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 환상 체험과 투사적 동일시
갓 태어난 조차도 지각이 없는 것이 아니다.
유아는 집단 무의식으로 가득 차 있으며, 집단 무의식은 끊임없이 상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유아는 '환상'의 방법을 통해 지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시기에는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의식이나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이 없지만, 환상의 방법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인식하고 조직화한다.
일종의 '무의식적 환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아에게 자아가 발달하기 전, 의식이 들어오기 전, 뇌가 구조화되기 전에는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다.
객관적 사실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생성하지 못하는 구조에서 그러한 환상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환상은 뇌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몸은 무의식이다'라는 명제를 제안했다..
그런 의미에서 환상은 뇌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몸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성인들도 언어를 내려놓으면 환상의 영역을 활성화한다,
이것이 바로 꿈의 세계이다.
아이의 환상은 처음에는 내면의 집단 무의식적 욕망을 활성화하지만, 발달함에 따라 외부 상황을 인식하는 형태를 취하고 쌍방향 상호작용을 일으킨다.
아기는 이 양방향 상호작용을 통해 집단 무의식을 점차 개별화한다.
집단 무의식 영역 안에 나의 고유한 영토를 만드는 것이다.
거기서 집단적 지각으로부터 개별적이고 독특한 지각을 만들어내어 자신의 내면에 저장한다.
내부적으로 개인화된 환상은 특히 어머니의 보살핌 측면에서 아이가 표현해야 하는 내재적 본성을 활성화하는 데 얼마나 잘 작동하는지를 마음속에 기록해 놓는다.
엄마의 보살핌과 엄마 품에 안긴 아기 사이의 상호 작용에서 나오는 친밀감 밀도는 인과 관계를 형성하고 정동의 무드를 만들어 낸다.
엄마와 아기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 사이의 수직적 관계다.
이 수직적 관계가 경직되고 불균형해지면 어머니와 유아 사이에 사용되는 투사적 동일시라는 원시적 방어 기제가 공감능력으로 발달하지 못하고 원시적인 상태 그대로 남게 된다.
투사적 동일시가 원시적 상태 그대로 구조화되면서 현실을 그 구조 속에서 재구성한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원치 않는 일, 상황, 관계 등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면서 스스로 하나의 패턴을 가지고 있구나 싶을 때, 그것은 원시적인 투사적 동일시가 작용하여 만들어낸 상황들이다.
건강한 어머니는 수직적 관계에서 투사적 동일시를 사용하면서 공감의 형태로 바꿔내어 아이의 존재를 존중한다.
그런 아이는 어머니의 공감적 사랑을 배경으로 스스로 보다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면서 미래를 위한 창조적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다.
유아의 환상은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 목표를 향해 외부 상황을 자신의 고유한 내러티브를 만들어 낸다.
이 내러티브의 단기적 목표는 <전능환상체험>이다.
유아기 환상은 기승전결을 가지고 있다
기승전결이 진행되면서 가장 정점에 있는 클라이맥스는 전능환상을 통한 나의 동일성 확보이다.
유아는 어떻게 전능환상체험을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가장 적절한 답변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도널드 위니캇(Donald Winnicott)이다.
일차적 모성몰두
일차적 모성 몰두에 대해서는 여러 글에서 서술해 왔기 때문에 간단하게만 언급하고자 한다.
아기가 태어나면 완전히 에너지 덩어리이면서, 동시에 어머니의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은 상태이다.
아기는 자신의 생각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어머니가 대신 생각하게 만든다.
아기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에 어머니로 하여금 아기의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아기는 요구하는 것이 많아 요구를 생각만 해도 건강한 어머니는 그 생각을 미리 알아채어 아기의 필요를 채워준다.
아기는 투사적 동일시를 통해서 자신의 원하는 생각을 어머니에게 심어준다.
건강한 어머니도 역시 투사적 동일시를 통해 아기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들어준다.
어머니는 아기의 요구에 집중하고 존재의 상태를 공감하기 위해 현실성에서 떠나 오로지 아기에게 '미친 상태'가 된다.
아기는 '젖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신호를 보낸다.
아기가 원할 때마다 어머니는 그때그때 자신의 젖가슴을 아기의 입에 갖다 댄다.
이런 일이 반복되어 수백 번 수천 번 경험하면, 아기는 모종의 착각 상태에 도달한다.
"내가 젖가슴을 창조했다"
이것이 유아의 요구에 집중하여 유아로 하여금 전능환상을 체험하는 상태에서 아기가 가지는 자기 확신이다.
이 확신은 만 1세가 되면서, 자기 존재의 동일성을 확보하게 해 준다.
아기가 동일성을 획득할 때 아기의 존재는 진정으로 하나의 개체가 된다.
그때 아기는 자기 선언을 한다.
"나는 있다"(I am)
이 동일성을 확보한 아이는 일평생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나는 있다.'
그리하여 유아기의 나, 아동기의 나, 청소년기의 나, 청년기의 나, 장년의 나, 노년기의 나, 천국에서의 나, 부활한 후의 나를 확보한다.
이때 '나'는 불멸의 존재가 된다.
왜냐하면 '나는 있다'는 하나님의 이름이요, 하나님이 내가 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나는 있다'를 확보한다는 것은, 내 안에 신성을 확보하는 것이자,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육체는 죽어도 'I am'은 죽지 않는다.
유아가 전능환상을 충분하게 체험한다는 것은 어머니가 건강한 사람일 경우에 해당한다.
유아기에 누구나 전능환상을 체험할 기회가 찾아 오지만, 어머니가 돌봄을 제대로 해 주지 못하면, 전능환상을 체험을 완성할 수 없다.
전능환상을 체험하지 못하면, 전능한 사람을 이상화하여 그를 추종하든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전능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 과정에서 유아기에 완성하지 못한 환상이 작동하여 정서적으로 유아의 상태가 된다.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때는 누가 봐도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휘말리게 된다.
그 결과, 종교적으로 이상화 대상을 찾는다거나, 비현실적인 환상을 심어주는 다단계의 복잡한 상황에 휘말린다거나, 내가 스스로 전능자가 되기 위해 교주가 된다거나, 또는 그런 교주를 추종한다거나 하는 등의 일이 발생한다.
전능환상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과대주의와 과시주의에 몰두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거대한 것을 좋아하거나, 자신을 과장하여 허풍을 떤다거나, 명품으로 온몸을 발라놓는다거나, 높은 산을 좋아한다거나 등등 여러 가지 현상으로 귀결될 수 있다.
그들의 내러티브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들이 그런 비현실적인 여정을 걷는다고 해서 정신적인 방황이 멈춰지는 것이 아니다.
유아기에 어머니가 전능환상의 내러티브를 I am으로 완성시켜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늘 새로운 내러티브를 찾아 나선다.
새로운 내러티브는 결국 반복이자 패턴이다.
어떤 이단 종교는 전쟁으로 위기감을 조성하여 성도들의 심령을 빼앗는다.
북한이 6월에 쳐들어 온다고 한다.
6월이 지나도 전쟁은 나지 않지만, 또다시 9월 전쟁설을 주장한다.
9월이 지나도 전쟁이 나지 않았다.
웬만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면 두 번까지 속아도 세 번째는 속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아는 사람은 지금 10년째 계속 속고 있다.
왜 그들은 계속 속는가?
그들의 전능환상을 위한 내러티브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상에서 초기의 어머니와의 관계(때로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투사적 동일시 형태로 반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