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적 사고와 개별적 감정
40대 초반의 S라는 여성은 직장에서 잔뜩 스트레스를 받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스트레스의 핵심은,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아무도 S가 앉은 테이블에 와서 앉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직장에서 평소 S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별로 없다는 것이다.
회사 내 자료실을 혼자 관장하고 있다 보니 직무 성격상으로도 남들이 사적으로 친밀하게 다가올 수 있는 직책도 아니다.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기도 하지만, 매우 사무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녀는 회사에서 사적으로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런데 바로 옆의 부서에 결혼 15년 차 여성 과장이 부임했다.
그녀는 온몸에 명품을 휘두르고 다니면서 의사인 남편의 재력을 과시하지만, 아무도 그녀가 잘난 척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녀가 얼굴관리 몸매 관리를 잘하고 다녀서 명품이 잘 어울리는 품위를 갖췄다는 칭찬을 듣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다.
S는 그녀가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을 보며 부러워하면서 초라해진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S가 보기에 주변사람들이 그녀를 매우 특별하게 보는 뭔가가 있어 보인다
내가 볼 때는 S도 매우 예쁜 외모를 가졌고, 몸관리에도 게으르지 않게 나름의 애를 쓰는 사람이다.
며칠 전에는 S가 그 여성과장 이야기를 남편에게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오늘 S는 자신이 직장에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스트레스받은 것에 대해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은 뭔가 특별한 사람이잖아. 나 같은 비혼주의자 하고 결혼하겠다고 끝까지 달려든 것도 특별하고, 당신의 전공도 특별하고, 당신이 남달리 예쁜 것도 특별하고, 당신 나이에 처녀 때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특별하고, 많은 면에서 남과 다르다는 특별함을 많이 풍기고 다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싫을 것 같아. 그들이 볼 때 당신은 잘난 척하는 것 같거든. 그런데 옆에 온 과장이라는 사람은 금방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고 인기를 누리는 것은 잘난 척하는 게 아니고, 그냥 잘난 거야. 그것이 그 사람의 특별함이지. 당신의 특별함과 과장의 특별함은 달라."
S는 자기보다 공부를 많이 한 남편이 하는 말이라 들으면 들을수록 옳다 여기면서 기가 죽고 찌그러들었다.
S가 남편의 말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일 때, 남편이 하는 말,
"나니까 당신한테 이런 말을 해 주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야. 내가 당신이니까 이런 말 해주는 거야."
S는 남편의 이런 말도 위로로 여겨 옳다 생각하며 한 번 더 찌그러들어야 했다.
S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나는 그것밖에 안 되는 여자로구나"
"나는 이렇게 나의 상태를 정직하게, 속임 없이 말해 주는 지성적인 남편을 가져서 참 다행이다."
"남편 말대로, 남편이 아니면 나의 이런 특별함에 대해 누가 이야기해 주겠어?"
내가 그런 상태의 S를 봤을 때, 마치 힘센 남자가 구두굽을 높이 들어 단숨에 힘차게 밟아버린 찌그러진 코카콜라 캔과도 같았다.
나는 S의 이야기를 듣고 찌그러진 자존감을 순식간에 세워줬다.
그 순간 S는 남편에 대한 분노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S는 그동안 남편으로부터 이런 식으로 얼마나 많이 당했나를 생각하게 되면서 부글부글 끓었다.
남편은 왜 이렇게 말을 했을까?
직장에서 혼자 밥 먹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받고 있는 아내에 대해 남편은 '특별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팩트 폭격을 함으로써 아내의 자존감을 깔아뭉갰다.
남편은 아내의 구겨진 자존심을 세워주기는커녕 상황을 객관화시켜 아내에게 이런 식으로 팩트폭격을 자주 행해 왔다.
그래서 S는 남편을 만나고 나서부터 자신을 보다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
나 자신을 보다 객관화시켜 보면, 남편이 이야기하는 대로 사람들도 그렇게 나를 볼 수 있겠구나.
그런 것은 나 자신을 볼 수 없는 부분인데, 남편은 남들의 입장에서 나를 보게 하는 거울과도 같은 사람이구나.
아무도 내게 못해 주는 말인데, 남편 만이 내게 이런 말을 해 주는구나.
이런 생각은 언듯 들어보면 맞는 것 같다.
나 스스로 주관적인 관점으로만 볼 수밖에 없는 것을 남편이 나를 객관화시켜 주는 것을 착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남편의 이런 말은 어디까지나 가스라이팅이다.
누군가 '가스라이팅은 애정 속에 숨어 있는 폭력이다'라고 말했다.
아내의 감정을 무시한 채 자신의 이성적 판단으로 아내를 보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의 상처받은 상황을 공감능력으로 살펴주고 보듬어주고 위로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늘 그래 왔듯이, 남편은 아내의 억울함에 대해 감정을 배제한 상태에서 이성을 작동시켜 아내의 상황을 객관화시키고 보편화하여 아내를 우울하게 만들어 버렸다.
더 심각한 문제는 S가 남편의 그런 이성적 충고에 대해 화를 내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여성성을 더욱 억압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S는 이미 남편의 팩트 폭격에 의해 설득을 당한 결과 우울해졌다.
결혼 후 남편의 이런 류의 팩트폭격이 누적된 결과 최근에 MMPI 검사 결과 우울증 진단을 받게 되었다.
검사 센터에서는 S에게 약물치료를 권했다.
