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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관계로 재현되는 초기 어머니와의 관계

가족들 간의 투사적 동일시

어떤 가족의 관계 갈등양상


내담자 L 은 남동생과의 관계가 매우 힘들다.

L은 남동생에게 누나로서 권위를 세우지 못한다.

남동생은 누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대화를 할 때 누나를 먼저 제압해 버린다.

옆에 있는 누가 봐도 애처로울 정도도 누나는 남동생에게 당하고 만다.

남동생은 주변에 누가 있건 없건 상관하지 않고 누나를 묵사발을 만들어 버린다.


별로 중요한 주제가 아님에도, 또 그렇게 열을 낼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시작되는 순간 남동생은 누나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고, 이미 얼굴이 흥분되어 있다.


L은 남동생에게 뭔가 의견을 제시하고자 하면, L이 가진 에너지보다 10배 정도의 에너지로 강하게 밀어붙여 L은 그 순간 말문이 닫히고 만다.


L은 남동생에 대해


"내 이야기를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는 태도가 나를 괴롭게 만든다"


고 말한다.

게다가 L은 누나로서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도 있고 하니까 참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L은 남동생의 그러한 태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L 자신이 아버지에 대해 불만이 있을 때 남동생이 자신에게 하는 방식으로 아버지에게 쏟아낸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에 대한 그러한 태도도 알고 보면, L이 성인이 되기 전에 아버지가 자신에 대해 해 왔던 방식이라는 점도 자각했다.

아버지가 아내에게 당했던 것을


L이 남동생과 대화를 할 때마다 상처를 받으니까, 자신이 아버지에게 어떤 상처를 줬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속담처럼, L은 남동생에게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열 마디의 비난으로 되돌아오는 압박을 받을 때마다 노래를 부른다.

그러면서 L은 자신이 어릴 때, 어머니에게 혼날 때 감당할 수가 없어 노래를 부른 것이 생각났다고 한다.


어머니와의 관계를 반복하는 가족들


나는 L의 가족관계 중심에는 유아기 내지 아동기에 경험한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어머니는 L과 남동생에 대한 차별과 편애가 있었다.


어릴 때 이후 성인이 되기까지 L과 남동생 사이 눈에 띄는 차별로 인해 어머니가 남동생에게 일방적으로 싫어 준 힘, 남동생은 누나에게 그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반면, L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당했던 무시와 차별, 심지어 멸시까지 당했다.


그런 무시, 차별, 멸시는 항상 남동생에 대한 어머니의 일방적인 편애에 기인하였다.

지금 남동생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은, 어머니가 남동생에게 그동안 실어 준 힘에 밀리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한 증인이 있다.

그녀의 이모다.

이모가 L에게 전해 준 이야기는 L 로서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딸년이 건방지게 따지고 든다."


이 말을 전해 들은 L로서는 감당할 수 없어 며칠 동안 무너져 있었다.

L은 어머니가 자신에게 그런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L 이 이모에게 물어보니, 그때는 L 이. 5~6살 때의 일이라고 한다.


이모는 L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


"네가 엄마한테 미움을 받았던 것은 아마도 나 때문일 수 있어. 나는 어린 네가 질문을 해 오면, 그 질문에 관해 상세하게 설명을 다 해 줬거든. 그런데 너는 어떤 의문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못했어. 그래서 나는 네게 더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이해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했어. 나도 어릴 때부터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못했거든.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네 엄마와는 엄청 싸우기도 했어. 너는 네 엄마보다 나를 닮은 것인데, 네가 어릴 때 엄마보다는 내가 너와 항상 같이 있었거든... 그래서 너는 내가 옆에서 그런 역할을 해 줬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네가 엄마에게 꼬치꼬치 묻고 이해받으려고 했던 거야."


어머니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형태의 투사적 동일시


L의 가족은 각자 유아기 아동기에 경험했던 어머니와의 관계를 각자의 상황에 맞게 반복하고 있다.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이지만, L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 번도 갈등을 겪어 본 적이 없다.


대개 딸은 심리적으로 어머니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와 갈등을 겪고 싸워내야 한다.

