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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의식과 뇌의 의식

암흑에너지와 명료성 

데카르트를 극복하지 못한 현대의학



현대의 일부 과학자들은 뇌가 의식을 생성하는 유일한 기관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과학자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이러한 주장은 근대 시대를 시작한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로부터 유래한다.

데카르트가 그러한 주장을 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데카르트가 죽은 몸을 해부함으로써 인체에 대한 정보를 얻은 연고로 그는 죽음을 기반으로 한 의학 지식을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해부학적이고 기계론적인 신체관이 현대 의학에 영향을 미친 현대 의학은 생명보다는 죽음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의사가 암 환자를 진단할 때, 그는 제일 먼저 죽음을 선고한다.


"당신의 남은 생명은 여섯 달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 의학의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즉, 인간의 생명을 단순히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기능으로만 파악하려는 시도는 생명의 본질적인 가치와 의미를 간과하게 만든다. 

이는 특히 말기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절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접근 방식이 현대 의학이 직면한 윤리적 도전 중 하나이다.


데카르트의 시대 이후로 과학과 의학은 인간의 몸과 마음, 의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크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초기 작업이 오늘날 우리가 건강과 질병을 이해하고 치료하는 방식에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현대 의학이 진정으로 인간의 복잡성과 생명의 신비를 다루기 위해서는, 단순히 신체의 기계적 기능을 넘어서 인간의 정신적, 감정적, 그리고 영적인 측면까지 포괄하는 더 포괄적인 접근 방식을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환자를 단순한 질병의 집합체가 아니라, 그들의 전체적인 존재와 그들이 처한 생명의 맥락을 중심으로 보는 더 인간적이고 치유적인 의료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근대적 표상인 명증성과 확실성을 극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근대성의 명증성과 확실성



데카르트의 자아는 이성의 정신작용의 결과일 뿐 몸의 작용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것은 데카르트의 몸 개념이 '죽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의식은 오로지 뇌의 작용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볼 때, 뇌만 살아 있고 몸은 죽은 것이다.

이처럼 근대인의 머리와 몸은 분리되어 있다.


사람의 몸과 외부의 자연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의 본성(nature)과 자연(nature)은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몸의 본성을 자연에 투사하면서 산다. 

데카르트의 몸은 해부학적 대상으로서 죽은 몸이기 때문에 그러한 몸의 개념을 자연에 투사한다.

그래서 근대인은 외부의 자연도 죽은 존재로 대상화한다.

그 결과 사람이 자아의식을 분화하면 할수록 몸의 뿌리를 떠나게 된다


데카르트의 근대적 사고의 본질은 명약관화한 명증성과 확실성에 있다. 

이러한 명증성과 확실성 실천을 목표로 삼는  근대성은 모든 대상(사람이나 사물)을 규격화하고 수치화하는 효율성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근대인은 모호하거나 복잡 다단한 혼돈의 상태를 매우 싫어한다. 


모든 것이 명확하고 확실해야 하는 특성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났다.

나치가 유대인들을 죽일 때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죽이고자 가스실에서 죽였다.

사람을 그곳에서 죽이면 예외 없이 다 죽게 되어 있으니까, 얼마나 확실한 방법인가? 


그런데 현대 의학적 치료의 현실은 어떤가? 

이는 얼마나 애매모호한가?

의사가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질병의 25%이고, 30%를 치료하는 의사가 있으면 그는 '명의'라 불린다.

나머지 75%의 질병에 대해서는 의사들은 대증요법을 사용한다.

그 흔한 감기의 원인하나 몰라 대증요법이 동원되고, 암은 그렇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명약관화한 원인과 확실한 치료법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인류는 긴 시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를 고통스럽게 겪어내야만 했다. 

현대의학 자체가 스스로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몸의 의식


의식은, 과학자들이나 의사들이 생각하듯이, 뇌만의 기능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뇌는 생각보다 멍청하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뇌를 속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의사들도 인정하는 플라시보 효과(위약 효과)가 바로 그것이다.

위약으로 치료되어가고 있다고 뇌를 속이면 뇌는 그대로 속아서 위약의 치료 효과가 현실적으로 나타난다.

