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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무의식(2): 집단무의식과 거듭남

성화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야 한다

집단 무의식에 너무 노출됨


"우리나라는 집단 무의식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

"우리나라 교회는 집단 무의식에 너무 노출되어 있다."


집단 무의식은 혁신과 창의성의 원천이며 끊임없이 독특한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아이디어와 솔루션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바로 집단무의식 영역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집단 무의식은 개인에게 개인적인 한계를 초월하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개인은 집단 무의식과 연결되어 방대한 집단 지식 풀을 활용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파악하기 어려운 통찰력과 관점에 접근하기 힘들 수 있다.

집단 무의식이 영향력을 행사할 때 개인과 사회 전체는 동기 부여의 급증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동기 부여의 물결은 공동체의 집단적 꿈, 열망, 공유 가치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이는 개인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장애물을 극복하며 위대함을 달성할 수 있게 해주는 심오한 에너지를 전달한다.

집단 무의식에서 나오는 동기 부여 힘은 개인적,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고 발전과 사회 진화를 주도할 수 있다.


개인의 능력과 집단 무의식


집단 무의식은 변화를 위한 강력한 촉매제가 될 수 있지만, 변형 효과는 그 내용이 개인의 의식적 성격에 통합되는 데 크게 좌우된다.

집단 무의식의 변형 잠재력을 활용하려면 개인은 그 내용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개인이 참여하는 이 과정에는 무의식에서 나타나는 꿈, 상징, 원형을 주의 깊게 조사하는 성찰적 여정이 수반된다.

이러한 요소를 의식의 최전선으로 가져옴으로써 개인은 자신과 주변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자기 성찰은 개인의 성장을 가능하게 하며, 개인과 집단 무의식 사이에 공생 관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공생관계없이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개인의 영향력을 펼치는 데에 쉽게 한계를 느끼게 된다.

개인은 탁월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어도, 집단 무의식의 도움이 없다면 혼자 능력 있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다.


내가 신입사원 시절, 한 부서에 두 개의 과가 있어 한 명의 부장 밑에 두 명의 과장이 있었다.

내가 모시던 과장은 별로 능력은 없으나 그 능력을 널리 널리 펼쳐 나가는 데에 매우 유능했다.

1의 능력을 가지고 10을 가진 것처럼 확장시켜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과장이었다.

다른 과장은 10의 능력을 가졌지만 그 능력을 전개해고 업무에 활용하는 능력은 1에 불과했다.

그러면 회사 경영진이 특수 업무를 맡기기 위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을 선발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회사는 고민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두 가지 선택 모두 위험을 안고 있다.

현상적으로는 전자가 훨씬 쓸모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분화시켜야 할 집단 무의식

바람직한 것은 개인의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고, 집단 무의식을 활용하여 그 능력을 상황에 맞게 극대화시킬 수 능력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개인의 능력과 집단무의식의 능력이 너무 갭이 생기면 반드시 허점이 여기저기서 생겨날 수 있다.

왜냐하면 집단무의식에서 오는 능력은 본질적으로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 격차를 해소함으로써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다.

집단무의식은 어떤 계기를 만들어 내는 일이나, 새로운 동기부여를 하는 측면에서 탁월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것은 에너지의 양적인 측면에서 해일처럼 밀려오는, 스스로도 감당치 못한 에너지로 모아진다.

집단무의식의 작용으로 어떤 특별한 계기를 만든 후에는 개인의 의식적인 차원에서 집단무의식에서 일어난 과정을 분화를 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집단무의식의 차원에서 아무리 좋은 일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 올리든지, 또는 집단무의식적 내용들을 의식에게 개방함으로써 무의식의 내용들을 의식적 인격 속으로 통합해 내야 하는 것이다.


교회에서의 집단 무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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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교회의 부흥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

하나님은 개인적으로도 만나 주시지만, 부흥회에서 더욱 전격적으로 많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집단무의식의 부분을 활용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다.

사도행전에서, 오순절의 성령의 임재하실 때, 120 문도에게 임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집단무의식의 상황에서 집단의식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집단무의식의 형태로 나타난 이런 환경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근원적 체험은 집단 무의식 속에서 양적 체험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안주해 버린다.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으로 여긴다.

집단무의식의 형태로 양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건은 반드시 의식의 차원에서 질적이 모양으로 하나님을 내면화할 필요성을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거듭남


집단무의식 차원에서 만난 하나님은 마치 예수께서 니고데모에서 설명하신 성령의 모양으로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해서 설명하시면서,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

은 다 그러하니라” (요 3:8)


거듭남의 사건이 일어날 때 성령의 역사는 바람처럼 나타나서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바람이라는 것 자체가 군집성을 가지고 있다.

성령의 역사가 항상 이런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처음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날 때 성령의 역사는 바람의 모양이다.

바람은 곧 사라지는 것이다.

신앙이 집단무의식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처음 바람의 형태로 나타나신 성령을 뜨겁게 체험하면서, 성령의 바람 같은 역사는 사라지게 되는데, 그 사람은 계속해서 바람 같은 성령님만 찾게 된다.

즉 은사집회, 신유집회 등 능력이 나타나는 곳을 찾아다니게 된다는 말이다.

