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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전쟁(4) : 이승만에 대한 평가

부정적 평가와 긍정적 평가

40년 후의 진주만 폭격을 예견한 이승만


1875년에 태어난 이승만은 1894년 부패한 이순신 정부에 반대하고 대한독립을 주장하기 위해 독립협회를 조직하는 데 일조했다.

1898년 협회는 우익반대자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이승만은 반역죄로 1904년까지 투옥되었다.

1900년 이승만이 25세가 되던 때 한성 감옥에서 쓴 일기장이 나중에 주목을 받게 된다.


"언젠가는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한다고 합니다. 그 의구심이 섞인 그런 문장을 기록합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무려 40여 년 전에 전쟁을 예언했던 선구자였습니다. 말하자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분이고 그게 [Japan Inside Out]이라는 책으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지금 세계적인 정세에서 어떤 국면에 처해 있어도 곧 도발을 할 거다 도발을 하면 결국 질 거다. 지면 우리가 해방이 된다는 이야기까지 내다볼 수 있었던 안목은 다 그런 글로벌한 시각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의 그런 노력이 30년 누적이 되면서 나온 겁니다."(영화 [건국전쟁] 중에서 인용)

이런 안목이 얼마나 탁월한가는 이정주 시인의 말을 들어 보면 더 분명해진다.

어느 TV에서 이정주 시인에게 '왜 친일을 했느냐?'라고 물었을 때, 이정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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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이 영원히 승리할 줄 알았다. 그 시절에 어느 누구도 일본이 망할 것이라고 예견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라고 답변했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40년 전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을 경고했고, 패망할 것을 예견했다.

그의 일기를 담은 내용을 비롯하여 그 이후에 일본과 조선과의 관계를 기록한 국제 정세를 담아 진주만 폭격(1941년 12월 7이) 이 일어나기 전 1941년 [Japan Inside Out]을 출판하였다.

이승만의 예언대로 진주만 폭격이 일어나자 미국에서 이승만의 평판은 크게 상승했다.


그의 모교 Princeton 대학에서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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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된 유산을 지닌 선구자: 프린스턴 대학의 이승만(2023년 10월 11일 )

Maya Chu

양극화된 유산

한국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유산은 점점 더 독재적인 통치, 제한적인 경제 발전, 정치적 불안정으로 특징지어지는 집권 기간으로 인해 훼손되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 직후 정치적 반대 의견을 심각하게 억제하는 법률을 시행했습니다. 그는 국회에서 자신에게 반대하는 의원들을 숙청했고 나중에 야당인 진보당의 조봉암 대표를 1959년에 처형했습니다. 그는 또한 지방 관리들의 임명을 통제하고 공산주의 의심자들을 구금하고 고문했으며 폭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했습니다. Daniel Chong '27에 따르면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의 할아버지는 이승만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 도중 체포되었습니다.

정 씨는 “할아버지가 정권에 맞서 싸운 학생 시위자 중 한 명이었고 그로 인해 체포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사실이 더 와닿는다”라고 말했다.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싸웠고 많은 것을 성취한 사람이... 자신이 봉사해야 할 사람들의 시민권을 억압함으로써 권력에 대한 탐욕에 빠졌다는 것은 꽤 비극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은 1960년에 재선 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부정 선거 관행으로 승리했다고 의심했습니다.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가 발생했고 1960년 4월 11일부터 26일까지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은 사임하고 하와이로 망명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이승만에게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동창들은 이승만 대학에서 초기 아시아 역사의 선구자로서 프린스턴에서의 이승만 유산을 더 많이 인정하도록 촉구했습니다.

2012년 한국 프린스턴 클럽은 이승만의 이름으로 로버트슨 홀의 16번째 볼을 헌납하기 위해 480,000달러를 모금했습니다. 그릇은 결국 이름이 바뀌었고 정운찬 전 한국 총리 GS '78이 행사에서 연설했습니다.

김종석 GS '88은 당시 Princeton Alumni Weekly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과 외교적 능력이 없었다면 자유로운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상의 기사 내용으로 볼 때, 프린스턴 대학은 좌경화된 대학으로서 나름 균형을 잡으려고 작은 노력을 잊지 않았다.


