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탁월한 신화학자인 조셉 캠벨(Joseph Cambell)은 결혼을 두 단계로 나눠 설명했다.([신화의 힘], 고려원)
첫 번째 단계는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불가사의한 충동에 따라 두 젊은이가 결혼하는 단계이다.
젊은 남녀가 자연(본성)의 충동을 좇아 생물학적인 성의 교합을 통하여 자식을 낳고 양육한다.
두 번째 단계는 아이들이 장성하여 사회에 진출하고 결혼하여 독립하여 떠나면 부부만 남게 되는 국면에 접어들어 서로를 새롭게 발견하는 단계이다.
서로를 새롭게 발견하지 못하는 많은 부부가 바로 이 단계에 많은 이혼, 졸혼과 같은 갈라섬의 사건들이 일어난다.
앞의 글(<부부는 새롭게 발견되어야 한다(1)>)에서 다룬 내용은 바로 결혼의 첫 번째 단계인, 자연(본성)을 따라 사는 부부생활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제 우리는 자연 또는 본성에 따른 결혼의 한계를 넘어 결혼 생활 중에 자연의 개념에서 자유의 개념으로 넘어가는 의미를 자각할 필요가 있다.
캠벨은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부부) 관계 속에서 찾아야"(같은 책, 39)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결혼을 통한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못한 것"(38) 임을 강조한다.
결혼이란 '영적으로 하나 됨'을 알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결혼이란, '자기'와 또 다른 '자기'의 재회이다.
남자는 남성으로 살아가는 '자기'를 가지고 있고, 이면 인격인 '여성'으로서의 자기를 가지고 있다.
여자는 여성으로 살아가는 '자기'를 가지고 있고, 이면 인격인 '남성'으로서의 자기를 가지고 있다.
남자가 결혼한다는 것은 이면인격인 여성성을 투사할 대상으로서 여자를 파트너로 삼는다.
여자가 결혼한다는 것은 이면인격인 남성성을 투사할 대상으로서 남자를 파트너로 삼는다.
이와 같이 결혼은 자기와 자기와의 만남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을 통한 배우자와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관계가 되는 것이다.
자연(본성)을 실현하는 첫 번째 단계의 결혼에서는 이를 자각하기 힘들다.
40~50대를 넘어가면서, 부부는 두 번째 단계의 결혼으로 진입해야 한다.
이 나이 대의 부부는 자연적 관계, 즉 성욕과 충동에 의해 서로를 끌어당기던 단계를 넘어 결혼 관계 안에서 '자유함'을 찾아가는 두 번째 관계로 들어가야 한다.
이때 '자유함'이란, 서로로부터 해방되는 자유함이 아니라, '진리를 알아가는 자유함'이다.
결혼을 통해 진정한 자기(self)를 찾아가고, 각자 별개로 존재했던 자기가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결혼의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결혼의 첫 번째 단계에서 자연이 부여한 불가사의한 충동에 따라 두 젊은이가 결혼하는 것보다 더 불가사의한 진리가 결혼이라는 관계에 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 정체를 부부 관계 안에서 찾아야 한다.
결혼의 첫 번째 단계가 사랑하는 두 남녀의 연애의 연속이자 연애의 결과라고 한다면, 두 번째 단계에서 캠벨이 강조하는 것은 '시련'이다.
결혼이 두 번째 단계로 진입해야 하는 이유에는 신화적 및 신학적으로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두 번째 단계는 곧 연금술의 단계이다.
연금술이란, 보잘것없는 금속을 가지고 금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말한다.
연금술로서의 결혼의 신화적 의미는 보잘것없는 두 남녀가 만나 초월적 선의 영역에 들어가는 데에 있다.
결혼의 신학적 의미는 부부의 결합으로 자기와 자기가 만나는 것을 정신적 영적으로 실현해 가는 과정에서 신이 되어가는 데에 있다.
결혼은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신과 인간의 결혼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다.
결혼은 내 안에 있는 신을 만나는 가장 현실적인 방편이다.
많은 부부가 결혼의 첫 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다.
과거에는 부부가 그런 자연적 결혼단계에 머물러 있어도 서로 참고 견디는 것이라고 여겨 왔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자연적 결혼단계의 막바지에 이르면 심각하게 고민한다.
바로 특히 50대를 넘어가는 여성이라면 이런 고민이 깊어진다.
그래서 요즘 자녀들이 집을 떠나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부부간에 갈라서는 고민이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다.
"지아비는 묘령의 아기씨와 눈이 맞아 도망질을 치고, 지어미는 텅 빈 집에 텅 빈 가슴으로 앉아서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그것을 수습해야 하게 될지도 모르지요."(위책, 40)
이런 일들은 결혼의 두 단계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결혼의 변환점을 알지 못한 채, 첫 번째 단계에 머물러 죽기를 기다리는 부부가 있다면, 그것은 어른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린도전서 13:11)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자기 정체성의 두 가지 요소로 동일성(sameness)과 자기성(selfhood)을 제시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동일성은 what과 관련이 있다면, 자기성은 who와 관련이 있다.
이것을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결혼하면서 배우자를 가장 소중한 혼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혼이라는 사건 중 who에 초점을 두는 사람이라면, what에 초점을 둔 사람은 혼수의 물질적 요소를 중시한다.
결혼 후 결혼의 자연적 의미에 머물러 있는 첫 번째 단계의 사람은 what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는 사람은 who에 초점을 둔 부부관계를 하는 사람이다.
what에 초점을 둔 사람은, 결혼 후 자신이 가정을 위해, 또는 배우자를 위해 어떤 공로를 했는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역할을 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who에 초점을 두고 있는 사람은, 배우자라는 거울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자각해 가는 사람이다.
배우자를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발견해 가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내 안에 계신 신이 누구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what에 초점을 둔 사람은 늘 자신의 세속적인 성취에 만족하기 때문에 내면에 계신 신은 늘 '말할 수 없는 탄식'(롬 8:26)으로 고통스러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