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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는 새롭게 발견되어야 한다(3-3): 자유함의 결혼

여성성은 우주적 언어

                             (브런치에 그림 첨부가 안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림을 넣을 수가 없다.)

바라봄으로 존재하기


내가 젊을 때 쌍용그룹에서 근무했던 적이 있다.

내가 쌍용연수원에서 신입사원 교육 팀장을 맡아 신입사원들을 이끌고 쌍용제지 공장견학을 한 적이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따라 공장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인즉슨, 바로 전날 당직이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동안 수영장 같은 모양의 폐지 저장소에서 박테리아들이 다 죽어서 폐지의 오물처리 작동이 멈춰 버린 것이었다.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느냐는 질문에, 당직자가 급한 일로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길어져서 그랬다는 답변이 있었다.

그게 저 박테리아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물었더니, 박테리아는 누군가가 관찰하면서 시선을 주지 않으면 활동을 멈추고 죽어 버린단다.

그때 우리는 '박테이아와 같은 미물도 사람의 관심과 사랑과 시선이 없으면 생존할 수가 없는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신입사원들은 그것보다 더 큰 교훈을 얻은 것 같아 아쉬움 속에서도 내면의 큰 만족을 가지게 되었다,


과학에서도 관찰에 대한 유명한 실험이 있었다. 

1801년에 물리학자 토마스 영에 의해 실시된 이중슬릿 실험은 전자가 입자냐 파동이냐를 밝히는 중요한 실험이었다.

이 실험은 양자 역학을 과학으로 성립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실험으로 알려져 있다. 

전자가 이동할 때 파동으로 움직이는 중에 누군가가 관찰하는 순간 그 전자가 입자로 바뀌어 움직인다는 것이 이중 슬릿의 핵심이다.

곧 사람의 관찰이 사물 또는 사람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반증이다. 


양자 역학에서는 관찰자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코펜하겐 해석"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관찰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입자가 특정한 상태에 있지 않고 여러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달이나 다른 물체도 관찰되기 전까지는 특정한 상태에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즉, "달은 우리가 바라볼 때만 존재한다"는 말은 이러한 양자 역학의 해석을 단순화시킨 표현일 수 있다.


반면,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양자 역학의 해석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는 "달은 관찰자가 보지 않을 때도 존재한다"라고 주장하며, 양자 역학의 확률적 해석에 반대했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말인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그의 이러한 생각을 잘 나타낸 것이다. 

그는 물리적 현실이 관찰자의 관찰과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 두 가지 관점은 현대 물리학에서 여전히 중요한 논쟁거리이지만, 현재는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은 거시 물리학으로, 양자 물리학은 미시 물리학의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달은 옛날부터 존재해 왔지만, 누군가가 봄으로써 달이 진정한 달이 되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내가 우주의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이 세계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가 죽는 순간, 즉 인식을 멈추는 순간 우주는 사라지는 것이다.  

자연의 우주는 그대로 있겠지만, 자유함의 관점에서 우주는 그렇게 내가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우주가 존재하기 시작했고, 내가 죽음으로써 우주는 사라지는 것이다.


부부, 서로 마주 봐야 한다


앞의 글에서 언급되었듯이, K는 50세가 넘어가면서 집안의 모든 문제(자녀 문제, 남편과의 관계 등)가 다 해결된 것 같아 이제 삶이 평온해졌다고 했다. 

K가 하루는 친구들과 거제도 여행을 갔다가 친구들과 함께 인적이 드문 도로변을 걷던 중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같이 간 친구들이 처음에는 영문도 모른 채 지켜보다가 K의 울음을 멈추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단다.

그러다가 잠시 후, K의 울음이 전염되어 3명의 친구가 동시에 울음이 터졌다.

길을 걷다가 울고, 또 걷다가 올고 해서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주민들이 경찰에 신고하여 경찰차가 와서 그들을 파출소로 데리고 가서 울음을 달래 주었다고 한다.

본인들도 왜 우는지 주제도 없이 파출소가 떠나갈 정도로 울다가 3시간 만에 그쳤단다.

울 것을 다 울고 나니, 그때부터 남편이라는 울타리가 싹 사라져 버리더란다.

내가 보기에 K는 그 울음 울면서 지금까지 결혼 생활, 남편을 떠나보내면서 애도를 한 것 같다.


