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3; 니힐리즘, 상징성결여

니힐리즘의 nihil은 nothing(무)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공허하다 허무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젊을 때 성취한 성과물, 오랜 세월 누려 왔던 사회적 지위, 집착하고 움켜쥐며 살아왔던 재물들 등등

한동안 죽자 자사 부둥켜안고 놓을 수 없었던 소중한 것들이 어느 순간 허무와 공허로 가슴을 저며 올 때 누구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에서 바자로프는 기득권을 별로 누려 본 적도 없으면서 자칭 니힐리즘을 표방한다.

바자로프가 20 대 중반의 나이에 그러한 니힐리즘을 주창하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권위와 규칙과 원칙을 무시한다.

과연 바자로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니힐리즘은 의미의 왜곡이다


중국 고사에 사면초가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이 용어는 <<사기>>의 <항우 본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천하를 다투던 중, 항우의 군사가 한나라의 명장 한신에게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어느 날 밤 한나라 진영에서 고향을 그리는 구슬픈 초나라의 노래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한나라가 항복한 초나라 병사들을 시켜 고향의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다.

항우는 그 노래를 듣고 "이미 초나라가 유방에게 넘어갔다는 말인가. 어찌 적진에 포로의 수가 저렇게 많은가"라며 탄식했다.

한나라의 심리 작전은 맞아떨어져 항우의 진영에서 도망자가 속출했다, 항우는 진중에서 마지막 연회를 베풀고 비분한 감정을 노래로 읊었다.

항우는 '역발산 기개 새'를 마지막 노래로 부르며 자결한다.


역설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만일 이러한 상황에서 항우가 니힐리스트였다면, 고향의 노래조차도 그냥 시끄러운 소리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면서 위기를 극복했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속의 니힐리스트인 바자로프가 예술을 아예 무시한다.

실제로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의 아버지가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조롱거리로 삼는다.

니힐리스트는 음악이 사람에게 주는 감미 로움과 멜로디 흐름의 아름다움, 그리고 박자의 변화무쌍 함에서 오는 희열 등을 무시한다.

그들에게 있어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 연주도 한갓 소리, 또는 소음에 불과하다.

명작 미술을 본다 할지라도, 그가 보는 그림은 선과 곡선을 모아 놓은 것과 여러 색채의 나열에 불과하다.

20대 중반의 바자로프가 29세의 과부 오딘초바에 대한 사랑에 깊이 빠져 든다.

그는 그런 사랑의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스스로에게 분노하지만, 그러면서도 오딘초바를 마음에서 지우지 못한다.

바자로프의 마음속에서는 모순되는 감정이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사랑의 감정은 단지 육체적 욕망에서 비롯된 유물론적인 것이라는 사상, 다른 한편 내면 깊은 곳에 오랫동안 억압된 사랑의 본질에 사로잡힌 모순된 상황에 바자로프 자신도 무척 당황한다.


니힐리즘, 상징성을 배제한 삶


니힐리즘은 무엇을 보든지 나타나는 현상만 볼뿐, 그 현상이 지닌 의미와 그런 현상이 나타나게 하는 밑바닥의 본질이 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

니힐리스트가 아니라 할지라도 현상에 대한 본질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과학이나 철학, 또는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과 일상 경험에서 누적된 통찰이 필요하다.

현상과 본질 사이에 중간영역이 있다.

그 중간영역에는 현상과 본질을 연결하는 상징화가 일어난다.

니힐리즘은 상징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허무감과 공허감 밖에 찾을 것이 없다.

니힐리즘은 무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것의 결국은 죽음이다.

그래서 투르게네프는 바자로프의 니힐리즘의 마지막을 죽음으로 장식한다.


생활 속에 있는 중간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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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가면서 중간영역에 대한 의미를 어떻게 부여하는가 하는 것은 삶의 차원을 높이고자 할 때 매우 중요하다.

사람이 중간영역 없이도 살아갈 수는 있지만, 그런 삶은 고만고만한 수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중간영역은 일상의 삶에 여유를 주며, 삶의 차원을 높여 준다.

나의 어린 시절, 내가 사는 집에는 방만 있었고, 거실이라는 공간은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마루가 있는 집으로 이사 갔는데, 그 마루를 보면서 나는 우리 집의 경제적, 심리적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오늘날 가옥을 짓든, 아파트를 짓든 거실이라는 중간영역은 그 집의 안락함을 가져다주는 중심 공간이다.

거실은 공간과 공간을 연결, 매개, 완충 및 여과시키는 중간영역이 있다.

