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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시케를 납치하는 도둑놈

- 이 글을 읽고 이해를 못하는 남자! 바로 당신이 그 도둑놈입니다 -


[거대한 바다에서 탄생한 아프로디테와는 달린 프시케는 새벽이슬이 땅에 닿는 그 순간에 태어났다.](She인용)




아프로디테가 태어난 바다는 온 대륙을 압도할만 하지만, 


프시케의 새벽이슬은 손바닥으로 담아낼 정도의 물입니다. 


양희은의 노래 “아름다운 것들”에서 ‘꽃잎 끝에 달려 있는 


작은 이슬방울들 빗줄기 이들을 찾아 와 음~ 어디로 데려갈까’


이슬방울은 작은 양이지만 땅에 떨어져 대지를 적시고 냇가로 내려가 바다로 흘러갈 수도 있고, 


다시 하늘로 증발할 수도 있습니다. 대지는 어머니를 상징하고 바다는 아프로디테를 상징합니다.


 이렇게 프시케(며느리)도 언젠가는 아프로디테(시어머니)의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슬 한 방울 같은 프시케는 순수하고 수려하며, 숭고하고 천상적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숭배대상이 되지만, 반면 아무도 그녀에게 구혼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She 인용)




프시케의 내면에는 청순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으나 이 감정을 표현할 길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프시케 내면에 간직되어 있는 순수한 여성성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특히 남자들)과 거리를 둠으로써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성성은 수줍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수줍음이 남들과 거리를 두게 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프시케를 너무 쉽게 다가갔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를 발견하기 십상이지요. 


사춘기 때 남성과 접촉한 적인 없는 순진한 여성은 성인이 되어서도 남자들이 감히 접근하기 힘든 


여신의 자리를 굳혀 가게 됩니다. 프시케는 남성에 대해 무지하여 남자를 만날 때는 


상호성의 부족으로 관계 연속성을 보여주기가 어렵습니다. 


여자가 남자에 대해 무지한 것은 여자의 잘못이 아니라 남자의 탓입니다. 


남자가 여자 안에 있는 프시케를 발견하고 영혼의 보화를 캐낼 때, 


여자는 영혼을 캐는 남자의 손길을 느끼면서 남자를 알아가고 


남자가 여자의 영혼을 캐내는 만큼 여자도 자신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알지 못할 때, 여자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됩니다.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남편이 아내를 알아주지 못하자 


자신도 모르게 독설을 퍼붓는 아내가 되어 버립니다. 


남편에게만 독설을 퍼붓는 것이 아니라, 공중파 방송에 출연하여 모순되고 


왜곡된 현장에 나타나 독설을 퍼붓는 것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해 집니다. 




프시케는 독설을 퍼붓는 프시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Psyche’라는 용어 자체가 ‘영혼’의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자가 여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해석하는 작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남자가 일상적인 삶의 차원에서 프시케를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여자를 만나면서, 또는 아내와 평생을 살면서 


그녀 안에 있는 프시케를 만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말까요? 


거의 대부분의 부부 관계가 이렇게 끝나게 된다니까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죠. 


그래서 나이 60이 넘어가면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한숨들을 내쉬는 것이죠. 




결혼의 사명이 바로 남자가 아내의 프시케를 발견해 내는 것이고, 


여자는 남편으로 통해 자기 안에 있는 프시케를 캐내어 발달시켜 나가는 데에 있습니다. 




프시케는 마치 우주와도 같으며, 그 우주는 미로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프시케는 외적인 외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해도, 친밀함의 부족으로 아니마의 투사가 잘 통하지 않습니다. 


프시케는 남자가 아니마(남자의 여성성)를 투사한다고 해서 쉽게 자신의 영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며, 


남자가 까다로운 절차를 밟지 않고 마구 비집고 들어올 때 


갑자기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 지레 겁먹고 확실한 선을 그어 버립니다. 


남자와 여자가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남자가 아니마를 투사하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여자 쪽에서 아니무스(여성 안에 있는 남성성)을 투사해야만 서로 교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민한 여자는 자신의 프시케를 캐내어 줄 인물이 못 되면 아예 가까이 오지도 못하도록 


일찌감치 경계를 쳐 버립니다. 프시케를 캐내어 줄 남자가 아니라면, 차라리 처녀로 낫다는 겁니다. 


이 여자는 평생 동안 순결을 지키며 삽니다. 프시케는 심리학적 처녀입니다. 




결혼을 했어도 남편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거나, 자신의 여성성을 발현하지 못할 때 


그녀의 프시케는 노출되어 본 적인 없는 심리학적 처녀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어떤 남편은 아내의 내면에 있는 프시케를 알아채고 마치 천연기념물처럼 보존합니다. 


이 남편은 16세 소녀인 프시케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 


함께 살면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겪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보살핍니다. 


어쩌면 이 남편은 아내 내면의 프시케가 자라면 남편 자신의


 남성성에 엄청난 타격을 가져 올 것이기 때문에 잘 보존하는 길을 택한 것인지 모릅니다. 




