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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3): 미성숙함은 청소년의 특권

건강한 사회는 건강한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니다  



탐구자 : 위니캇이 건강한 사회의 구조는 건강한 구성들에 의해 세워지고 유지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병든 사람들을 포함해야 한다고 한 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분석가 : 근대사회가 출발하면서 근대인들은 합리성, 보편성, 확실성이 통하는 범주 안에서 평균적인 인간들이 안정감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합리성과 보편성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은 각종 시설을 만들어 가두어 버렸죠. 정신병자들은 정신병동으로, 나병환자들은 나병 마을로, 거지들은 사상개조시설로 보내지면서 평균에 못 미치는 많은 사람들이 행동에 제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근대화가 시작된 것은 바로 ‘새벽종이 울렸네’라는 노래가 울려 퍼진 새마을 운동의 출발을 기점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우리 사회 어디를 가도 거지, 넝마주이, 나병환자들이 동네 사람들과 공존하며 서로 돕고 지냈는데, 사회정화 운동이 시작되면서 그들은 모두 각종 시설로 쫓겨나게 되었죠. 이건 근대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불행입니다. 

평균적인 사람들끼리 모여서 살아감으로써 사람들이 나와 다른 문화, 다른 계층의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인격적인 성숙을 바라기가 어려워집니다. 한 사회의 성숙은 그 구성들이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할 때 공감해 주고, 함께 아파해줄 수 있을 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의 포용력은 병리를 가진 사람, 장애인, 보통인보다 부족한 사람 등 사회적 약자를 얼마나 잘 안아 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탐구자 : 진보 정권에서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헌법에 ‘소수자 차별 금지법’을 만들려고 추진하지 않습니까? 이런 법적 보호가 사회적 성숙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분석가 : Absolutely Not!입니다. 두 가지 치명적인 문제를 낳게 됩니다. 

첫째, 소수에 의해 다수가 핍박받는 역차별이 만성화되어서 다수결을 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에 위배됩니다. 그렇게 되면 민주주의만 위험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인류가 중점적 가치로 여겨온 보편성이 무너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도 함께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좌파라면 이 세 가지를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있겠지만, 진정한 진보라면 세 가지를 지키려고 하겠죠. 

둘째, 다수가 소수를 보호하는 것은 사회적 성숙의 지표로서, 그 사회가 아직 성숙에 미치지 못한다 하여 헌법을 제정하여 소수자를 보호한다는 것은 그 사회는 더 이상 구성원들의 성숙을 바랄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그 사회는 분열되기 마련입니다. 성숙한 사회는 강자가 약자를 지켜주고, 다수가 소수가 차별받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사회입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보수진영이나 진보진영이나, 또는 기독교나 불교나 고등종교라면 함께 지켜 나갈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건 다양성의 일치를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나 세상이 좌파와 우파로 나눠지면 함께 지켜나갈 가치가 분열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탐구자 : 근대적 합리성이 수적 계량화를 선도하여 사회발전, 경제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지 않습니까? 서구의 과학의 발달과 각종 문화의 진흥, 기술문명의 고도화 등도 바로 근대적 합리성의 결실이기도 하고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근대적 합리성과 보편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세력을 형성해서 IS라고 하는 국가와 유사한 조직이 등장하여 문명세계를 위협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평균적 합리적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입니다. 평소에 그들은 공격성을 억압해 있다가 조직에 속하게 되면서 공격성을 드러낼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공격성은 그동안 억압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인정받은 적도, 공감받은 적도 없기 때문에, 공격성이 드러날 때는 가장 원시적 수준에서 폭력성과 잔인함, 야만적인 형태로 표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약자들의 피억압, 장애, 폭력성, 잔인함, 야만성, 억울함, 원한 감정 등은 건강한 사람들의 그림자들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배제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 장에서 공격성과 리비도가 한 인격 안에 통합되어야 할 필요성이 강조되었듯이, 인간의 약함과 장애, 폭력, 야만 등은 강함과 온전함, 사랑, 세련됨과 통합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과제는 한 개인의 인격 안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국가 안에서도 수행되어야 마땅합니다. 성숙함과 건강함이란 선천적으로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장해 가면서 통합되어 가는 것입니다.


        

미성숙함은 청소년의 특권


탐구자 : 그런 면에서 보면, 다른 발달시기보다 청소년기에 성장을 위한 많은 고민들이 필요할 것 같아요. 청소년들은 어떤 고민들을 하면서 자라야 하는 걸까요?


분석가 : 청소년기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시기로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철저하게 해 나가야 하는 시기입니다. 어떤 아이는 빠를 수도 있고, 어떤 아이는 남보다 느릴 수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발전을 탁월하게 잘해 낼 수도 있고, 어떤 아이는 발전이 미미하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능력이 뛰어날 수도 있고, 어떤 아이는 능력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해야 할 것은 그들을 비교해서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로 분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각 아이들의 때를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탐구자 : 못하는 아이, 부족한 아이를 기다려 줘야 한다는 말씀이죠? 


분석가 : 그런 아이는 당연히 기다려 줘야 하지만, 잘해 내는 아이들조차도 어느 순간 잘 못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때가 있습니다. 잘하던 아이가 갑자기 느려지거나 멈추게 될 때, 부모님이나 선생님은 그 아이의 존재 상태에 함께 머물러 주면서 기다려 줘야 합니다. 그런 아이는 그동안 너무 잘해 냈던 것이 문제로 나타났기에 그 문제를 수정하기 위해 지금 멈춰야 하는 것입니다. 잘 해내는 아이가 잘하는 이유나, 잘 못해내는 아이가 못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지만, 공통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비교’ 때문입니다. 잘 해내는 아이는 ‘비교’를 당한 결과 잘하게 되었고, 못 해내는 아이도 ‘비교’를 당해서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잘 해내는 아이들 중에는 자신이 남들보다 왜 잘하는지 고민하고 갈등하는 과정 없이 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탐구자 : 잘하던 아이가 왜 갑자기 멈추게 되고 무능해지는 일이 발생하는 걸까요? 자기 고민을 해야 하는 시기가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요? 