한 가정의 거실과 같은 중간영역은 외부 세계의 공간과 가정이라는 공간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한다.


종교생활에서도 중간영역은 매우 중요하다.

신과 성도 사이에 예배, 기도, 성찬, 세례 등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간영역이다.


가족 관계 안에서도 중간영역이 있다.

남녀가 결혼하여 부부가 되면, 부부관계로만 생활을 영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자녀양육이 바로 부부 사이의 중간영역이 되는 것이다.


중간영역 없이 삶을 영위하는 것은 오직 생존을 위해 살 때의 일이다.

사람이 생존을 위해 살아야 하는 각박한 현실이 전개될 때도 있지만, 생존을 위한 삶의 단계를 넘어서면 생명의 다양하고 풍성함을 누리면서 산다.


미국 사람은 식사를 햄버거 하나로 만족하기도 한다.

그것은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끼 때우는 것이다.


한국 사람은 밥을 먹는다고 해서 밥만 먹는 경우는 없다.

한국 사람 밥상 위에는 밥과 더불어 반드시 최소 세 가지 이상의 반찬과 국이 올라오며, 메인 요리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다.

밥 외에 여러 가지 반찬, 국 등은 식탁 위에서의 중간영역이다.

이처럼 식탁에서의 중간영역은 우리에게 각박한 현실 속에서의 여유와 가진 것이 없는 가운데서도 풍요로움을 제공한다.


엄마와 아기 사이의 중간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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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에서 중간영역의 기원을 찾아보자면, 그것은 바로 엄마와 아기 사이에 있는 중간영역이다.

엄마가 있고 아기가 있는데, 엄마와 아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에는 중간영역이 있다.

이때 엄마는 그냥 엄마가 아니라 아기에게 따뜻한 품을 제공해 주는 엄마이다.

따뜻한 품은 아기가 태생적으로 가지고 나온 불안을 중화시킨다.

중간 영역에서는 중간 현상이 일어난다.

중간 현상은 엄마의 품을 대신하여 아기의 불안을 완화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대표적인 중간 현상이 바로 엄마가 불러주는 '자장가'이다.

중간 현상은 왜 필요한가?

유아 초기에는 엄마는 항상 아기 곁에 함께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엄마가 24시간 붙어 있는 것은 아니다.

엄마가 잠시 화장실이라도 가려면 아기와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에 연결을 시켜 줘야 한다.

엄마는 내가 여기 있다고 하는 표시를 하기 위해 화장실에 앉아서 노래라도 불러야 하고 기침이라도 해야 한다.

아기로부터 먼 거리에 있는 엄마는 하다 못해 아기를 위해 방귀라도 뿡~ 하고 뀌어야 한다.

그러면 아기는 옹아리로 답한다.

자장가, 방귀, 엄마의 기침소리, 아기의 옹아리 심지어 하품까지 엄마와 아기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현상으로 기능을 한다.


옛 부터 우리나라에는 엄마와 아기 사이에 <깍꿍>이라는 놀이가 있어 왔다.

<깍!> 할 때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가 <꿍!>할 때 가렸던 손을 떼면서 눈을 번쩍 뜨면서 아기와 눈을 맞춘다.

그것은 엄마가 사라졌어도 다시 나타날 것이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를 가진 유아기의 놀이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다음의 노래는 다 알고 있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

바다가 불러 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 잠이 듭니다."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스르르 잠이 들 정도면, 평소 엄마는 아기에게 수많은 날 동안 '자장가'를 불러 주었고, 수도 없이 <깍꿍 놀이>를 해 온 것이다.

엄마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기를 홀로 둬야 하지만, 이런 중간 현상으로 아기는 잠시 엄마 없이도 불안에서 벗어난다.


중간 대상의 의미


아기가 한 살이 지나면, 엄마는 본격적으로 사라졌다 한참 후에 나타난다.

이제는 중간 현상만 가지고는 아기의 불안을 잠재울 수 없다.

아기는 자주 그리고 점차 멀리 사라지는 엄마에 대한 대책을 스스로 세운다.

아기는 보통 곰 인형으로 대표되는 중간 대상을 세운다.

어떤 아기는 곰인형 대신 자기가 덮고 있는 홑이불, 또는 둥근 모양의 베개 등을 중간 대상으로 삼는다.

일단 아기가 그 무엇이든 중간 대상으로 삼으면, 그 사물은 그냥 사물이 아니다.

인형이 그냥 인형이 아니라, 아기가 생명력을 불어넣은 인형이다.

