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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전쟁(5): 독재로 통찰력을 잃은 이승만

이승만의 무서운 통찰력


20대 이승만은 총기가 넘치는 청년이었다.

일본에게 야금야금 먹혀들어가는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컸지만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관심은 국제정세로 확장되면서 당시 일본이 40년 후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 것인가를 예견하였는데, 그것이 그대로 적중하였다.

25세에 한성감옥에서 쓴 일기장을 바탕으로 그 이후의 국제정세를 정리해 37년이 지난 1941년 8월에 [Japan Inside Out]을 출판하였다.

그 책이 출간된지 4개월이 지난 12월 7일 아침 7시 55분에 일본은 진주만을 폭격했다.


‘대지’의 작가로 유명한 미국의 펄 벅(Pearl S. Buck)은 이승만의 책에 대한 서평을 이렇게 썼다.



이것은 무서운 책이다. 나는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으나 오직 너무 진실인 것이 두렵다. … 나는 이 박사가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 곧 미국이 1905년 수치스럽게 조·미수호조약을 파기하고, 그럼으로써 일본이 한국을 집어삼키도록 허용했다고 말해준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 박사는 ‘이것이 큰 불이 시작되는 불씨였다’고 말하는데, 나는 이 말에 정말로 두려움을 느낀다.”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 p22~23)


이승만은 1904년까지 한성 감옥에 있었고,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그 을사늑약이 이루어지기 앞서 조선에 대한 미국의 배신이 있었다.

펄벅은 이 글에서 미국이 조선을 배신하여 일본에게 조선을 넘겨준 작은 불씨가 진주만 폭격으로 큰 불로 되돌려 받았다는 이승만의 지적에 감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성감옥에서 일기장에 쓴 내용은 나라를 위한 걱정에서 비롯된 글이라면, 1941년에 출판한 책은 일본 정세에 무지한 미국 국민을 일깨워주기 위한 책이었다.


이 책은 2년간의 집필로 나온 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1904년의 한성 감옥에서 쓴 일기장이 그 근본 내용이 되고 그 이후에서 당시까지의 국제 정세를 통찰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이승만의 예견대로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승만은 미국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우리나라는 해방되었고,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독재자가 된 이승만


독립운동가로서 이승만은 존경스러웠지만,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은 어땠을까?


앞의 글에서 보았듯이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두 가지 평가를 받고 있다.


첫째, 국부로서의 이승만

둘째, 독재자로서의 이승만


이 두 가지 평가로 오늘날까지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진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나라의 좌파와 우파는 이승만에 대한 두 가지 평가로 갈라진다.


이승만은 권력을 잡으면서 예전의 통찰력을 상실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한반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다.

36년 전에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것을 통찰했던 이승만이 가장 가까이 있는 북한이 남한을 침략할 것에 대해 예견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것은 권력욕에 파묻혀 국제적 감각과 한반도를 보는 그의 통찰력이 흐려졌다고 밖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권좌에 앉자 그는 서서히 독재자가 되어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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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는 독재자가 되었나?

사람은 아무리 순수하고 고고한 사람일지도 권력의 자리에 앉으면 본래의 순수했던 사고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보다.

모택동도 그랬다.

권력을 잡기까지 그는 붓 하나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가 권력을 잡는 순간부터 그의 순수함은 변질되기 시작하여 문화혁명으로 중국 전역을 초토화시켰다.

순수했던 지도자가 독재자로 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택동은 여전히 국부로 추앙을 받고 있다.

중국에서 건드려서는 안 되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모택동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승만과 모택동의 차이가 무엇인가?

물론 두 지도자가 권력을 잡기 이전의 이미지에도 많은 차이가 있지만, 국가를 다스릴 만한 남다른 안목과 통찰력을 가진 것은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물론 내 개인적 사견이며, 이 말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의를 달 수 있음을 감안하고 읽으시기 바란다).


두 사람 공히 독재를 하였지만 실정후 한 사람은 권좌에서 내려와야 했고, 한 사람은 독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의 차이가 뭘까?

그 차이는 한국은 최고 권위자에 대한 부친살해를 감행했고, 중국은 여전히 부친살해를 해 본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각도를 좀 바꿔 말하자면, 한국은 언제든지 부친살해가 가능한 나라이지만, 중국은 부친살해를 해 본 적이 없는 미성숙한 나라다.

그점은 두 나라의 긴 역사 속에서 드러난다.


권위자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차이


물론 중국은 수많은 왕조가 들어서고 망하고를 거듭한 나라이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는 권위자에 대한 신하들의 태도에 있다.


중국은 절대 군주였다.

중국은 왕조가 무너지지 않는 한, 황제는 재위기간 중 어떤 뻘짓을 해도 황제의 자리는 절대 위협받는 자리가 아니다.

어떤 황제는 수백 명의 후궁들을 데리고 왕궁을 떠나 몇 년 동안 외지에 머물러 별도의 아방궁의 차리거나 유람을 다녀도 아무도 그 권좌를 넘보지 못한다.

황제가 왕궁을 비우면 그의 권력은 환관들이 대신 휘둘러 아무도 권좌를 넘볼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에는 환관들의 비리들이 많았다.


그러나 조선왕조 500년 동안 환관들이 나서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러 문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거기에는 별다른 이유가 있다.

중국의 황제는 절대 군주이지만, 조선의 왕은 윤허하는 왕이기 때문이다.


이성계를 도와 고려를 무너뜨린 정도전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권력을 이중 구조로 만들었다.

정치는 신하가 하고 왕은 신하들의 정치에 대해 윤허하는 일만 하게 만든 것이다.

왕이 윤허하는 권력만 가지고 많은 신하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조선시대 신하는 과거시험을 통과한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같이 학문과 문장에 능한 자들이기에 윤허하는 권력만 가진 왕으로서는 그런 신하들에게 만만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

사도 세자가 죽은 이유를 한 마디로 하면, 왕이 될 자가 공부를 안 한다는 것이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왕이 공부를 안 하면 왕의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나라는 '조선'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왕은 신하들에 의해 언제든지 부친살해를 당할 수 있는 매우 나약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중국은 한 번도 부친살해의 위협을 당해 본 적이 없는 나라다.

그런 차이가 한국과 중국 사이에 엄청난 발달의 차이로 나타났다.

모택동, 등소평은 죽을 때까지 권력을 쥐었고, 시진핑의 소망사항도 바로 그것일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근대화를 제대로 이룰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권위자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부친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권위자에 대한 부친살해 상황은 어떠한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하야하여 하와이로 망명을 갔고, 박정희 대통령은 총기 살해 당하였으며, 최규하 대통령은 강제로 하야를 당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친구 잘못 둔 죄를 따져 탄핵을 당했다.

어디 그 뿐인가 4명의 대통령이 대통령 직을 끝낸 후 감옥에 가는 수모를 당하고, 한명의 대통령은 의도치 않은 자살을 감행했다.

건국 이후 13명의 대통령 중 7명이 부친살해를 당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위험한 직업 중 하나가 바로 대통령이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부친살해가 많이 일어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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