나는 S에게 약물치료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전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에게 우울증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 남편과의 왜곡된 관계가 우울증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는 40대를 넘어가고 있는 S에게 남편과 중년기 작업을 권했다.
다음의 글은 내가 그녀에게 중년기 작업의 타당성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평소 남편은 매우 이성적인 판단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남편은 항상 올바른 판단을 하고 정답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 누가 봐도 매우 정상적인 남자다.
그렇지만 남편은 지금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판단, 그리고 보편적 사고에 매몰되어 있다.
그는 남자로서 그러한 정상성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했으니 어디를 가나 매우 신사적인 사람이자 합리적인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것이 그의 페르소나가 된 것이다.
페르소나라는 것은 사회적인 방어기제이기 때문에 가정에 와서는 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 남편은 스스로 합리적이고 보편적이며 늘 올바르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자신의 사고를 아내에게도 적용해 왔다.
남편은 상황에 맞지 않은 사회적 가면을 아내에게 뒤집어 씌웠고, 아내는 남편의 말을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거울로 삼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가스라이팅이 일어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성중심으로 살아온 남자는 합리적 사고, 보편적 판단, 집단적 사고에 익숙해 있다.
그 결과 그는 아내에게 감정학살을 감행하고 말았다.
아내에 대한 감정학살은, 남편 자신이 오래전부터 학살당한 감정상태의 반영이다.
근대는 합리성, 보편성 등을 강조한다.
그러나 현대는 이러한 합리성과 보편성에서 탈피하여 개별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합리성과 보편성은 집단적 사고에 속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집단적 사고를 함으로써 전체주의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사는 것이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을 봤을 때 누구나 공통적으로 '아름답다'라고 느끼는 '취미'는 집단적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를 철학에서는 '공적 실재'라고 부른다.
특히 부부간에 중년기가 되면서 중요해지는 것은 집단적 사고에서 벗어나 개별적 사고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람은 오랫동안 이성에 의해 억압당한 감정을 끌어올려야 한다.
일반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심리학은, '어떠어떠한 상황이 되면, 사람은 누구나 이러저러하게 반응한다'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똑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각자 고유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람이 정서적, 정신적 발달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만의 고유한 삶과 존재를 찾아야 한다.
S의 남편은 아내의 상처받은 개별적 상황을 헤아리기보다 집단적 사고로 합리적 판단, 보편적 사고를 하기에 바빴다.
S의 상황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는 남편의 감정을 바탕을 둔 공감이 필요하다.
나는 S의 그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개별화시켜 주었다.
"당신의 특별함은 당신의 고유함이다. 당신의 특별함은 자신의 본성에 맞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당신은 집단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선호하기보다 나만의 독자적인 행보를 해 온 것이 당신의 본성에 맞다. 그래서 당신은 기록관리에 대한 학문을 전공으로 했고, 회사 내 직책도 유이하게 혼자 근무하는 기록보관 직무이다. 그러니 밥 먹을 때 혼자 먹는 것 또한 자신만의 고유함에서 나온 특색 중 하나다."
어떤가?
S의 남편의 합리적이고 객관적 판단으로 아내를 우울증으로 몰아가는 것보다 S의 자신의 몸에 맞는 본성을 찾아 줌으로써 자신만의 독특함이라는 개별적 사고를 가능케 한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견해를 받아들인 S는 이제 남편과 싸워낼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S의 개별화된 감정으로 남편의 집단적 사고와 싸우게 될 것이다.
그녀의 남편과 예상되는 갈등 상황을 이해하는 핵심은,
"더 이상 남편을 이해해 주지 말라"
는 것이다.
이 문장은 중년기 부부관계에서 아내가 행해야 할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것이 바로 부부간 중년기 작업의 시작이다.
여성성은 here-and-now의 감정이기 때문에, 남편의 집단적이고 합리적 사고에 내몰리지 말고, 아내는 자신의 그때그때의 감정에 충실하게 표현해야 한다.
남편의 상황을 이해해 주는 순간, 아내는 합리적 사고를 하게 되고, 집단적 사고에 매몰되기 시작한다.
아내는 이 작업을 해야만 자신 안에 오랫동안 억압되어 온 여성성을 끄집어낼 수 있게 된다.
아내가 이 작업을 해내지 못하면, 남편의 합리적 사고 및 집단적 사고에 의해 끊임없이 가스라이팅을 당하게 될 것이다.
특히 부부관계에서는 사고보다는 감정이 더 중요하다.
S 부부관계는 5년 전 아기를 낳은 이후 성관계를 한 적이 없다.
S의 남편에게 있어서 성관계는 아기를 낳기 위한 수단이며, 자녀 생산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저질러야 하는 죄의 행위에 불과했다.
S의 남편은 철저한 이성주의자이자 경건주의자다.
성관계에서만큼 감정이 격동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가 성관계를 싫어하는 이유는 성관계는 죄의 행위라는 잘못된 경건 사상과 감정을 격동시켜야 하는 부담 때문이다.
중년기는 바로 이런 편견(사회적 페르소나와 감정 억압)을 바로 잡는 기간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오랜 기간 높고 견고한 성을 쌓아온 남편의 이성의 성벽을 아내의 감정이 하나씩 하나씩 무너뜨려야 한다.
중년기의 이 작업은 어떤 부부에게나 힘든 일임은 어쩔 수 없다.
그런 관계로 결혼하여 부부로 사는 사람은 맍지만, 결혼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