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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무의식과 세대 간 양육

유아와 집단 무의식


사람은 태어나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유아는 의식이 없어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갓 태어난 아기는 의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기는 선조들이 전해준 무의식의 층에 선재적 지식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런 이유로 아기는 어머니의 젖을 찾는 법을 어떤 사람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고 있고,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적 생각으로 어머니의 젖을 찾을 수 있다.


아기는 젖을 먹으면서 그 맛이 좋다고 여기고, 어머니의 젖가슴에 애착을 느낀다.

이는 그의 혀의 미각과 입술의 쾌감, 그리고 뇌의 자극 등을 동원해 '이 젖은 맛있으며, 이 젖을 먹어야 내가 살아갈 수 있다'는 종합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아기가 선조들로부터 무의식적으로 받은 지식과 결합하여 형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태어남과 동시에 가지게 되는 선대의 지식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온갖 경험과 지식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태어나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선대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어떤 수준의 이해력과 인지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잃은 것을 다 찾으니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사람은 자신의 일생일대의 업적을 이루고, 환경적 한계와 관계적 콤플렉스를 극복한 결과,


"이제 모든 것으로부터 좀 자유로워지니 딱 나이 80이네"


하며 아쉬워한다.

오랜 세월 살면서 세상이 주는 난관과 관계적 어려움들을 다 극복하여 자유롭게 살만하고 그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싶지만, 이제 죽음이 코 앞에 다가와 있다.


이런 말도 있다.


"남자는 철들면 죽는다"


남자는 철이 들지 않으면 죽을 수도 없고, 철들었으면 남은 세월 성숙한 삶을 즐겁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데 철이 들었기 때문에 이제 죽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왜 인생이 완숙해질 때 하필이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느냐고?

오랜 세월, 결핍과 상처와 아픔과 미성숙함으로 힘겨운 인생을 사느라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는데, 이제 그런 것에서 자유로울 나이가 되니 더 나은 삶을 즐기는 기회를 남겨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밥으로 제공하고 만다면 과연 억울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

부모가 한계극복, 상처 치유, 콤플렉스 극복을 위해 노력해 왔다면, 그것은 자녀에게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반면, 부모가 그런 노력을 해 본 적이 없이 천박한 삶을 살았다면, 그 자녀는 자신의 길을 가기가 그만큼 어렵다.

그렇지만 부모가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중에 다양한 길을 찾아 나서는 중에 자기 길을 갈 수 있었다면, 그만큼 그의 자녀들이 자기 길을 가는 데에는 많은 장애물을 제거해 주게 되어 부모보다는 덜 고통받는 인생을 살게 된다.


나의 세대를 살면서 내가 행하는 이런저런 노력들은 나 혼자만을 발전을 위한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세대를 발달케 하는 역할을 한다.

내가 발달하는 만큼 나의 세대가 발달하고, 그 결과 자녀들은 그 발달을 바턴터치하여 자기 자신의 발달과 자기 세대의 발달을 위해 애쓰게 될 것이다.

나의 발달과 세대를 위한 헌신은 자녀 세대에 전달될 것이고, 나이 80이 되어 깨닫는 자유함과 온유함과 혜안은 손자손녀 세대에게 전달될 것이다.


나의 자녀들이 사고하고 판단하며 감정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 내가 그 나이 때에는 꿈도 꿀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이것은 자녀들 자신의 노력과 시대의 변화도 한몫을 하겠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부모인 우리 세대 사람들의 극진한 노력과 한계극복의 영향력임에 틀림없다.

나의 모든 경험이 자녀세대에, 그리고 손자손녀 세대에 집단 무의식의 형태로 전달되어 그들이 우리보다 나은 삶을 살아간다면, 내가 터득하게 될 노년의 지혜를 버리고 이 세상을 마감한다 해도 그리 아까운 것이 아닐 것이다.


나의 세대에서 <잃은 것을 찾는 노력>이 다음 세대에서는 <얻는 것을 갖는 힘>이 될 것이다.

그러니 늙음이 오는 것도, 일평생 터득한 지혜를 떨쳐 버려야 하는 것도, 그리 아까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나의 목적지는 나의 기원을 발견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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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Eliot의 시 [Four Quartets]에서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있다.


We shall not cease from exploration

And the end of all our exploring

Will be to arrive where we started

And know the place for the first time.


우리는 탐험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탐험은

우리가 시작한 곳에 도달해서

그곳이 어디인지 알게 될 때 끝나게 될 것이다.


이 구절을 보면, 인생의 목적지에 도달하면 결국 나의 기원인 탄생을 목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성경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 18:3)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연상케 한다.


80대가 된 피카소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내가 라파엘처럼 대가의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4년이 걸렸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데에는 평생이 걸렸다."


지혜자는 어린아이가 되어 가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이제 모든 것으로부터 좀 자유로워지니 딱 나이 80이네"


라는 말은, 결국 지혜롭게 80세가 되면 완악함과 고집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어린아이의 유연함과 지혜자의 온유함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자신의 자식들에게는 주지 못한 것들이다.

격세대 합동의 원칙에 의해, 한 세대를 건너 손주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것이다.

손주들은 조부모를 통해 물려받은 유연함과 온유함을 가지고 자신의 부모들의 완고함을 저항하고 갈등함으로써 결국 자식 세대를 손주 세대에 의해 새로운 형태로 양육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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