성령의 바람 같은 역사로 거듭남에 대한 체험을 하면서 구원의 복음을 들고, 그 안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지만, 성령의 또 다른 역사, 매우 개별적인 역사인, 기업의 보증이 되는 역할(엡 1:13-14)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성령의 바람 같은 역사를 통해 <거듭남>의 역사를 체험한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향성을 제시하고 계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

니라” (요 3:14-15)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십자가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매우 개별적 사건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모세가 돌판에 새긴 십계명을 선포하는 집단적 사건과는 분명 다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온 인류의 죄를 위한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집단적 사건이라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마 16:24) 사건이 극히 개인적인 사건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에 대한 분석심리학적 용어는, <개성화 과정>. 즉 성화의 과정이다.

성도는 하나님을 만나고, 거듭남을 체험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인격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철저하게 <성화의 과정>을 겪어내는 것이다. 성화의 과정은 곧 개성화 과정이다.


성화는 도대체 어떻게 이루어지나?


오늘날 기독교에서 성화를 많이 강조하지만, 성화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설교되고 있다.

<성화>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낼 수 있다면 그것이 성화의 완성인 <영화>에 해당된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말씀을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은 말씀의 완성자이신데 비해, 인간은 타고난 죄성 때문에 말씀을 지킬 수 없다.

내가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는 바리새인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그대로 지킬 수 있다고 문자적으로 행하다가 외식하는 자들이 되어 버렸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바리새인의 태도이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외식적인 방법으로 지키면서 율법을 다 행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저버리고 자기의를 드러내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바리새인의 실체를 폭로시킨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를 죽인 적이 없기 때문에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이미 형제를 살인한 것이라 선언했다.

바리새인들은 간음한 적이 없기 때문에 칠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여인을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라 선포했다.

바리새인들이 애써 쌓아 올린 행위의 탑을 순식간에 다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죽여야 되겠다고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성도의 목표


인간의 죄성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처럼 말씀을 지킬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지키는 것은 더더욱 우리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에베소서 4:13을 보면, 성도의 목표는,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 목표에 이르는 방법론으로 엡 4:14-15절에서 설명한다.


첫째는,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는 것과

둘째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에베소서 5장에 넓게 펼쳐져 있다.


그것을 정리하면,


첫 번째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이다(엡 6:8).

두 번째는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고, 남편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6;22-25).


엡 6:31-32에서는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성화, 가까운 생활 속에서 실천되어야


성화라는 것은 가까운 생활 속에서 실천하도록 되어 있다.

성화란, 지극히 관계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화란, 바로 가정에서 비롯되는 된다는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부부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영적인 관계가 현실화될 때 부부관계에서 실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가르치는 설교가 많다.


부부간의 사랑이 하나님 사랑보다 더 크면 우상숭배라고...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우상숭배라고...


물론 오늘날 자식에 대한 잘못된 사랑으로 자식을 엉뚱한 길로 이끄는 경우는 있다.

여기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칼 융에게서 배우는 성화의 과정


에베소서 6장은 두 가지 관계가 서로 유비관계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에베소서에서 제시하는 <성화의 과정>은 C. G. Jung의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개성화 과정>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칼빈의 영향으로 성화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과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성이 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인격의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중요한 사건임에 틀림이 없고,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격이 변화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인생이 향하는 삶의 방향성이 달라지고, 삶의 차원이 달라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격발달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인격발달은 하나님으로부터 과제로 주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 성품을 바르게 하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발달을 통해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자기 존재에 대해서 무지몽매했던 자궁 안에 있던 태아가 세상에 나와서 엄마를 만나는 것과 같다.

삶의 차원이 달라진 것이다.

엄마를 통해 자기 존재를 깨우쳐 가고, 삶을 터득해 가기 시작한다.

아기에게 엄마는 곧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다.

인격적인 만남은 바로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아 초기에는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자아의 영역이 미약하기 때문에 엄마에게 많이 의존하게 된다.

갓난아기의 상태에서는 의식이 부족하여 인식능력은 전혀 없는 상태인 반면에, 집단무의식의 상태에 있게 된다.

이 집단 무의식은 모든 인류가 그러했듯이, 태어나면서 인간적 요소들을 다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유아의 생존전략 프로그램이라고 볼 수 있다.

젖을 빨고, 엄마를 찾고, 울고, 몸을 움직이고 하는 모든 행태들은 집단무의식에 속한 것 중의 하나의 속성인 본능적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비록 미약한 갓난아기의 모양이라도 아담 이래로 자신의 부모의 대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삶을 얻기 위해 태어났던 모든 경험들을 다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양적으로 보면 엄청난 양의 집단무의식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 집단무의식은 자아가 발달함과 동시에 의식이 들어오게 되면서 그 자리를 내어주고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다.

누구나 유아가 발달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본능적인 반응과 의식적인 반응이 얼마나 다른가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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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발달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이 인격과 무관하게 발달해 간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신앙의 성숙은 곧 인격발달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머니의 자궁에 있는 것처럼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무지몽매한 상태에 있다가, 하나님을 영접하는 순간 그 사람의 인생에 엄청난 사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집단 무의식적 요소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오는 것이다.

이 순간은, 2000년 남짓 하는 기간 동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상황 속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주님을 만난 경험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오는 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이런 사건을 <거듭남>의 사건이라고 표현하신다.

바람의 군집성처럼 성령이 내 안에 확 밀려들어오는 하나님과의 근원적 체험은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 고백하기를 ‘제가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했습니다.’라고 말할 때, 듣는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어떤 것인가를 그 말 한마디로 다 알아듣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집단무의식에서 의식화되어 가는 과정을 남겨 놓고 있는 것이다.

집단무의식은 반드시 개별화 과정으로 분화되어야 한다.

성령체험과 같은 양적 은혜 체험은 반드시 질적 관계로 발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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