국부로서의 이승만에 대한 긍정 평가

(나무 위키 참조)

정치에 대한 평가

1.1. 대한민국 정부 수립

1.2. 남녀평등 투표권 부여

1.3. 시장경제체제 도입

1.4. 대한민국 공산화 저지

1.5. 자유민주주의 도입

1.6. 제대로 된 장성 : 사병 급여 비율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2.1. 농지개혁법 시행

2.2. 초등교육 의무화 및 교육개혁

2.3. 고등교육 투자


외교에 대한 평가

4.1.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4.2. 반공포로 석방

4.3. 6.25 전쟁 초기 미국의 지원 유치

4.4. 전후 미국의 대규모 지원과 원조 유치

4.5. 이승만 라인(평화선) 선포


경제에 대한 평가

5.1. 경제개발의 초석 마련

5.2. 한국 원자력 발전의 아버지

5.3. 국익을 위한 환율 정책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평가(나무위키)


정치에 대한 평가

2.1. 독재

2.1.1. 정치깡패와 서북청년회

2.1.2. 국가보안법 제정 및 남용

2.1.3. 진보당 사건

2.1.4. 견통령 사건

2.1.5. 발췌 개헌

2.1.6. 사사오입 개헌

2.1.7. 2.28 학생민주의거

2.1.8. 3.15 부정선거

2.1.9. 4.19 혁명

2.2. 인사 실패

2.3. 친일몰이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3.1. 한글 간소화 안

3.2. 새로 만든 화폐에 자신을 새김


학살

4.1. 비(非) 민군작전 학살

4.1.1. 여수·순천 10.19 사건 때의 민간인 학살

4.1.2. 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

4.1.3. 보도연맹 학살 사건

4.1.4.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4.1.5. 제주 4.3 사건 시기 민간인 학살

4.2. 후방지역 공비토벌 시 민군작전 학살

4.2.1.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 사건

4.2.2. 고양 금정굴 학살 사건

4.2.3. 거창 양민 학살사건

4.2.4. 산청, 함양 양민 학살사건

4.2.5. 문경 양민 학살사건

4.2.6. 강화 양민 학살사건

4.3. 북진작전 시 수복지역 민군작전 시 학살

4.3.1. 북한 지역에서의 민간인 학살


외교·안보·국방에 대한 평가

5.1. 일본 망명 시도 논란

5.2. 미흡한 전쟁 대비

5.3. 한국전쟁 초기 허위 전황 방송

5.4. 한강 인도교 폭파

5.5. 국민방위군 사건

5.6. 일본을 상대로 한 테러 시도


경제에 대한 평가

6.1. 전형적인 제3세계 독재국가형 경제



주요 인사들의 긍정 평가(나무 위키에서 인용)


전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이승만아시아반공국가 및 비공산국가군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을 통하여서, 뿐만 아니라 때로는 미국과 맞서기를 서슴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런 지도자가 되었다. 이승만은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그는 아시아인이었다. 그는 강력한 지도자였다. 성장하는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었다. 반공지도자일 뿐 아니라 반(反) 식민지 지도자였다. 많은 아시아인들에게 이승만은 극동지역에 존엄과 자존심을 가져다준 인물이었다. 이런 이미지는 그가 한국의 동맹국인 강력한 나라들의 의지에 끌려다니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맞서 전쟁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고 있다는 점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회고록 《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 中)


영국 외무상 셀윈 로이드(Selwyn Lloyd)

이승만은 내가 만나본 한국인들 중 고령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가장 날카롭고 월등히 뛰어난 인물이다.


장면

이 박사 밑에 국무총리로서 1년 가까이 지낸 내가 본 그분은 장점도 많고 단점도 많았다. 그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일평생 독립운동에 바친 공적이 이를 말하고도 남는다. 특히 대외적으로 철석같은 반공 태세, 의연한 대일(對日) 태도, 과감한 반공 포로 석방 등은 이 박사의 용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독립 주권 의식의 철저한 시범도 경복 할 만큼 위대했다.



허정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19의 노도가 장안을 휩쓸었을 때 비로소 민의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한 그는 부정을 보고서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것이라며 깨끗이 권부에서 물러났다. 젊은 학생들의 애국 기상을 가상히 여기고 국민이 원한다면 사퇴하겠다면서 자진해서 대통령직을 내던지고 하야함은 이승만이 아니고서는 하지 못할 결단이었다. 우리는 그의 마지막 모습만을 보고 그의 전부를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한반도 전체의 적화를 막은 그의 슬기와 용단만으로도 우남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 커다란 공적을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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