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담자로 만난 K라는 여성은 이제 갓 50세를 넘겼다.
일찍 결혼한 탓에 아들은 대학 졸업 1년을 남겨두고 군에 입대하였고, 딸은 좋은 집안으로 시집도 잘 갔다.
최근 양가부모님도 다 하늘나라로 보내드렸다.
그래서 친정 딸로서, 며느리로서 역할도 다 끝났다.
40대 중반에 시작한 석사과정을 끝내고 지금은 박사과정 논문만 남겨두고 있다.
K는 지금까지 살면서 계획하고 소망한 것을 이루지 못한 것이 없었다.
자녀 양육도 잘 해 내어서 어머니 아내로서 앞가림을 잘 하고 있고, 남편도 언제나 돈을 잘 벌어다 줘서 경제적 어려움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친정 딸로서, 며느리로서 역할을 하는 동안에도 친정과 시댁 모두 원만한 관계로 지내왔기 때문에 양가부모님을 떠나 보내면서도 억울함이나 억압된 분노 같은 감정의 응어리조차 남긴 것도 없다.
늘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왔기 때문에 나이 50을 넘기면서 모든 것을 다 이룬 느낌이 왔기에 하루하루 늘 뿌듯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좋은 남편, 잘 자란 자녀들...
K는 이제 밥 안 먹어도 배부른 느낌을 가지고 일상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외친 외마디가 K 자신의 입에서 툭 튀어 나왔다.
" 다 이루었다!!!"
그 순간 갑자기 공허감과 허무감이 가슴 한 켠에 훅~ 하고 들어왔다.
바로 그때 죽음의 공포가 밀려 왔다.
그렇게 순간적으로 들어온 공허감과 죽음의 공포는 잦은 일상이 되었다.
이제 삶을 좀 즐겨야 되겠다 싶은 마음에 K는 그 친구들을 데리고 동네 술집을 찾아 맛있는 음식을 먹고, 2차로 노래방을 다녔다.
이것만으로 공허감을 채울 수가 없어 친구들과 방탄소년단을 비롯한 K 팝 아이돌 공연을 보러 다녔다.
그런 삶의 여정이 계속 되면서, 억울한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30년만 젊었어도 가수, 아이돌을 꿈꿀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돌처럼 춤추면서 마음껏 뛰어 다니는 저 무대에 나도 설 수 있었을텐데...
몸을 흔들며 마음껏 놀아보면서, 그동안 자신이 무엇을 잃어 버렸나를 알게 되었다.
사춘기의 상실, 도둑맞은 청춘, 흥을 잃은 젊은 시절을 보낸 것이 너무나도 억울했다.
여러 아이돌에 대한 정보수집을 하면서 몇년 동안 그들을 따라다니면서 콘써트 여행을 했다.
오랫동안 이런 K를 묵묵히 지켜보던 절친이 충격적인 말을 전했다.
"너는 지금 잘 노는 게 아니고 방황하고 있는거야. 지금 네게 필요한 것은 케렌시아야!"
케렌시아는 스페인의 투우장의 황소가 위험을 느끼거나 휴식이 필요할 때 도피하여 안전하다고 느끼는 장소를 가리킨다.
황소는 케렌시아에 머물면서 힘을 회복하고,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며, 공격이나 위협에 대비한다.
케렌시아는 투우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쉬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공간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케렌시아'라는 개념은 더 넓은 의미로 발전하여 사람들이 안전하고 평온을 느끼며 자기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장소나 상태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서, 개인이 내면의 평화와 안정을 찾고, 자아 정체성을 탐색하며, 개인적인 성장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정신적 공간을 포함하게 되었다.
그때 K가 깨달은 것은 바로 이 케렌시아를 확보하는 것, 즉 '나만의 삶,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K는 15평 오피스텔을 구했다.
그곳에는 가족도 친구도 찾아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K는 그곳에서 그림도 그리고 음악 감상도 하며, 무엇보다 멍때리기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K는 자신만의 케렌시아에서 많은 회복을 가져왔다.
K는 넘치는 활력으로 자신을 재생해 냈다.
그렇지만 공허감이 훅~ 하고 들어오는 것은 여전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들어오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공허감은 죽음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K가 지금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젊을 뿐 아니라, 너무나도 건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저 멀리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멀리 있는 죽음이 왜 순간이동한 것처럼 갑자기 훅하고 들어오는 것일까?
나는 K의 인생여정 속에서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살았음을 K에게 자각시켰다.
그것은 바로 '남편과의 관계'였다.
지금은 너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남편이라고 하지만, 나는 남편과 그렇게 '너무 좋은 관계'를 문제삼았다.
그녀가 말하는 좋은 관계란, 나이 50을 넘어서면서 서로 간섭하지 않고, 서로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각자 문제는 각자 해결하고, 서로 정서적으로 뒤섞이지 않는 방식으로서 좋은 관계였다.
서로 관계 정리가 잘 된 것일 뿐이었다.
그동안 남편은 돈 잘 벌어다 주고, 아내는 살림 잘 살고, 자녀를 잘 양육하고, 재테크에 능해 아파트를 20평대에서 40평대로 잘 늘려 오는 등 부부 각자 역할을 잘 분담하여 부부로서 기능을 잘 해 온 것이었다.
이렇게 살다보니, 부부간에는 갈등 상황이 발생할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만일 지금 K가 평균수명 65세 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면, 매우 성공적인 인생을 산 셈이다.
그러나 100세 시대에는 K는 이제 절반 산 셈인데, 그 절반으로 인생을 다 산 것처럼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니까, 그녀의 무의식이 공허감과 죽음 공포를 확 들이민 것이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100세 시대 부부관계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 to be continu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