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자와 파동(7); 권력, 관계 그리고 예술

모든 것은 입자이자 파동이다.

모든 물체가 가진 고유 파동


양자 물리학에서 모든 물체는 고유한 파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되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사람이나 동물, 물, 나무, 풀, 철과 같은 자연물뿐 아니라, 플라스틱이나 비닐 같이 사람이 만든 물질도 모두 파장을 가지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 외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 언어 등에도 파동이 있다고 한다.

이것을 언령이라고 한다.


최광진 미학교수는 감정이나 사념에서도 파동이 있고, 고유한 에너지가 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파동이 높은 사람이 있고, 파동이 낮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것은 사람마다 진동수가 다르다는 말이다.

파동이 높은 사람은 긍정적이고, 밝고, 활기차며, 자신감이 넘친다고 한다.

반대로 파동이 낮은 사람은 어둡고, 부정적이며, 의욕이 없고, 자신감도 없다.

그런 사람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표정은 화난 얼굴이다.

파동이 높은 사람은 좋은 상태, 파동이 낮은 사람은 나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동일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상태에 따라 파동이 변한다.

어느 순간에는 높은 파동을 발산하던 사람이 어떤 계기로 풀이 죽거나 자신감을 잃어 낮은 파동을 발산하게 되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것이다.

평소 파동이 낮던 사람이 마음을 다잡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즐겁게 살게 되면서 높은 파동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양자역학과 공간권력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공원에 혼자 있는 사람에 대한 예를 다음과 같이 든다


공원에 혼자 앉아 있을 때 그 공간에 대한 권력은 내가 쥐고 있지만, 타자가 나타나는 순간 공간에 대.

력은. 반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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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 나타난 타자를 입자로만 보면, 그 사람의 거리와 그 사람의 인상, 그가 가진 힘과 권위가 중요하게 여기게 되면서 내가 그를 무시할만한 살마인가 아니면 두려워해야 할 대상인가를 판단하게 된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나타난 타자를 파동으로 느끼기 때문에 그 공간에 대한 권력을 반분하게 된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무도 보이지 않으면 내가 노래를 부르건 춤을 추건 무슨 짓을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 거리 공간에 대한 권력은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집으로 가는 길에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달동네이지만 살기에는 그렇게 쾌적할 수가 없다.

서울에서 가장 살기 좋은 아파트라 여긴다.

왜냐하면, 바로 옆에 산이 있고, 아파트 중앙에는 넓은 운동장(사람들이 조기 축구를 하는 것이다), 1만 평가량의 공원이 있으며, 내가 사는 동 뒤에는 2000 평 가량의 소운동장이 있다.

그리고 아파트 주변에는 마치 벨트를 두르는 듯한 넓고 긴 공원이 있다.

어느 날 밤, 이 공원을 지나가는 중에, 어떤 청년이 길목에서 서서 소변을 보는 것이 아닌가?

내가 지나가면 미안하기라도 할 텐데 아랑 곳 하지 않고 노래 부르며 자기 볼 일만 본다.

그래서 내가


"이봐요, 청년! 여자들도 왔다 갔다 하는데 기본적인 공중도덕은 좀 지키지?"


그랬더니, 이 청년은 자기 볼일을 다 보고 나를 향해 뛰어 오면서,

"내가 무슨 짓을 하건,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하며, 되레 내게 호통을 친다.

그래서 바로 옆에 있는 파출소로 데려가서 이야기하자고 하니, 또 순순히 따라 오길래 경찰들이 그에게 훈계하는 것으로 끝내도록 내가 종용하며, 사태는 마무리된 적이 있다.



인간관계, 입자냐 파동이냐?

그 청년은 공원의 공간에 대한 권력을 혼자 쥐고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입자로 본 것이다.

내가 기분 상해서 한마디 하고 지나간 것도, 그 청년이 나를 파동으로 의식하지 않고 입자 취급한 것이었다.


고대 로마 시대, 귀족들은 부부관계를 할 때 노예를 옆에 세워놓는다.

그 노예는 물 항아리를 들고 있어서, 주인이 부부관계를 하는 동안 목이 말라 물을 달라 하면 언제든지 달려가서 물을 공급한다.

<스팔타크스>라는 연속 드라마를 보면, 심지어 부부관계를 하는 중에 아내가 지치니까, 옆에 있는 여종에게 옷 벗고 올라와서 자기 대신 성관계를 마무리하라는 명령 한다.

여종은 서슴지 않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여주인 대신 성적 대상 역할을 대신한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면, 당시 노예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집안의 소유물에 불과했기 때문에, 물건취급을 당한 것이다.

말하자면, 로마 귀족들은 노예를 파동으로 보지 않고, 입자로 본 것이다.


이런 일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어릴 때부터 상처가 많은 사람이 성인이 되어 권력을 쥐면 반드시 갑질하기 마련이다.

남자들이 그런 꼴값을 제일 많이 떠는 곳이 바로 군대이다.

신병 때 선임에게 그렇게 당한 후, 자기가 선임이 되면 그대로 되갚아주거나 그 이상의 갑질을 할 때, 그 선임은 후임을 파동으로 보지 않고 입자로 보게 된다.