또 다른 예로 컴퓨터 게임에 몰입하는 청소년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아이가 컴퓨터 게임에 몰입하게 되면, 뇌는 그 아이가 위기 상황을 당한 줄 알고 몸의 모든 에너지를 다 끌어 모아서 뇌에게 공급해 준다. 

그리하여 몸은 에너지를 빼앗겨 신진대사가 멈추게 되고, 정신은 그 에너지를 모아 모니터 안으로 쑥 들어가 버린다.

게이머의 몸과 정신은 확실하게 분리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아이는 게임에 몰두하는 동안 신진대사가 멈추니 며칠이고 밥을 안 먹어도 되고, 화장실도 안 가도 되며, 잠을 안 자도 된다.

뇌가 속은 것이다. 


조셉 캠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온몸에 두루 존재합니다. 이 의식은 그 의식의 주체에게 살아 있는 세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합니다. 나는 의식과 에너지는 어떤 점에서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을 지닌 사람입니다. 삶의 에너지를 찾아볼 수 있는 데엔 반드시 의식이 있습니다. 식물의 세계에도 의식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어린 시절 숲 속에서 많이 지냈습니다만, 숲 속에 살다 보면 각기 서로 다른 이런 의식이 상호 관계 속에서 뒤엉켜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숲 속에는 식물의 의식도 있고 동물의 의식도 있는데, 우리의 의식은 이런 의식들과 상호 작용을 하게 됩니다.... 이 모든 작용이 곧 의식입니다. 이런 의식을 단순히 기계적 술어로 번열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신화의 힘], 52)


우리의 온몸이 하나의 유기체 이듯이, 이러한 유기체적 의식을 투사하는 자연 또한 살아 있는 유기체인 것이다. 


암흑 에너지와 창의성


 암흑 에너지에 깊이 머물러야 한다 

정신의학자 이시형박사는 


 창의적 발상은 이러한 명료한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잡념들이 수없이 지나가는 가운데 뇌 에너지의 60~80%를 사용하는데, 그러는 중에 창의적인 발상이 툭 튀어나오게 된다. 이 잡념 에너지를 암흑에너지라고 부른다. 이런 아이디어는 긴장과 이완의 조화가 잘 이루어질 때 나온다. 하다못해 자는 중에 벌떡 일어나서 탁 깨닫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보통 창의적 발상을 위해 책을 많이 읽어야 하고, 명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도 방법일 수는 있겠지만, 창의성은 잡념과 혼돈 속에 편안하게 머물러 있을 때 어느 순간 번개처럼 떠오른다.

물리학자이자 뇌과학자인 박문호 박사는 창의적 생각을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책을 읽고 산책할 것을 권한다.

책을 읽고 나면 온갖 지식이 머릿속에 섞이게 되는데, 일일이 정리를 하기보다는 아무 생각 없이 걷기를 하면 그 와중에 자신의 상황과 책의 지식들이 통합이 일어나면서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시형 박사가 암흑에너지 속에서 번개같이 번쩍이는 아이디어나 박문호 박사의 책 읽기 후 산책은 같은 맥락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맥락은 자녀 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암흑에너지에 머물 수 있는 자녀의 특권

어떤 아이는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 시절을 잠으로 보낸다.

그 아이는 학교 가는 평일에는 12시간, 주말에는 16시간을 잔다.

그 아이는 공부는 못하지만 친구를 잘 사귀며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을 잘한다.

친구가 없으면 혼자서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가지고 스스로 놀이를 창조하고 그 안에서도 규칙을 만들어낸다. 

그 아이는 학교 다니는 동안 공부도 못했고, 책을 읽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부모는 그 아이가 뭘 하든 제약을 가하지 않고, 아이가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조건 지원해 준다.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해서 인서울의 어느 대학에 입학했다.

늘 멍하게 있던 아이가 대학 1학년때 교양과목 중 논리학 강의를 들으면서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고 인문학적인 글의 문리를 터득했다. 

그 아이 주변에 있는 똑똑하고 성격 좋은 친구들과 토론과 논쟁을 즐긴다.

그 후, 가족 간, 친구 간에 문제가 발생하여 갈등 상황에 들어가면 그 아이는 절대 져 본 적이 없다.