문제는 K의 나이 50이면, 인생 딱 절반 살았다는 데에 있다.

나이 50이 되기까지 결혼의 과제, 자녀 문제, 시댁/친정 문제 등을 해결하느라 함께 같은 방향을 보고 달려왔을 것이다. 

나이 50이 되기까지 부부가 한 방향을 바라보고 왔다면, 50이 되면 이제 서로를 바라봐야 한다.

이때부터 결혼의 진정한 의미가 발생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연애할 때 첫눈에 반했던 이유가 이제부터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이때이다.

대부분 결혼의 의미의 유효기간이 나이 50이 되면 거의 끝나간다고 생각한다.

그 유효기간은 '자연'에 입각한 결혼의 유효기간이다.


나이 50이 되면서 이제부터 '자유' 개념의 결혼, 즉 결혼의 의미가 '자연'(본성)에서 자유함으로 바뀌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을 추구하는 관계를 넘어 '자유'를 결혼으로 의미가 바뀌게 된다.

자유의 의미는 해방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부부간 서로를 확실하게 구속하는 데서 나온다.

부부는 이런 과정을 통과해야만  각자 자신의 내면 인격인 '여성성'을 획득할 수 있다.


여성성을 찾을 기회


남자나 여자나 모두 여성성을 이면 인격으로 가지고 있다.

모두 평생 여성성을 억압하면서 살아간다. 

이 여성성을 획득하지 못하면, 공허하고 허무하며 왜 사는지 모를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꼭 우울증만 걸리는 것은 아니다.

자기 내면의 여성성을 외면하기 위해 끊임없이 조적 상태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런데 여자가 여성성이 이면이 되는가?

소설가 이외수의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 책에서 중년기 여성성을 잃어버린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여자들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모성성을 차용해서 살아왔고, 몸을 남성화시킨 히스테리 상태로 평생을 지낸다.

결혼생활을 하면서 여성은 모성성과 남성성은 더욱 강화된다.

모성성을 발휘하지 못하면 남편을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남편의 기행을 이해할 수 없다.

어릴 때부터 여자는 모성성과 남성성을 함께 사용해 왔기 때문에 두 가지 정서가 여자 안에서 친화력을 가진다.

더군다나 중년기가 되면, 남편이 남자 답지 못하기 때문에 아내는 더욱 남자 역할을 하면서 남성화된다.

긴 세월 동안 여성에게 억압된 것, 이면 인격은 남성성이 아니라 여성성이다.

이런 관점에서 칼융은 여자를 오해했다.

융은 여자가 중년기가 되면 억압된 남성성을 끄집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한국여성들은 자녀에게도 엄마 노릇, 남편에게도 엄마 노릇하느라 모성성을 과용한 결과 모성성에 중독되어 있다.


남편은 가정을 먹여 살리느라 오랫동안 사회적 페르소나를 많이 사용해 왔다.

그 결과 자신 내면에 있는 여성성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중년기가 되면 남자는 짜증이 많아지고, 친구들 사이에 쫀스러워지며, 지밖에 모르고, 어릴 때부터 자신이 잘못했던 이런저런 실수들이 떠오르면서 수치스러움이 강하게 올라오기 시작한다.

남자가 사회적 페르소나를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내면에서 이런 장면들이 자꾸자꾸 떠오른다.

나이가 들수록 사라지기는커녕, 그 강도가 더 세어지게 된다.

이는 내면에 억압된 여성성이 작동하여 남자의 페르소나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중년기의 아내는 남편의 그런 상태를 알고 하는 건지 모르고 하는 건지, 자신의 감정을 남편에게 마구 쏟아내기 시작한다. 

남편은 그렇잖아도 내면의 여성성 작업 때문에 쫀스러워지고, 여성화되고 짜증이 많아지고 있는데 아내가  남편의 사정을 보지 않고 '지금-여기의 감정'을 마구 드러내기 시작하니, 남편은 아내에게 꼼짝을 못 하고 만다.


아내는 중년기가 되면서 그동안 남편으로 인해 억울했던 것을 더 이상 참지 않고 그동안의 남편의 비리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다 쏟아내기 시작한다. 

