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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떠나지 못한 아들의 불행한 부부관계(2)

효자가 문제다


남자는 사랑하는 자, 여자는 사랑받는 자


여동생의 입장에서 보면, 오빠는 올케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사실이다.

종교(불교에서 기독교)까지 바꿔가면서 여자를 사랑할 정도면 남자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웠겠는가? 

연애할 당시 여자는 교회 성가대원이었다. 

성가대원들 사이에서 이 여자의 별명은 '대모'였다.

기독교에서는 '대모'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음에도, 그런 별명을 얻은 이유는 주변의 모든 사람을 다 챙겨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모두가 좋아하는 여성이었다.


이런 것을 보면, 그 오빠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녀가 바로 '엄마 같은 여자'였기 때문이다.

여동생의 말에 의하면, 오빠는 이 여자를 뜨겁게 사랑한 반면, 여자도 과연 오빠를 사랑해서 결혼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요즘 올케는 오빠를 너무 미워하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여동생은 오빠는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했다 쳐도, 올케는 왜 결혼했을까가 의문이란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남자는 사랑하는 자이고, 여자는 사랑받는 자이다"


이 명언은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에 나오는 내용이다.

물론 여자도 남자를 사랑해서 결혼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그런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 남자에게서 사랑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확신만 들면 그 남자와 기꺼이 결혼할 수 있다. 


오늘날 페미니스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 남자들만 사랑해? 왜 남자들만 여자를 유혹해? 나도 남자를 유혹할 수 있어."


이런 여자가 남자와의 첫 만남에서도 남자를 모텔로 유인하여 유혹하여 쉽게 잠자리를 한다. 

결국 그 피해자는 여성 자신이라는 사실을 나중에라야 깨닫는다. 

이런 여자는 남자와 여자의 중요한 차이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오류를 범한다.


그 차이란, 


   남자는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있지만, 여자는 몸과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래서 너무 쉽게 잠자리를 하는 여성은 인격에 파편화가 일어나 분열적이고 혼란스러운 삶을 살 확률이 높다.


어머니를 떠나지 못하는 효자인 것이 문제다


어머니가 생각할 때 이 아들은 최고의 효자다. 

이 아들은 어릴 때부터 영재였다.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아들이었으나, 무슨 일을 벌이면 항상 마무리를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아내와의 결혼도 그렇게 된 셈이다.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지금은 아내의 불신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그 아내가 시누이에게 하는 하소연은 이렇다.


  "세상에 나처럼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아요?"


그녀의 말뜻은, 한마디로 '나는 속았다'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뭘 속았다고 생각하나?


   '남편이 나를 사랑하는 줄 알고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어머니를 더 사랑하더라'

는 것이다.

사랑의 종류도, 성격도 다른데, 이 두 여자는 왜 경쟁하나?

그 답은, 효자인 아들이 어머니를 떠나보내지 못한 채 결혼하였기 때문이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기에, 내가 그 남자 마음속에 있는 줄 알고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그 마음속에는 어머니가 독차지하고 있고, 자신은 월세 살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놈의 '효도'가 부부관계를 갈라놓은 것이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효도하겠다는 데 그게 뭐가 문제인가?

성경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이 아들은 디지털 시대에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유교적 효를 가지고 사는 것이 문제이다.

유교적 질서 속에서 가정에서는 자녀에게는 배우자 관계 보다 부모와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한, 오늘날 부부관계는 건강할 수 없다. 


100세 시대의 효, 4차 혁명 시대의 효의 개념은 유교적 효와는 달라져야 마땅하다.


 갈등, 그 이후 : 남성화된 아내


시누이의 의견에 따르면, 올케는 아마도 세월을 기다리는 것 같다.

아들이 13살이니까, 20세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는 말이다. 

아들이 성인이 되는 날, 아내는 이혼을 꿈꾼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시댁은 안중에도 없을 수밖에.


이 아내는 이제 성격도 바뀌었다.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포근하고 따뜻하며 공감적인 여자가 이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모성성을 내적 인격으로 사용해 오던 여자가 중년이 되면서 여성성을 찾지 못하면 남성화가 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어머니에게 절대적 효자인 아들이 어머니에게서 떠나지 못하는 마음으로 어머니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아 결혼하기 위해 전심을 쏟아부으면서 여자를 사랑하였다.

두 여자(어머니와 아내)가 모성성으로 겹쳐 있었지만, 각각의 인격의 상이점을 구별하지 못한 잘못이 남편에게 남아 있다.

부모를 떠나지 못한 아들은 아내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게 된다.

 

중년이 되면서, 남편은 과도한 모성성으로 여성화되고, 여자는 남성화되는 것이 대부분의 중년부부에게 일어나는 일반적 현상이다. 

일반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진리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부부가 인격발달의 작업을 하지 못한 결과이자, 그 부작용이다.


그 며느리는 과거에 이렇게 시어머니에게 고함을 칠 정도로 무례한 사람이 아니었다. 

남편이 남자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 결과 아내라도 남자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녀는 남성화되었다.


여자가 남성화되면, 이런 여자를 아내로 대해야 하는 남편은 끔찍한 일상을 보낸다.

여자의 언어가 갈수록 표독해지기 때문이다. 

남성화된 아내의 표독한 말 한마디는 남편으로 하여금 사시나무 떨듯이 떨게 만든다. 

표독함이 심화될수록, 남편은 언젠가 아내 안에 있는 메두사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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