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2: 본질주의와 니힐리즘

좀 믿을 수 없는 예화이지만 이런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서구 고고학자들이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발견한 후 그 입구를 찾아 들어가 보니 그 첫 관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더란다.


"요즘 젊은것들 너무 버릇이 없다"라고.


아마도 세대차라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진짜 같지 않은 이야기이다.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은 세대 간의 갈등을 생생하게 다룬다.

두 세대 간에는 주인공 아르카디의 백부 파벨 페트로비치 키르사노프와 아르카디의 친구 예브게니 바자로프 사이에서 첨예화된다.

1840대 사람인 파벨은 귀족 출신의 자유주의적 이상주의자이고, 1860년대 사람인 바자로프는 잡계급 출신의 현실주의자이자 급진적인 혁명적 민주주의자였다.

파벨은 사회적 원칙과 권위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자이지만, 바자로프는 사회적 원칙과 권위를 배척할 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의과대학생이자 니힐리스트이다.

이 두 세대 간의 논쟁은 사실 세대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투르게네프는 이것을 세대차이에 의한 사상적 갈등으로 세팅하였다.

그 두 세대의 차이는 본질주의와 니힐리즘으로 나타난다.


니힐리즘의 출현과 그 기원의 모순

본 소설에서 나타나는 두 사상은 서양 근대가 출발하던 때에 나뉘었던 합리론과 경험론의 변형이다.

데카르트로 대변되는 합리론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본유관념이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경험론은 존 로크로 대변되며, 사람은 태어나면서 어떤 정신적 기제를 가지지 않고 빈 백지상태(tabula rasa)의 상태라고 주장한다.

경험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니힐리즘은 18세기에 나타나 유럽에서는 매우 위험한 사상으로 통했다.

니힐리즘은 신이나 진리로 표상되는 모든 절대적 가치와 권위를 부정한다.

니힐리즘은 프리드리히 니체에게서 그 정점을 찍는다.

니체가 [즐거운 학문](1882년)에서 남긴 유명한 말,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Gott ist tot. Gott bleibt todt. Und wir haben ihn getodtet. Wie trosten wir uns, die Morder aller Morder?)


이 문장을 보면, 처음에는 신의 자살로 보이지만 그다음 문장을 보면 신은 타살 되었다.

니힐리즘의 기원은 모순으로 나타난다.

즉 사람이 신을 부정함으로써 신은 타살 되었지만, 본래적 신은 누가 죽인다고 죽는 존재가 아니다.

투르게네프는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 바로 이 모순을 보여주고자 하는 데 소설을 쓰는 목적으로 삼지 않았나 싶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하기 훨씬 전에 투르게네프는 먼저 그 니힐리즘을 죽였다.

니힐리즘이 권위를 부정한다고 해서 그 권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신을 부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니힐리즘은 '눈감고 아웅'하는 것이다.


니힐리스트 바자로프의 등장


이 소설은 1835년에 학사학위를 받고 대학을 졸업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1859년 5월 어느 날, 학사 학위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 아르카디를 주막집에서 기다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귀족 출신인 아들이 출신 성분을 초월한 잡계급 출신인 친구 바자로프를 집으로 데리고 온 후, 안정적이던 집안에 사상적 갈등이 시작된다.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의 온 집안을 헤집어 놓는다.

아들인 아르카디는 평소 귀족으로서 품위를 지키고 격식을 중시하는 아버지 니콜라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버지, 저 친구 앞에서 격식을 차리지 마세요. 저 친구는 훌륭한 젊은이고 아주 소박해요. 두고 보면 아실걸요."


아버지는 1847년에 아내를 여의고 오갈 곳이 없는 10대 후반의 페네치카와 몰래 동거하여 아들까지 낳은 것에 대해 스스로 품위를 손상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중 아들에게서 받을 수 있는 비난과 바자로프가 얼마나 거북해할까 걱정한다.

그때 아들 아르카디는 아버지를 위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자로프는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그런 모든 문제를 초월했으니까요."


아버지가 아들의 친구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을까 염려하는 반면, 실상 아버지 니콜라이보다 더 아버지 같은 권위를 가진 백부, 파벨 페트로비치는 바자로프를 처음부터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다.

사랑에 실패하여 가정을 이루지 못하여 동생의 집에 얹혀사는 파벨이지만, 어느 누가 봐도 파벨의 귀족으로서 어른으로서 권위와 품위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아르카디는 자신의 아버지보다 친구인 바자로프를 더 신경 쓰고 은연중에 그의 눈치를 살폈다.

조카를 오랜만에 보는 파벨은 아르카디가 예전과 달리 격식이 없고 어른을 대하면서 허물없이 대하는 것을 보고, '좀 건방져졌다'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은 바로 바자로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파벨과 바자로프의 논쟁


이 두 사람의 갈등은 두 차례로 나타난다.

6장(42쪽)에서 나타나는 첫 번째 갈등을 살펴보자.