그렇게 모녀관계는 분화가 되어야 마땅하지만, L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까지 한 번도 저항해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남동생의 내면에 나를 미워하는 어머니가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이다.

남동생이 어머니의 태도를 그대로 물려받아 내게 힘으로 행사하는 것은 남동생과 어머니 사이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남겨 둔 정서 덕분이다.


L은 어머니와 갈등을 겪은 적이 없지만, 지금 남동생과의 일방적인 관계에 저항하고 갈등을 겪어냄으로써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와 싸울 수 있고, 자신 안에 내면화된 채 억압하는 어머니를 몰아낼 수가 있게 된다.


동생이 누나에게 그런 힘을 행세하는 것도 두 남매가 각자 어머니와 맺었던 관계경험을 투사적 동일시를 통해 재연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딸인 L을 무시했듯이, 남동생이 어머니의 태도로 누나를 무시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L은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머니가 살아계시는 동안 자신을 무시하고 편애했던 태도를 그대로 투사적 동일시의 형태로 드러내는 남동생과 싸워냄으로써 자신 내면에 극복하지 못한 살아생전의 어머니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L은 어머니와 남동생에게서 받은 억울함을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대신 풀어내고 있다.

이것 또한 투사적 동일시에 해당한다.

평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행사했던 태도를 L이 남동생 안에 각인되어 있는 어머니의 폭력적인 모습을 투사적 동일시로 당해 왔던 것을 그대로 복사해서 아버지에게 행동화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로서는 아내가 살아있는 동안 해결하지 못한 채 내면화되어 있는 심리적 관계를 딸을 통해 재연하는 효과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모의 등장 또한 어머니와의 관계를 투사적 동일시로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 한다.

L이 어머니에게 미움을 받았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모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이모가 평소 해결하지 못했던 관계를 조카인 L과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드러나게 만들었다.

어머니가 L에게 "딸년이..." 운운했던 것은 바로 자신의 여동생과의 관계에서 해결하지 못한 불만을 자신의 딸에게 퍼부은 것이다.


왜 투사적 동일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가?


투사적 동일시는 일상 속에서 24시간 작동할 수 있는 정신적 기제이다.

투사적 동일시가 원시적인 형태일수록, 즉 유아기에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것일수록, 그 사람은 그 형태가 패턴화 되어 살아가는 동안 만나는 여러 관계 속에서 반복해서 나타난다.


어떤 경우는 정말 나답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된다거나, 상황에 맞지 않고 비현실적인 판단을 하게 되어 후회하게 된다거나, '나는 왜 이런 상황이 되면 이런 생각밖에 못할까?'하며 늘 후회하는 상황을 지속적으로 맞닥들인다거나, 관계에 늘 실패를 자기 예언하고 있다거나 하는 등은 대개 원시적인 투사적 동일시일 수 있다.


이런 패턴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작점이 바로 '그것이 투사적 동일시로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두번 자각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분석해 줄 수 있고 그 상황을 투사하여 동일시 해 줄 수 있는 대상, 즉 상담자가 필요하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이러한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해석을 해 주는 것보다, '이것이 투사적 동일시다'라고 해석해 주는 것보다,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투사하여 동일시하고 있는 부분을 상담자는 내담자가 동일시하고자 하는 바를 투사한 것을 받아서 내면화하여 스스로의 상황으로 소화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상담자가 이를 소화해 내면, 내담자에게 달리 해석해 주지 않아도 내담자의 내면이 발달해 간다는 사실이 상담자의 눈으로 확인된다.

이것이 바로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자신의 상황을 투사하여 동일시한 효과이다.


안타까운 점은 이런 일은 상담상황에서 수시로 일어나고 있지만, 상담자가 투사적 동일시 개념을 몰라 그냥 지나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이런 상황은 꼭 상담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일상에서 24시간 동안 일어나는 것이 투사적 동일시이다.


투사적 동일시라는 말이 너무 어려우면, 상호간의 '정서적 호흡'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강혜정 박사는 투사적 동일시에 관한 자신의 박사논문을 [투사적 동일시, 너를 들이쉬고 나를 내쉬다]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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