처음에는 사라진 엄마를 대체하는 대상에 불과했지만, 아기가 직접 중간 대상으로 채택하면 그 대상을 엄마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

어느 날 이 중간 대상인 인형이 사라지기 라도 하면, 엄마는 아기를 달래기 위해서 온 집안을 뒤져서 라도 찾아 줘야 한다.

아기는 중간 대상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때로 기분 나쁠 때는 그 대상을 증오하여 집어던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아기는 중간 대상을 통해 사랑과 환멸을 경험한다.


이 대상은 아무리 냄새나고 더러워도 절대 빨거나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아기는 양배추 인형을 중간 대상으로 삼아 쭉쭉 빨고 하니,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아기의 엄마는 옆집 엄마로부터


"아기의 인형이 더럽고 냄새나니 아기의 위생을 위해서라도 제발 세탁해 줘라"


라는 지적을 여러 번 받았다.

아기 엄마는 심정적으로 애착 인형을 빨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옆집 엄마 눈치가 보여서 어쩔 수 없이 세탁기에 넣었다.

아기는 깨끗하게 세탁된 인형을 다시는 쳐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인형이 중간 대상으로서 '존재 연속성'이 깨져 버린 것이다.

그 아기는 나중에 매우 힘겨운 사춘기를 보냈다.

한동안 여기저기서 많은 문제를 일으켜 나와 긴 상담을 해야만 했다.


중간 대상의 상징성과 문화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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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엄마와 중간 대상이 1:1 관계, 또는 'A=B'의 관계로 은유되지만, 형식적인 은유 관계가 형성된 이후에는 상징화가 일어난다.

은유는 일대일 대응 관계에 불과하지만, 상징화는 수많은 의미를 산출한다.

어느 순간 아기가 엄마보다 엄마를 상징하는 중간 대상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은 바로 상징이 만들어내는 풍부한 의미들 때문이다.

아기는 이 중간 대상을 어떤 때는 엄마 이상으로 사랑하고, 어떤 때는 엄마 이상으로 미워한다.

그러면서 아기는 태생적 불안에서 조금씩 벗어나며, 자신의 존재를 생생하게 느낀다.


그렇다고 모든 아이가 때가 되었다고 중간 대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엄마가 따뜻한 품을 제공해 주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는 엄마라는 존재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엄마가 사라졌다고 해서 중간 대상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상징화 능력을 획득하지 못한다.

아이는 엄마를 상징화시킨 결과 중간 대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아기는 보통 중간 대상을 엄마의 젖가슴처럼 부드럽고 변형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아기에게는 대상의 존재 연속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중간 대상은 아기가 화가 났을 때 집어던져도 깨지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부드러운 중간 대상은 나중에 딱딱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으로 바뀐다.

장난감은 나중에 놀이터로 바뀌고, 놀이터는 유치원이나 학교로 바뀐다.

우리는 이렇게 아기가 자라는 과정에서 아기의 수준에 맞게 대상이 계속해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엄마의 젖가슴에서 엄마 자체, 그다음에는 중간 대상, 그다음에는 놀이터, 학교, 사회로 대상 영역이 넓어진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점은, 아기가 엄마를 중간 대상으로 대체하는 상징화 능력을 계속 확대해 간다는 것이다.

아기가 중간 대상을 충분히 경험하고 나면, 그 대상은 창고로 들어간다.

아기는 이제 중간 대상 대신에 장난감의 세계로 진입한다.

중간 대상이 비록 창고로 들어가지만, 상징화 능력은 계속 확산되어서 장난감으로, 놀이터로 학교로 사회로 확산된다.

그렇게 확산되어 가면서 아이는 문화적인 삶을 확장해 간다.

중간 대상이 순기능일 때, 그것은 놀이의 영역으로, 공부의 영역으로, 예술 창조와 감상의 영역으로, 미래를 꿈꾸는 영역으로 발달해 간다.

그러나 중간 대상이 역기능일 때, 중간 대상은 주물 대상이 되고, 거짓말과 훔치기로, 사랑스러운 감정의 근원 상실로, 약물 중독으로, 강박적 의례로 확장되면서 당사자는 마침내 심각한 정서적 병리를 겪는다.

중간 대상이 순기능 인가 역기능 인가의 차이는 아이의 상징화 능력이 문화적으로, 창의적으로 잘 발달해 가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

중간 대상을 순기능으로 사용하는 아이는 장차 문화적 존재로서 발달해 가면서, 삶의 차원을 끊임없이 높이며 삶의 질을 향상한다.