아내는 아내 대로 여성성을 찾아오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 정도 되면, 아내는 더 이상 남편의 여러 가지 사정을 이해해 주지 않게 된다. 

남편은 자기 비리에 대한 아내의 고발을 들을 때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끔찍하다.

아내가 그동안 억압했던 감정을 속사포같이 쏘아붙일 때, 남편의 심정은 당장 베란다 문을 열고 창문을 뚫고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로 끔찍하다. 


바로 이것이 중년기에 해야 하는 부부간의 작업이다

'자연'의 의미로서 결혼으로 그치고자 작정한 부부는 절대 이런 작업을 하지 않는다.

이제 사랑은 더 이상 달콤한 말을 주고받는다거나 서로 위로가 되는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 결혼의 의미가 진정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인데, 아내는 오랜 세월 가정을 살리겠다고 돈 벌어오는 남편을 이해하느라 오랫동안 억압해 온 억울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게 되고, 남편은 고통스럽게 아내의 감정을 담아주고 소화해 냄으로써 '자유함'을 추구하는 결혼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 가는 내공을 쌓기 시작한다. 


이것이 100세를 살아가는 부부의 새로운 패러다임, 자유함의 결혼의 의미를 찾아가는 패러다임이다.

K처럼 나이 50이 되면서 한 방향만 바라보는 부부라면, 가끔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달콤한 말만 주고받으면 된다. 


그렇지만 100세 시대 부부는 100편의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것과 같다.

100편이라는 긴 드라마를 찍기 위해서는 최소한 97편까지는 시청자로 하여금 긴장을 놓치지 않게 해야 한다. 이미 30편에서 50편의 드라마를 찍을 때는 별도의 긴장할만한 주제를 제시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주제들이 엄청 많았다.

결혼 후 부부간의 성격 차이 극복, 시댁 및 친정 문제, 자녀 문제 등등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문제들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이제 나이 50을 넘으면서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주제는 획기적으로 줄었다.

남은 50 편의 드라마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기 위해서는 uncanny적 요소들이 그때그때 들어와야 한다. 

uncanny요소는 외부에서 찾고자 하면 막막하기 그지없다. 

그동안 문제해결을 위해 부부가  한 방향으로 봐왔던 시선을 돌려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동안 20~30년 결혼생활 동안 쌓였던 문제들이 하나씩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특히 부부간 마주 보기로 작정하는 순간부터, 부부관계를 새롭게 관찰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여자는 몸에 억압해 뒀던 기억들이 하나씩 하나씩 스멀스멀 머릿속으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묵은지처럼 숙성되었지만, 날카로운 맵고 신맛이 그대로 남아 있는 여자의 감정이 남편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든다. 

남편은 모두 자기가 한 짓이기 때문에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남편은 그것을 자기가 줬던 것을 되돌려 받는 심정으로 고통스럽게 견디며 자기 것으로 받아 내면화하는 끔찍한 과정을 겪어내야 한다.

많은 아내들이 이렇게 해 보지만, 대부분의 경우 남편이 제압을 해 버려 결국 아내는 남편의 성질을 넘어서지 못한 채 포기하고 만다.

아내가 포기하는 순간부터 100편 종편을 향한 긴장감 있는 드라마는 멈추고 달달한 스토리로 이어가는, 맛을 잃어버린 드라마를 100편까지 만들어야 하는 멋대가리 없는 삶을 전전하게 된다. 

그 결과 각자 감정은 멈추게 되고,  몸은 병을 얻어갈 것이다. 

그때부터 부부는 원수가 되어간다.


그렇지만 이런 과제를 잘 수행하여 100편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드라마를 쓰는 만큼 수행하는 부부는 성숙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자유함'의 결혼의 의미를 획득하여 결혼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부부로 진정한 사랑이 뭔지를 알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런 부부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

백 쌍의 부부 중 하나도 드물다. 

천 쌍의 부부 중 하나도 드물다.

결혼의 '자유함'의 의미를 터득해 가는 부부는 얼마나 자신의 삶이, 그리고 부부의 삶이 자랑스러울까 싶다.

결혼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각자 안에 있는 '여성성'을 찾아내는 것이고, 부부 관계를 통해 이 여성성을 성숙시켜 나가는 데에 있다.

여성성은 우주적 언어이며, 영적 치유를 위한 승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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