아무도 이 아이를 이길 수가 없다. 

이 아이는 오랜 세월 암흑 에너지 속에 충분히 머물러 있음으로써 자신의 내면의 깊은 곳에 있는 잠재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낸 것이다


    명료성에 노출된 아이들

갓난아기는 첫 1년 동안에는 어머니의 품 안에서 아무것도 몰라야 한다.

세상에서 전쟁이 나건, 밖에 태풍이 불건, 지진이 나건, 아기는 어머니만 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낼 수 있다.

유아기야 말로 긴 세월 동안 암흑 에너지 속 깊은 곳에 충분히 머물 수 있는 특권이 보장되는 시기이다. 

첫 1년 동안은 그야말로 '통합되지 않는 상태'에서 늘 브러지게 지낼 수 있는 소중한 기간이다. 

만일 이 기간 중에 아기의 어머니가 남편과 복잡한 갈등 상황에 있다거나, 시어머니나 시누이의 시기심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아기에게 전적으로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면, 아기는 암흑 에너지 속에서 충분히 머물지 못하게 된다.

어머니가 불안에 시달리고  긴장도가 높으면 아기에게 편안함을 제공할 수 없게 되면서, 어머니의 불안과 긴장은 그대로 아기의 것이 된다.

그런 상황에 처한 아기는 어머니의 품이 편하게 느끼지 못하게 되면서, 암흑 에너지에서 빠르게 빠져나와 현실을 깨달아 버린다. 


암흑 에너지에서 벗어나는 순간, 현실의 시간 개념이 아기의 몸에 확 들어가게 되면서 알 필요가 없는 현실을 자각해 버린다.

한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에게 현실과 물리적 시간 개념이 확 들어오는 순간 아기는 현실로부터 모독을 받게 된다. 

현실 모독을 당한 아이는 IQ를 빨리 발동시킴으로써 더 이상 환상 세계에 머물지 않게 된다.

더 이상 암흑세계의 암흑 에너지 안에 머물지 못하고 현실의 세례를 받아 명료성으로 확 깨어난다. 

이런 아이 중 어떤 아이는 천재가 되기도 하고 어릴 때부터 '영재 칭호'를 받는다.


그 아이는 암흑 에너지의 세계에 충분히 머물면서 그냥 평범하게 살 수 있었지만, 현실 모독을 당함으로써 부모와 주변 사람들의 칭송과 환호 속에  천재나 영재가 되어 가는 것이다. 


현실 모독을 당하는 순간, 아이는 머리와 몸이 분리되는 데카르트적 근대인의 옷을 입는다. 

수많은 세포, 복잡한 내장과 각종 기관에 유기적으로 흐르던 에너지들 중 많은 부분이 높은 아이큐를 돌리기 위해 필요한 많은 용량의 에너지 자원으로 차출되어 몸과 머리 간에 에너지 공급 불균형을 초래한다.

몸 구석구석으로 흘러 들어가야 할 에너지가 높은 아이큐 유지를 위해 차출되어 머리로 공급되면서, 이 아이는 탁월한 계산력과 남다른 기억력으로 무장하게 된다. 


어떤 천재는 3세에 미적분을 풀고, 7세에 5개국 언어를 터득했다.   

꼭 그런 정도의 천재는 못 되더라도 4세가 되면, 스스로 한글을 깨치고(1970년 대에는 3세에 한글, 4세에 천자문을 깨쳤다), 학교에 들어가면 초중고 다니는 동안 늘 전교권에 머문다.


그런 이유로 높은 아이큐를 가진 머리는 몸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일상에서 대가를 치른다. 

그중 어떤 아이는 감정이 없이 공부만 잘하는 아이가 되었다.

어떤 아이는 시험 때만 되면 장이 꼬이거나 설사를 한다. 

어떤 아이는 시험 중에는 거식을 하다가 시험이 끝나면 폭식을 한다.


자녀가 현실의 명료성에 너무 빨리 노출되면, 현실에서 일방성과 왜곡된 몰입이라는 부작용이 심각한 상태까지 치닫는다.

몸에 뿌리를 두지 않는 머리는 마치 뿌리 없이 위로 솟은 나무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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