의대생 출신인 바자로프는 물리학 등 자연과학을 연구하고 있다.

바자로프는 파벨에게 최근(19세기) 독일인들이 자연과학에서 이룩한 성과를 자랑했다.

18세기까지 유럽이 자연과학의 발달을 주도한 것이 수학과 천문학이었다면, 19세기에는 독일인이 주도하여 물리학, 화학, 특히 생물학에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

자연과학을 숭상하는 바자로프의 이러한 자랑은 러시아 귀족주의적 품위를 지키고자 애쓰는 파벨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실러나 괴테가 이룩한 옛 독일의 영광을 존중할만하다 여기는 파벨이지만, 그는 당시의 독일의 화학자를 유물론자로 폄훼한다.

이에 바자로프는 자신의 초월적인 건방짐을 과감 없이 드러낸다.


"훌륭한 화학자는 그 어떤 시인보다 스무 배는 더 유익합니다."


이 말을 들은 파벨은 흥분하였지만, 자신의 권위와 품위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그럼 당신은 예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요?"


바자로프는 이제 자신의 본색을 드러낼 때가 되었다 여기며,


"돈을 버는 예술입니까, 아니면 치질을 고치는 예술입니까?"


라며 파벨에게 조소를 보낸다.

니힐리스트인 바자로프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이 논쟁 과정을 지켜본 아르카디는 바자로프에게 공작부인 R과의 낭만적 사랑의 피해자인 파벨(이 이야기는 내 글 1편에서 언급했다)은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가치와 합당한 교육을 받은 분으로서 그렇게 경멸을 당할 분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즉, 아르카디의 언급은 백부 파벨이 비록 우리 젊은이들과는 가치관이 다르지만, 백부를 지금 우리의 가치관으로 비판해서는 안되며 백부 자신의 시대를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살아왔고 시대에 맞는 합리적인 태도로 가졌느냐의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바자로프를 친구이자 스승으로 여겨 온 아르카디의 이러한 발언은 바자로프에게 유약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이에 대해 바자로프는 '낭만주의, 예술은 모두 실없는 소리'라고 치부한다.

아르카디는 아버지 니콜라이가 시골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며 같잖다는 듯이 껄껄 웃으며 조롱하기도 하는 바자로프를 보며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조금씩 철수하기 시작한다.


두 번째 논쟁은 10장에 나온다.

화제는 이웃에 사는 한 지주에게로 옮겨갔다.

바자로프는 그 지주를 '건달이자, 귀족 나부랭이'라고 부르며 지주계급과 귀족을 한 묶음으로 묶어 내동댕이쳐 버렸다.

자유주의적이고 진보를 사랑하는 파벨은 진정한 귀족을 존경하며 귀족의 품격을 높이고자 영국의 귀족을 상기시키며, 자신의 품위를 존중해 줄 것을 요청한다.


"상기해 보시오, 영국의 귀족들을. 그들은 자기의 권리를 조금도 양보하지 않지만, 그런 까닭에 타인의 권리를 존중합니다. 그들은 타인에게 의무의 이행을 요구하지만, 그런 까닭에 그들은 자기의 의무도 잘 이행하고 있어요. 귀족계급은 영국에 자유를 주었고 그 자유를 유지시키고 있소." (78쪽)


"인간의 개성은 반석처럼 단단해야만 해요. 왜냐하면 그 위에 모든 것이 세워지기 때문이요. 예컨대, 당신이 나의 습성, 나의 옷차림, 나의 말쑥함을 가소롭게 여기고 있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자존심에서, 의무의 감정, 그래요. 바로 의무감에서 나온 것이오. 나는 시골의 벽촌에 살고 있지만 스스로의 품위를 잃지 않으며 내 안에 있는 인간을 존중하오."(78~79쪽)


파벨은 '내 안에 있는 인간을 존중'한다는 언급을 하면서, 누구나 선천적으로 가지고 나온 본유관념을 강조한다.

그러나 바자로프는 이를 조롱하자 파벨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바자로프를 통해 보여주는 니힐리즘의 한계

두 사람의 논쟁은 승자 없이 바자로프가 파벨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정도로 끝이 났지만, 본질주의(본유관념)와 니힐리즘의 논쟁이 끝이 난 것은 아니다.

투르게네프는 바자로프의 니힐리즘 한계를 현실에서의 인간관계의 실패로 증명한다.

소설은 인간의 본성에서 떠나 있는 니힐리즘은 인간성과는 별개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화 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보여 준다.

이데올로기화 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이라는 것은 영어로 'nature'로서, 자연과 인간 본성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자로프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부정한 데서 이데올로기화 된 자신이 얼마나 가식적인가를 깨달아 간다.

그런 깨달음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일어난다.

당시의 니힐리즘은 서구의 과학적 실증주의의 발달과 궤를 같이 하면서 자연과 문화의 공존이라는 새로운 창조적 정신을 발현하였다.(최인선의 논문 [니힐리즘; 새로운 지식인의 형상] 119 )

니힐리즘이 말하는 자연은 거대한 유기체적인 자연이 아니라, 과학 기술로 정복 가능한 개발대상으로서의 자연에 불과하다.

