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의 어원을 보면, ‘토피아’가 ‘땅’이고, ‘유’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담 하와가 살던 에덴동산이 사라지고, 프시케가 살던 낙원도 사라집니다.
낙원이 사라지는 것도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곳에는 꼭 하나씩 있는 뱀 같은 존재 때문이죠.
프시케가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 때도 그런 존재가 나타나게 되는데,
그들은 바로 프시케의 두 언니였습니다.
죽음의 신과 결혼하여 저승으로 간 줄로만 알았을 때는
동생을 잃은 상실감으로 슬퍼했던 언니들이 프시케가 저승은커녕 낙원에서 살고 있고,
그녀의 남편이 신이라는 소문이 자자해지자 시기심이 끓어올랐습니다.
그리하여 언니들은 프시케를 소환하여 프시케가 사는 낙원을 방문합니다.
언니들이 낙원에서 후한 대접을 받아가면서 좋은 구경도 하게 되죠.
그 와중에 언니들은 슬슬 시기심을 발동합니다.
프시케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게 되고 그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언니들의 첫 방문 때는 프시케가 자신의 남편이 갓 수염이 나기 시작한 젊은 사람이라고 했다가,
그 다음 방문 때는 남편이 머리가 희끗희끗해 지는 중년인데 세상사에 정통하다고도 말합니다.
프시케는 왜 그렇게 자기 남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를까요?
남편과 낙원에서 함께 살 조건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 것’과 ‘질문을 하지 말 것’에
약속한 바 있기 때문에 프시케는 남편에 대한 파악이 힘들었던 것입니다.
언니들은 프시케와 남편 사이에 벌어져 있는 그 틈을 이용하여 음흉한 계책을 꾸미게 되죠.
세 번째 나타난 언니들이 프시케의 남편은 흉측한 구렁이이며,
아기가 태어나면 프시케와 아기를 잡아먹을 것이라는 모함을 합니다.
그래서 언니들은 프시케가 괴물 남편을 죽이는 방법까지 가르쳐 줍니다.
비록 언니들이 시기심을 부렸지만, 두 언니에 의해 프시케의 의식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남편이 누구인지도 알게 되죠. 보통 여자들끼리 모여서 자신의 결혼과
남편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은 곧 프시케 언니들의 목소리들입니다.
프시케의 언니들은 이런 자리에서 활동합니다.
<아담과 하와 뱀>
프시케의 언니들은 프시케의 <그림자>입니다. <그림자>가 무엇일까요? 그림자는 두 가지 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 그림자는 가장 미운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에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할 때,
내가 미워하는 원수가 바로 나의 그림자(나의 이면의 인격)로 이해를 하면 원수 사랑하기가 쉬워집니다.
내가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짓을 저 사람이 하고 있으니까 미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어떤 판결을 내리는가를 시험하고자 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쳐서 죽이라고 판결하면 로마법을 어기게 되고, 살려주라고 하면 구약의 율법을 어기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딜레마에 빠졌을 때 ‘너희들 중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는 판결을 내리자,
나이가 든 순서대로 들고 있던 돌을 놓고 떠나갔다고 합니다.
그들은 바로 그 여자가 자신의 그림자라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마음 속 깊은 곳에 가장 하고 싶은 것이 ‘간음’이었던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의 내면에 있던 그림자가 그 여인에게서 보이자 돌을 놓고 그 현장을 떠나갔던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죽이고자 들었던 돌을 놓고 떠나는 순간, 그들에게는 의식의 확장이 일어난 것입니다.
프시케는 순진무구한 소녀입니다. 프시케의 그림자인 언니들은 그와 반대인 소위 까질 대로 까진 <날나리>들이지요.
이 두 부류의 사람은 완전히 다른 성격의 사람이 아니라, 상대방의 성격을 이면으로 가지고 있는 상반된 성격의 사람들입니다.
상대방의 미운 점이나 부러운 점을 나의 그림자 인격으로 인식하지 못하면
‘맨날 똑같은 타령’만 하면서 살아가게 되지만, 그림자를 인식하는 순간 발달하게 됩니다.
언니들이 나타나기 이전의 프시케는 남자를 만나도 그냥 순종적이어서 남자가 시키는 대로만 하는 여성이었습니다.
프시케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순응적으로 살아가는 히스테리화된 여성입니다.
히스테리 여성은 성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어 성적으로 무지합니다.
이들은 사춘기가 되어 몸의 변화가 일어나도, 급작스런 변화에 놀라거나 두렵기만 할 뿐,
성적인 호기심을 가지지 못합니다. 결혼한 히스테리 여성은 밤에는 남편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길 뿐,
자신의 몸과 성에 대해 스스로 주체가 되어 ‘나의 몸’과 ‘나의 성’이라는 개념을 갖지 못합니다.
정체성은 혼미하고 몸은 급변하지만 히스테리화되어 성적 개념은 닫혀 있는 상태의 프시케를 생각해 보세요.
성적 변화가 급격하게 다가올수록 감당할 수 있는 마인드가 적기 때문에
외적으로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언 듯 보기에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아름다움은 백치미 같아서 남자들의 시선을 차단하는 무의식적 노력을 동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프시케가 얼굴이 예쁘기까지 한다면 히스테리와 아름다움의 괴리는 혼자 감당하기 힘들게 됩니다.
히스테리적 아름다움을 가진 프시케는 결혼하고도 성적인 무지함 때문에
고유한 여성성을 사용하지 못하고 모성성을 사용하여 남편의 환심을 사게 됩니다.