그것은 개인의 인격 안에서 유머 감각, 지혜, 훌륭한 지성, 인격적인 관계 등으로 나타난다.

아이들 중에는 중간 대상 자체를 경험한 적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의 아이는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영위해 나갈 것인가?


상징성이 없는 니힐리스트, 구체적 현실을 살아가다


엄마를 중간 대상으로 상징화해낸 경험을 가진 사람은 엄마의 부재로 인한 불안을 스스로 극복한다.

불안 극복 이후에도 상징화는 계속된다.

상징화라는 것은 사물 또는 사람을 그 자체로만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대상을 통해 수많은 의미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사람은 상징화를 통해 삶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다.

상징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내면세계와 인간관계를 끊임없이 발달시키며, 현재 눈에 보이는 현상을 다른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만일 중간 대상 경험이 부재하여 상징화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

도널드 위니캇(Donald Winnicott, 영국 아동정신분석가)은 그런 사람은 '구체적 현실'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구체적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은 언뜻 듣기에 매우 좋아 보인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현실을 매우 계산적으로, 그리고 이기적으로 해석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그는 '소탐대실'하게 된다.

그는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작은 일에 집착한다.

그는 눈에 보이는 급한 일 해결하기에 바빠 늘 소중한 일을 놓친다.

그는 바이올린 전공자에게 "음악 한다고 무슨 돈이 되느냐?"라고 묻는 사람이다.

그는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을 왜 믿느냐?"라고 묻는다.

그는 결혼 조건으로 사랑이 아니라, 돈이나 혼수, 사회적 지위 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룟 유다는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자, 은 30냥을 받고 그를 대제사장에게 팔아넘긴다.

이런 사람은 세상을 상징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현실화시켜야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버지와 아들]에서 니힐리스트인 바자로프는 자신이 오딘초바를 사랑하는 것조차 일시적으로 육체적 욕망에 휘둘린 것으로 여기면서 스스로에게 분노한다.

바자로프는 '사랑'이라는 '관계 상징성'을 인정하지 않고, 육체적 욕망이라는 구체적 현실로 돌아와서 자신의 사랑을 비하한다.


니힐리즘은 자기 비하의 산물이다


자기애적 성격 장애나 경계선 성격장애는 최소한 자기 존중은 있다.

자기애적 성격 장애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중을 받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한계가 있어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다.

경계선 성격 장애자는 자기 존중이 너무 지나쳐, 오로지 자기 자신만 의로운 천사이고, 자신을 떠나는 사람을 배신자로 낙인찍으며 악한 마귀로 형상화한다.

반면, 니힐리즘은 대상도 소중하지 않지만 나 자신조차도 경멸한다.

니힐리스트는 상징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대상도 나 자신도 비하한다.

그래서 그들은 삶을 늘 허무하고, 공허하다고 표현한다.

니힐리즘이 무(nothing)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니힐리스트는 내면 안에 늘 죽음의 추를 달고 다니는 것 같다.

그래서 바자로프는 늘 죽음 가까이 있는 사람 같이 보인다.

그의 그런 마인드는 현실화된다.

그는 장티푸스로 죽은 농부를 의사가 해부하는 작업에 참여했다가 실수로 상처를 냄으로써 장티푸스 균에 감염되었다.

결국 그는 장티푸스 균에 감염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니힐리스트는 나 자신을 함부로 대한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뿐 아니라 자기 몸에 대해서도 책임감이 없다.

그래서 니힐리즘은 그 사회의 수준을 드러내는 도덕성이나 개인의 품위를 보여주는 윤리마저도 부정한다.

파벨과 바자로프의 논쟁에서도 바로 이런 점들이 부각된다.

파벨은 자기 몸에 대한 책임감은 높이 고양되어 있으며, 누가 봐도 그에게서 품위를 느낄 수 있다.

파벨의 내면의 도덕성과 윤리 그리고 외모에서 풍겨 나는 품격은 남다르다.

이에 반해 바자로프는 자신의 몸의 소중함을 망각하여 의사로서 최소한의 방어장치도 없이 수술에 참여하여 장티푸스 균에 감염된다.


니힐리스트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시제로 사는 것이 아니다.

니힐리즘의 뿌리인 과학적 실증주의는 현재의 감각 경험과 실증적 검증을 토대로 확실한 지식으로 여기는 것처럼, 니힐리즘은 과거의 지식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

먼 미래에 있어야 할 죽음도 니힐리스트에게는 현재의 시점에 늘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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