[ 모든 여성의 내면에는 이런 특성이 존재한다. 만일 여성들이 자기 안의 프시케 다운 특성을 인식할 수 있다면, 


자기 안의 무의식적 특성을 의식으로 전환하여 자연스레 고귀한 진화를 시작할 수 있다. 


이 과정이 바로 위대한 인간 심리의 아름다움이다.](She인용)




여자의 자기 이해 과정은 매우 복잡합니다. 그것은 남자는 부분대상을 추구한다면, 


여자는 남자보다 훨씬 전체 대상의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여자는 남자에 비해 촉이 발달되어 있다 합니다. 그 촉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자는 어릴 때부터 전체를 보는 무의식적 사유 범주를 가지고 있어 왔습니다. 


엄마는 아들을 낳은 권력을 누리면서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아들에게 투사하고, 


아들은 엄마만 바라보면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채울 수 있는,  둘은 이러한 상호 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엄마는 같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딸에 대해서는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즉 엄마는 딸에게는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투사하지도 않고, 


딸은 엄마를 통해서 나르시시즘을 채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딸은 아들과 달리 엄마만 살피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함께 살펴야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가 


왜 그러해야 하는가에 대한 분위기 파악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여자의 높고도 넓은 촉은 이때부터 발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남자는 3살 때까지는 엄마만 바라보면 되고, 6살 때 까지는 아버지만 바라보면 되는 극히 제한적인 부분대상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바로 그 방식대로 넓은 세상을 자기 시각화해서 바라보기 때문에, 


전체적 시야를 가진 여자의 사유 과정을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프시케가 내 뱉는 한 마디는 바로 이런 긴 역사를 가진 무의식적 사유를 바탕으로 삼아 밖으로 나오는 말인 것입니다. 


남자는 여자의 한 부분만을 이해하기 때문에 여자 내면에 있는 프시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죠. 


프시케적 사유는 여자의 고통의 역사입니다. 어릴 때부터 엄마로부터 결정적인 지점에서 외면당해 온 아픔을 지니고 있어 


남자가 여자의 프시케를 이해한다는 것은 갈등과 고통을 견뎌낼 각오를 해야만 가능합니다. 


여자 내면의 프시케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우주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 프시케는 부모의 걱정거리다.... 프시케에게 청혼이 들어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프시케를 숭배만 할 뿐이다. 왕은 아프로디테 신전으로 들어가 신탁을 받는다. 


신탁은 프시케를 산꼭대기에 있는 바위에 묶어 두면 죽음이 다가와 그녀의 목숨을 앗아 갈 것이라는 내용이다. 


부모는 딸의 결혼 행렬을 준비한다. 신탁 메시지대로 프시케를 산꼭대기로 데려가 바위에 묶어둔다. 


화려한 결혼식과 장례식의 어둠이 뒤석인다. 프시케의 부모는 횃불을 끄고 


칠흑같은 어둠 속에 프시케를 남겨두고 가버린다. ](She인용)




뒤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부모가 버리고 간 프시케를 납치해 가는 남자는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입니다. 

에로스는 실수로 사랑의 화살촉에 자신이 찔려 프시케를 사랑하게 되면서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일체 질문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카자흐스탄 보쌈문화(납치하는 사진)


과년한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남자가 납치해 갈 수 있도록 딸을 내어주는 부모를 생각해 봅시다. 


최근까지만 해도 카자흐스탄에서는 처녀가 일면식도 없는 남자에 의해 납치되어 결혼하게 되는 것이 용인되어 왔습니다.


 요즘에도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가 결혼식장에서 신랑에게 딸을 인계하는 순간, 


신랑을 괘씸하게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 신랑은 바로 내 딸을 납치해 가는 도둑놈이기 때문이죠. 


아버지는 왜 사위에게 분노를 가지고 있을까요? 


사위는 딸의 프시케를 알지 못한 채 납치해가기 때문에 도둑놈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 역시 자신의 아내의 프시케를 이해하지 못한 채 납치범으로 살아 온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위를 보고 ‘이 놈도 역시 나 같은 류의 도둑놈이지’ 하는 무의식적 사고를 한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다 고놈이 고놈이랍니다. 


단, 자신의 아내 내면의 프시케를 본 성숙한 남자만이 사위에 대한 괘씸한 감정을 거둘 수 있습니다. 


성숙한 남자는 비록 딸을 도둑질한 납치범이라 해도 


프시케를 알아가는 지혜자로 만들어 가면 되니까 사위가 괘씸하지 않습니다. 


지혜와 지식의 차이가 뭘까요? 지식은 <무엇what>에 대한 것이라면, 


지혜는 <누구who>에 대한 것입니다. 세상에 허구 많은 what에 대한 지식은 모두 외부에 관한 것이지만, 


그 지식들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방향은 바로 <나>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옵니다. 


지식이 지혜로 돌아오고, 물질이 영혼으로 돌아오는 순간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관계로 집약되는 <나>에 관한 것입니다. 


앞으로 계속되는 필자의 글을 통해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세상을 향해 <무엇>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궁극적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알아가시기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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