면, 남자들은 멸종하였을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남자보다 여자가 탁월하지만, 오직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해 남자를 넘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들끼리는 다릅니다. 여자의 적은 여자입니다. 


남자는 아프로디테와 프시케 사이에서, 모성성과 여성성 사이에서 운명이 달라질 뿐입니다. 


영원히 철들지 않은 남자를 철들게 하느라 여자는 끝까지 남자를 보호합니다. 

그렇다면 남자는 언제나 철이 들까요? 남자는 철들면 죽을 때가 된 것입니다. 


“남자는 철들면 죽는다”는 말이 이래서 나온 말입니다. 


여자가 처음부터 철든 남자를 만났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그런 남자를 만난 여자는 무료하고 외로울 뿐입니다. 남자가 다 알아서 해주기 때문에, 


여자는 더 이상 성숙해지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없게 됩니다. 


그렇다고 내 삶을 드라마틱하게 연출하며 이끌어 주는 철없는 남편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해서 함께 살고 있다는 것만큼 신비한 일이 세상에 있을까요?





                         아프로디테와 프시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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