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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7): 청소년기의 공격성

청소년기 부친살해의 환상과 상징

                         

청소년기의 부친살해 상징  


탐구자 : 초기 아동기에 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복잡한 관계를 감당해 냄으로써, 그 아이가 청소년이 될 때, 아버지를 통해 현실적으로 복잡한 세계로 진입하는 관계훈련을 경험하는 것이군요. 


분석가 : 청소년기에도 아들은 또 다른 의미에서 오이디푸스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때는 어머니를 놓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진출하게 될 세계를 놓고 아버지와 경쟁하게 됩니다. 청소년기가 되면 아동기 때 이상화대상으로서 거대했던 아버지가 만만해 보이거나 자신보다 보잘것없는 존재로 보입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세대차도 있습니다. 요즘 청소년들이 스마트 폰이나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반면에 아버지는 인터넷 뱅킹 하는 데도 쩔쩔매면서 자녀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죠. 자녀가 볼 때 그런 아버지가 얼마나 만만하게 보이겠어요? 뿐만 아니라 신장 면에서 봐도, 과거에는 5미터 거인이었던 아버지였는데, 이제는 자녀의 키가 훨씬 더 크게 되면서, 아버지는 더 이상 어릴 때의 위대하게 보였던 아버지가 아닌 것이죠. 아들이 과거에는 이상화 대상이었던 아버지를 현실로 끌어내리는 작업을 그저 사고(思考)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청소년기가 되면서,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세대차 또는 의견 차이가 발생할 때마다 반발과 항변과 저항을 동반한 공격성을 아버지에게 행사함으로써, 5m 아버지를 조금씩 깎아내리면서 나중에는 현실인 아버지의 자리, 170cm 크기의 아버지로 격하시키게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과의  끝없는 싸움을 힘겹게 싸워내는 중에, 결국 져 주는 싸움을 하게 되고 아들 앞에서 무력해진 자신의 현실적 위치를 확인하면서 하게 됩니다. 반면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권위를 무너뜨리면서, 어느 순간 아버지를 훌쩍 넘어서게 되고, 점점 어른이 되어 가게 됩니다. 


탐구자 : 그런 싸움이 끝나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아들이 아버지를 넘어선다는 면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렇게 당해도 괜찮은 건가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렇게 당하면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까요? 


분석가 : 이런 과정을 겪어내면서 아들은 아버지를 무시하거나 수치심을 주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며, 나도 아버지를 도전할 수 있을 만큼 컸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싸움이 청소년기를 거쳐 가면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가는 가운데, 아들은 아버지를 이기는 법을 배우게 되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때 아버지는, 앞 장에서 언급하였듯이, 아들과 맞서주는 싸움으로 본격적으로 싸워줘야 합니다. 

 탐구자 : 여기서도 ‘맞서주는 싸움’이 나오는군요.


 분석가 ; ‘맞서주는 싸움’이란, 위에서 말한 것과 똑같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권위로 눌러 버리는 싸움을 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쉽게 져 주는 싸움을 해서도 안 됩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아들의 도전에 화가 날 수도 있고, 성질을 못 이길 수도 있지만, 차츰  아들이 아버지 자신과 끝까지 싸워낼 수 있도록 논리를 동원하여 합리적인 싸움을 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빈틈을 파고들어 아버지를 꼼짝 못 하게 공격해 들어올 때는 구차한 변명으로 방어하지 말고 아버지는 침묵의 시간을 가지면서, 자신의 권위가 추락하는 수치감을 감당해 내는 아픔을 견뎌내면서 아들의 손을 들어주는 아량을 베풀어야 합니다.       


탐구자 : 그런 다툼이 끝나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또 그런 다툼을 통해 아들이 어른이 되어간다는 말씀은 또 무슨 뜻인가요? 


분석가 : 이것이 아들이 가장 건강하게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니다. 딸도 아버지와 이런 싸움을 싸울 수 있습니다. 상담 중이던 어떤 여자 청년에게 남편감으로 어떤 상을 가지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기본적으로 ‘아버지 같은 사람’이고, 거기에 자신이 원하는 플러스알파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를 물어봤습니다. 아버지는 저녁 10시가 되면 주무시고, 새벽 4시에 기상하여 냉수마찰하고 4시 30분에 성경을 읽고 5시에는 새벽기도에 가는 아버지였어요. 그것은 아버지 일상의 한 단면만 보여주는 부분인데, 매사에 철두철미한 완벽한 아버지였기에 딸에게는 그야말로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평소에 이 청년은 매우 순응적이고 아버지의 권위 앞에 늘 압도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이 좋은 것이고 건강한 것인 줄 알았죠. 그래서 나는 이 청년에게 ‘부친살해’의 개념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아버지 앞에서 얼마나 억압하고 지내 왔던가를 인식하게 되었고, 분석이 진행되면서 아버지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청년은 자신 안에 내면화된 아버지의 부분과 자신의 부분을 구별해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지나치게 이상화된 부분을 끌어내릴 수 있게 되면서 아버지의 현실적인 모습을 보게 되었고, 어떤 부분은 딸로서 오히려 가려줘야 할, 아버지의 연약한 부분을 보게 되었죠. 그럼으로써 그 청년은 아버지를 진정으로 존경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발견해 나가더군요. 과거에는 아버지의 권위가 완벽해서 존경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아버지가 너무나도 보잘것없어 보이고 매우 취약한 부분이 보여서 그것을 자식으로서 커버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측면들 때문에 존경하게 된 것입니다. ‘저렇게 약함을 가지고 나를 이렇게 키워내셨구나’하는 자각을 가지게 된 것이죠. 아버지의 권위와 아버지의 현실적 모습 사이의 갭을 알아가면서 그 갭을 존경으로 메워야 함을 알게 된 겁니다. 아버지의 비현실적인 권위를 무너뜨리고 그 갭을 존경으로 메워가는 만큼 그 청년은 건강한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탐구자 :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부모 역할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가를 생각하니까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자녀가 부모를 양육하게 됩니다. 이러한 부친살해 또는 모친 살해가 일어나는 과정은 부모-자식 간에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의 과정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에 의해 깎임을 당하면서 많은 부분들을 자식에게 넘겨줘야 하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자녀가 어른이 되어가지만, 아버지는 성숙한 아버지가 됩니다.