바자로프는 29세의 매력적인 과부 오딘초바와 사랑에 빠지면서 억압된 사랑의 본성이 올라와 자신의 니힐리즘을 거스르는 것에 대해 스스로 분노한다.

오딘초바가 바자로프에게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자 그는 사랑에 빠져 든다.

그리고 고통스럽게 사랑을 고백한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바보처럼, 미칠 듯이... 자, 이제 당신의 목적을 이루셨군요."


오딘초바는 바자로프의 사랑을 거절한다.

오딘초바는 바자로프의 본성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지만, 언제 다시 본성을 부정하고 니힐리즘으로 돌아갈지 알 수 없었기에 그의 사랑을 거절하였다.

바자로프는 그렇게 부정하고 싶었던 낭만주의가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니힐리즘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한갓 여자 앞에서 무너지는 자신을 보면서 분노한다.

그 분노는 니힐리즘에서 사랑이란 육체적 욕망의 결과물에 불과한데, 오딘초바를 사랑하면서 자신이 그동안 무시했던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고 그 본성 앞에 무기력해지는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나타났다.


동등해진 두 친구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아르카디는 친구이자 스승으로 존경해 온 바자로프와 그의 사상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갈수록 불만의 수위가 높아지는 것을 느낀다.

아르카디는 그동안 존경의 눈으로 봐 왔던 바자로프가 여자 앞에서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기 시작한다.

바자로프에 대한 실망은 아르카디가 카챠를 마음껏 사랑할 수 있도록 장애물(니힐리즘)을 제거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이렇게 오딘초바의 동생인 카챠를 사랑하게 된 아르카디와 오딘초바를 사랑한 바자로프는 서로 동등해졌다.

카챠는 아르카디에게 본질 또는 본유관념을 불러일으켰다.

아르카디는 바자로프와는 달리 카챠를 사랑하게 되면서 니힐리즘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무산시켰다.

사랑의 감정 앞에서 동등해진 두 사람을 확연하게 갈라놓은 것은 바로 가족중심주의였다.

바자로프는 가족중심주의조차 무시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부모의 사랑마저도 외면한다.

그래서 모성애가 풍부한 바자로프의 어머니는 애가 탄다.

그는 자신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어느 정도로 애틋한지 뻔히 알면서 그 사랑을 외면한다.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그의 니힐리즘은 가족이라는 시스템조차도 해체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바자로프의 그러한 사고는 아르카디의 백부 파벨을 '바보'라고 부르는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반면 아르카디는 바자로프의 그런 발언을 백부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한다.

그 일로 인해 두 사람의 감정 대립은 주먹질 일보직전까지 간다.


두 친구의 상반된 결말


아르카디는 바자로프와 결별 후, 카챠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카챠는 그 고백을 받아들인다.

아르카디는 바자로프로부터 배운 니힐리즘을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했으며 결혼을 통해 행복의 길로 들어섰다.

아르카디는 니힐리즘 대신 자유주의적 신념을 가지게 되면서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고 가족주의로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제는 카챠와의 사랑과 결혼을 통해 자신의 가정을 세워감으로써 그동안 외면해 온 본질주의로 회귀한다.

반면에 바자로프는 귀족 출신인 아르카디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귀족에 대한 계급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계급의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게 되면서 나와 한편이 아니면 극복의 대상으로 삼는다.

바자로프는 오딘초바로부터 사랑을 거절당하고, 친구인 아르카디와의 우정도 거절당하면서 삶의 의욕을 상실한다.

바자로프가 진정한 니힐리스트라면 이러한 사랑과 우정마저도 초월해야 마땅하지만, 그의 무의식은 그의 니힐리즘이라는 이데올로기 밑에 있는 인간의 본성을 찾아내어 바자로프의 눈앞에 들이민다.

고향으로 돌아간 바자로프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은 농부의 시체를 해부하다가 감염되어 찾아온 죽음은 자신의 무의식이 선택한 삶의 마지막 여행이라 여겨도 무방할 것이다.

두 친구가 결별하면서 확연하게 드러난 것은 바로 시제의 차이이다.

아르카디는 아버지 세대에 대한 존경을 되찾아 오면서 가족주의를 확립하면서 시간 개념을 명확하게 획득했다.

그리하여 그는 과거(아버지 세대와 권위)에 대한 인정 위에 현재의 사랑을 설정했고, 카챠와의 결혼을 통해 행복한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그러나 바자로프는 과거의 역사적 유산도 부정하고 미래를 부정하여 현재의 시간 안에서만 살고자 했다.


누군가가 비극을 맞이한 바자로프는 '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그에 대한 답변은 다음 글에서 제시될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투르게네프[아버지와 아들]:강한 남성성과 천박한 여성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