나는 그런 일을 대학원 박사 과정에서 당했다.

나는 지도 교수님이 은퇴하자 그 아래 후임 교수들의 은퇴한 교수님에 대한 보복이 그 제자에게 쏟아붓는 장면의 현장 피해자이다.

강의할 때 교수와 논문심사할 때 교수는 완전히 다른 인격이었다.

나는 그렇게 입자 취급당하는 것에 대해 항의를 하였고, 그 항의는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나는 내가 주제로 잡은 분야의 전공하신 외부 교수님에게 직접 지도를 받겠다는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그분은 나를 입자로 대하지 않고 파동으로 대하면서도 논문지도를 철두철미하게 해 내셨다.


가족 관계에서 입자와 파동


앞의 글에서도 강조했지만,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입자과 파동의 차이와도 같다.

유교에서는


남자는 하늘이요, 여자는 땅이다.


라고 가르치지만, 양자물리학적으로 보면, 정반대라는 사실이 확인된다.

여자는 높은 주파수를 가지고 있어서 하늘의 진동수를 가졌고, 남자는 낮은 주파수를 가지고 있어 땅의 진동수를 가지고 있다.


남자는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여자는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신혼 초, 남자는 입자이기 때문에 아내가 파동인 줄 모르고 입자로 생각하여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입자로 만들어가니까, 아내 스스로도 자신이 입자인 줄 알고 남편의 의도에 맞춰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남자는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사회적 페르소나를 뒤집어쓴 채 만나는 사람들이 거의 입자적 대상들이다.


그렇지만 아내는 집에서 주어진 생활비를 가지고 어떻게든지 경제적 효율을 극대화시켜 보려고 온갖 노력들을 다 한다.

아내는 집안의 일을 관장하면서, 사물을 조작하여 변형시키고, 새롭게 창조해 내는 능력을 터득해 간다.

아내가 그런 세월을 10년, 20년 살다 보면, 자신이 입자적 존재가 아니라 파동적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 간다.


보통 아내는 남편 앞에서는 입자적으로 살지만, 그 이면에서는 파동적으로 살아간다.

그러는 중에 자신만의 고유한 주파수를 발견하게 되고, 그 주파수로 존재하는 동안 자신의 진동수가 예전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발견을 통해 남편과 아내의 존재 격차는 9배 이상 벌어지게 된다.


남편은 과거-현재-미래를 아우르는 안목을 가지고 아내와 자녀들을 지배하려고 하지만, 중년 중반을 넘어가는 어느 순간 가족들이 각각 자기 모양대로 가장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남편은 큰 입자 알갱이로서 입자적 삶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갈수록 뼈저리게 느껴 간다.

어느 순간 보니, 아내와 자녀는 한 패가 되었고, 혼자 고립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부부가 오래 살 수록 더 가까워지거나 더 깊은 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런 부부도 분명히 있지만, 그런 부부의 특성을 잘 파악할 필요가 있다.

부부 관계가 입자의 관계에서 파동의 관계로 넘어온 경우 그렇게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남편의 깊은 자기 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한다.

대부분 무늬만 부부일 뿐,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정서적으로 남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남편이 입자에서 파동으로 넘어오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에 있는 여성성이 페르소나를 끌어내려야 한다.

그래서 여성성을 가지고 아내의 여성성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부부가 과거-현재-미래를 here-and-now로 그때그때 분화할 수 있게 된다.


모두가 입자이자 파동을 가지고 있다


알고 보면, 모든 입자는 곧 파동이다.

또, 모든 파동은 입자다.


화가가 영감이 떠 올라 그림을 그릴 때, 그 영감은 파동의 형태로 떠오른다.

그런데 그 영감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낼 때, 그 그림은 파동이 아니라, 입자다.


화가의 그림이 완성되어 전시될 때, 그 그림을 입자적 마음으로 바라보면 각종 색깔을 가진 물감이 이리저리 어우러져 하나의 그림이 되었다고 감상할 수 있다.

몸 안에 파동이 넘실대는 감상자가 그 그림을 볼 때, 그 그림에서 굽이쳐 나오는 파동을 느끼면서 자신의 파동과 만나 공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악보를 보고 연주하고자 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처음 보는 악보를 악기로 읽어낼 때는 그 악보와 그 연주는 입자에 불과하다.

악보를 그려진 대로 악기를 잘 연주하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는 이제 그 곡은 연주자의 노래가 되면서 자기 음악을 만들어내게 된다.

악보는 그 자체 입자에 불과하며, 그 악보를 다 익히는 과정 또한 입자적 연습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악보를 다 읽어내고 연주자 자신의 감정을 실어 악기를 통해 내 노래를 부르게 될 때, 그 연주는 파동으로 대중들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때 전달되는 파동은 연주자의 고유한 존재로서의 파동이다.

그 고유한 파동이 청중 각 개인의 파동을 일깨운다.

파동과 파동이 조화를 이룰 때 공명이 일어나며, 그때 연주자의 연주를 통해 감동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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