분석가 : 만일 어머니가 자녀에게 존재로 들어와서 자녀와 동체성을 이루고 있다면, 아이는 어머니가 투사하는 대로 잘 해내는 형태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잘해 버리기 때문에 자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탐구자 :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죠? 동체성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가 설명이 필요합니다. 


분석가 : 유아기 때 어머니와 아이의 존재론적 융합상태와 유사합니다. 두 사람이 심리적으로 한 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아이가 아동기, 사춘기, 청년기까지 어머니와의 동체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모성성을 차용해서 사용하게 되니까, 자기 능력이 아닌 모성성의 힘으로 잘해 내는 것입니다. 그때 많은 어머니들은 아이에게 욕심을 부리게 되죠. 내 자녀가 다른 아이들보다 더 잘해 내기를 바라는 욕심 말입니다.  


탐구자 : 부모의 욕심이라는 것이 왜 그렇게 나오는 것일까요? 


분석가 : 그것은 부모님뿐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의 존재가 성장, 발달해 가는 것을 보려 하지 않고 당장 내 눈앞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요즘 부모님들은 자기 자녀가 미성숙한 꼴을 못 봅니다. 


탐구자 : 그건 바로 ‘엄친아’ 때문이 아닌가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내 자녀를 친구 아들과 계속 비교하는 것이 문제인 거죠. 서울대 의과대 교수 출신인 유태우 박사가 한 말 중에 서양 사람들은 경쟁을 해서 자기 한계를 알면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존중 내지는 존경을 하는 데에 인색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의 특징은 경쟁을 하기 전에 비교를 자꾸 한다는 겁니다. 

어느 대학에 특정 분야에 세계적인 권위자를 교수로 모셨습니다. 그런데 결국 2년도 못 버티고 사임하고 나가는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그 사정을 들어보니, 쨉도 안 되는 교수들이 이 교수의 권위를 무너뜨리려고 계속 찝쩍대고 시비 걸고 비아냥거리기를 반복하더랍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그 교수에 대해 비난하고 험담을 늘어놓는 등 온갖 모양을 시기심을 다 부리더라는 겁니다. 왜? 그 조무래기 교수들은 그 교수 때문에 학생들에 의해 계속 비교를 당하니까, 그 비교를 못 견디는 겁니다. 그래서 그 교수는 2년을 못 채우고 사임하고 그 학교를 떠나 버린 것입니다. 


탐구자 : ‘비교’가 우리 사회의 큰 병폐이군요. 


분석가 : 비교보다는 정당한 경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비교를 경쟁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비교가 주된 심리적 기제로 삼는 한, 그 사람은 시기심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그러면 누군가 탁월한 사람이 나타나면 인정하고 존중을 해 주는 대신 그 사람이 그곳에서 존재할 수 없도록 끊임없이 끌어내리고 무너뜨리게 되고, 그러는 만큼 자신도 무너지게 됩니다. 


탐구자 : 어쩌면 비교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너무 못하는 아이는 비교를 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분석가 : 아닙니다. 누군가를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사람마다 자기 상황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잘하고 못하고, 빠르고 느리고 하는 것은 각자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교를 하면 자신의 문제점이나 가능성을 자신에서 찾지 못하고, 남에게서 찾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찾은 이유나 원인이나 동기는 결국 내 존재와는 무관한 것이죠. 

이 땅에 사는 모든 존재는 ‘고유한 나’를 가지고 있다는 근거로 인해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위니캇 말대로, 아동이나 청소년이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기는 일종의 특권인데, 어머니들은 자기 자녀의 미성숙함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들은 내 자녀가 뭔가 남들보다 나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청소년은 충분히 미성숙할 수 있어야 계속해서 성장해 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청소년 자신도 자신의 무가치함과 부족함, 연약함을 무조건 극복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러한 상태에 충분히 머물 수 있어야 그다음 단계를 도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청소년기는 자아 정체성을 찾기 위해 방향을 잡아가는 시기이지, 정체성을 확립을 완료해야 하는 시기가 아닙니다. 청소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 시기를 충분히 머물러 흔들릴 수 있어야 하고, 부모는 자녀와 함께 흔들려 줘야 하는 것입니다


탐구자 : 누군가의 말이 생각나네요.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말. 그리고 위니캇의 말도 생각납니다. “사회는 책임을 지지 않는 자들에 의해 흔들려질 필요가 있다. 만약 어른들이 책임지는 일을 기권한다면 청소년은 거짓 발달의 과정을 거쳐 조숙하게 성인이 된다. 청소년과 그들의 미성숙을 위해서 사회는 그들이 일찍 어른처럼 되는 거짓된 성숙을 획득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요. 


분석가 : 부모의 역할은 자녀들의 시간을 최대한으로 연장시켜 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들과 몸으로 놀아줌으로써 사춘기가 급작스럽게 다가오지 않도록 막아줘서 서서히 다가오게 함으로써 자녀들이 감당할 만한 사춘기가 되도록 도와줘야 하듯이, 어머니도 자녀들의 성장을 연장시켜 줌으로써 자녀의 조숙함을 막아줘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성장 시간을 어떻게든 압축을 시켜서 자녀들 자신의 존재를 충분히 머물고 즐기면서 삶을 펼쳐 나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청소년기는 홈런이나 안타를 치는 시기가 아니라, 마음 놓고 헛스윙을 쳐 보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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