모성성을 사용한다는 말은 아내가 어머니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편은 편하거든요.
이러한 프시케는 자신의 여성성을 포기하면서 살아가게 되죠.
이런 여자에게 필요한 사람은 날나리 땅콩 같은 언니들입니다.
모성성을 가지고 히스테리적으로 살아가는 한, ‘나는 누구인가?’를
알지 못한 채 여성적 정체성에 대해 무관심해 질 수 밖에 없답니다.
그때 바로 언니들 같은 날나리들이 나타나서 여성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어머니로 살아가기를 자청하는 프시케의 삶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어린아이고 노인이고 모든 남자는 예쁜 여자를 좋아합니다.
모든 남자들은 예쁜 여자와의 로맨스를 꿈꿉니다.
그러나 남자는 예쁜 여자의 얼굴의 사정만 밝지 치마속 사정은 잘 모릅니다.
예쁜 여성은 두 가지 사정 중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얼굴만 예쁘고 성적으로는 자라지 못해 어린아이 상태인 여성의 아름다움은 백치미에 불과한 것입니다.
두 번 째는 얼굴이 예쁘면서 히스테리는 아닌, 날나리 여성의 경우입니다.
날나리 여성은 성적인 매력도 나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날나리 여성도 외형적인 아름다움에 걸 맞는 정신적 내용이 없어 정서적으로 빈곤한 상태에 있을 뿐입니다.
외형적 아름다움과 정서적 빈곤 상태의 괴리가 큰 여성일수록 외로움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2000년대 이전에만 해도 남자들은 예쁘고 히스테리화된 여자를 좋아했습니다.
그것은 남자들의 이슈와 연결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유교적 문화가 짙은 부모님 슬하에서 자란 흔적이 있어,
남자들은 백년회로 할 여성을 찾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자는 안정감을 주는 여자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래서 엄마 같은 여자, 성적으로 민감하게 발달하지 않은 히스테리화된 여자를 선호했습니다.
그때는 프시케가 성적으로 진화할 필요가 없었으며, 자신이 살아온 모양대로 삶의 형태를 유지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여성을 소위 <현모양처>라고 부르죠.
이때만 해도 현모양처형의 여자가 결혼시장에서 주가가 높았습니다.
그런데 2000년을 넘어서면서 결혼시장의 주가 흐름은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순진무구하던 프시케는 히스테리를 벗고 깍쟁이로, 날나리로 진화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혼시장의 변화는, 유교 문화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현모양처가 아닌 로맨틱 러브를 꿈꾸는 세대로 탈바꿈 하게 만들었습니다.
다행히도 신화 속에 프시케는 날라리 언니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자신의 남편이 누구인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에로스와 프시케와 함께 살게 되는 조건은 프시케가 밤늦게 들어오는
에로스의 얼굴을 보지 않는 조건이었습니다.
언니들은 ‘네 남편이 흉칙한 구렁이일지 모르니 등불을 들고 확인 후,
칼로 머리를 잘라 버려라’는 충고를 받아들여, 등불과 칼을 준비했습니다.
등불로 잠자는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을 때,
프시케는 올림포스에서 가장 잘 생긴 에로스 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언니의 말만 듣고 남편을 의심하였던 프시케가 죄책감이 들자 들고 있던 칼로 자살하려다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와중에 프시케는 에로스의 화살에 찔려 남편에게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등불의 뜨거운 기름이 자는 에로스의 오른쪽 어깨에 떨어져,
에로스는 잠을 깨게 되고 자신의 금기를 어기고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된 프시케를 떠나 하늘로 날아가 버립니다.
프시케는 날아가는 에로스의 옷자락을 붙잡고 함께 날아가던 중, 힘이 빠져 땅에 떨어지고 말죠.
에로스는 자신에게 프시케가 질문을 하지 않으면 출산할 아기는 신이 될 것이었지만,
이를 어기고 질문을 하게 되면 아기는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프시케는 남편의 금기를 어기고 남편의 존재에 의문을 가지게 되어 등불을 키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프시케는 땅에 충실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She]에서 요약)
오늘날에도 날나리 언니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남편의 금지를
아버지의 금지와 동등시하여 중년기가 되어도 히스테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순진한. 채로 남아 있는 프시케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런 프시케는 성적으로 매우 무지합니다. 일반적 통계로 볼 때,
결혼한. 여자의 70%가 평생 ‘오르가즘’이 뭔지도 모른 채 죽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혼한 여자의 54%가 성기능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하니,
이런 여성들은 모두 가부장적 남편을 거스르지 않고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 삶의 목적을 둔 사람들인 것입니다.
중년의 순진한 프시케는 성적으로 무관심하여 자신의 여성으로서의 성의 목적성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남편을 위한 성으로 수단화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무의식 속에 억압된 성적 에너지는 심리적으로는 <홧병>으로 전환되고,
신체적으로는 자궁의 히스테리적 울혈현상으로 예민하고 날카로워지는 히스테리 성격이 된다.
이렇게 되면 여성은 여성성을 포기하게 되고 남성화되는 비극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여성이. 여성성의 주체로 살지 못하고 모성성을 자신의 주체로 여기며 살 때
자궁울혈은 남성화된 상태로 진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여자가. 여성성을 배제한 채, 모성성과 남성화된 인격으로 살아야 하는 비극 말입니다.
이 비극은 아프로디테가 되어 며느리로 들어오는 프시케에게 직격탄으로 날아갑니다.
여자들. 경로로 계승되는 히스테리는 가문의 내력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집안의 남자들의 남성성의 정체성까지 위협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