탐구자 : 어떤 자녀들은 부모를 공격만 하고 무시하고 부모를 떠나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까? 


 신학자 : 그런 현상은 십자가 앞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보면서 저주하며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 예수님의 보잘것없어 보이는 모습이 바로 내 죄와 내 연약함을 위한 것임을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때 믿음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존재의 크기로 낮아지는 곳, 그곳이 바로 십자가이고, 그 보잘것없는 십자가에서 믿음의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철학자 : 헤겔의 ‘종교 철학’을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해석이 나옵니다. 헤겔은 ‘십자가에서 아들의 죽음은 곧 아버지의 죽음이다. 아들은 부활 승천하신 후 아버지 하나님이 되셨고, 아버지는 스스로 자기를 낮추셔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성령 하나님이 되셨다’라고 해석합니다. 


분석가 : 그렇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부친살해 함으로써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게 됩니다. 그렇다고 아들의 부친살해는 아버지 자리를 찬탈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는 아버지를 넘어섬으로써 아버지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아들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면 자녀를 낳게 되고, 그때 그 아들은 당당한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내게 아버지 자리를 물려준 나의 아버지는 그냥 뒷전으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낳은 자녀, 즉 손주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 손주는, 자식 키울 때와는 달리, 눈에 넣어도 안 아픈 핏줄입니다. 만일 부친 살해가 없었다면, 그 아들은 ‘내가 어릴 때는 내 아버지가 저렇게까지 사랑해 주지 않으셨는데, 내 자식한테는 저렇게까지 잘해 주시네’ 하면서 분노를 하게 되겠죠. 그러나 부친살해의 과정을 겪은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내 자녀를 사랑해 주시는 것이 너무 고마울 뿐입니다. 


신학자 : 아버지가 아버지의 자리를 아들에게 내어 주고 손주를 사랑하듯, 아버지 하나님은 아버지의 자리를 내려놓고 스스로 자기 비하를 감행하시면서 성도 안에 내주 하시기를 자처하시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아버지의 자리를 내어 놓고,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성령 하나님이 되시는 사건, 이것이 바로 헤겔이 말하는 ‘하나님의 부친살해’입니다. 


탐구자 : 어쩌면 부모 자식 손주의 관계가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의 사역과 그렇게 유사할 수가 있는 거죠? 놀랍습니다. 


분석가 : 그래서 리쾨르는 ‘부친 살해 환상’이라는 용어 대신 ‘부친 살해 상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아들은 부친살해 과정을 겪어가면서 공격성을 건강한 자기 주장성으로 분화되고, 성적 리비도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으로 분화해 가게 됩니다. 그 결과 이런 청년은 신체와 정신의 갭을 메워가게 됩니다. 


탐구자 : 신체와 정신의 갭을 메워간다는 것이 청년들에게는 어떤 현상으로 나타날까요?  


분석가 : 신체-정신이 그런 상태가 되면, 그가 세상에 나갈 때 어느 누구도 나를 침범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불필요한 싸움을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런 아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을 아버지와 싸워냈기 때문에 사람들과 관계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세계를 보는 시야가 달라집니다. 더 이상 세상에서 싸울 일이 없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분노도 없고 싸움도 없어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최소화되고 엉뚱한 갈등상황이나 억울하게 오해를 당하는 사건에 휘말리지 않게 됩니다. 부친살해 또는 모친 살해 과정에서 이 과정을 겪는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관계 성숙을 이룩해 가게 된다는 것이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됩니다. 아들이나 딸은 아들 딸 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 인간의 행복이 깃들어 있음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탐구자 : 만일 아들이 그런 부친살해 과정을 겪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분석가 : 그래서 리쾨르가 일단 용어로 구분을 하는 겁니다. 그런 과정을 겪지 못한 아들은 ‘부친살해환상’의 상태에 머물게 되고, 그 과정을 겪어낸 아들은 ‘부친살해 상징’의 상태로 넘어가게 되는 겁니다. 전자의 상태에 머물게 되면, 평생 권위자와 싸우게 되고, 입에 비판과 욕설을 달고 다니고, 늘 불평과 원망 등의 원한 감정으로 가슴이 부풀어 있죠. 누군가가 이런 사람을 잘못 건드리게 되면, 큰 봉변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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