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영역, 중간현상, 중간대상(3)
1968년 프랑스의 낭트 대학에서 대학생들의 데모가 일어났다.
처음에는 그들의 요구는 매우 단순했다.
여학생들은 남학생 기숙사에 들어오게 하면서, 왜 남자는 여자 기숙사에 못 들어가게 하느냐? 하는 항의였다.
말하자면, 남녀 차별을 금지하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요구는 갈수록 사회전반으로 확산되면서, 권위주의 타도, 거대담론, 전통적인 문화적 규범과 가치에 대한 강한 반대로 확산되었다.
여기에는 확립된 성 역할, 가족 구조 및 성적 관습을 거부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사회의 보수적인 문화적 기반에 도전하면서 성적 해방, 여성의 권리, 개인의 자유 확대를 장려했다.
이 혁명은 거대 담론(종교, 신, 역사 등) 및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68 혁명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고, 오랫동안 구조주의의 영향하에 있었던 그 구조를 파괴하는 후기 구조주의를 등장하게 했다.
마오쩌둥이 주도한 중국의 문화 대혁명(1966~1976)은 중국 사회에서 자본주의, 전통, 문화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공산주의 이념을 보존하고 영속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주요 특징과 동기는 다음과 같다.
1. 마오주의 이데올로기:
문화 대혁명은 자신의 통제권을 다시 주장하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부활시키려는 마오쩌둥의 열망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혁명적 원칙을 배반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공산당과 사회 내의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2. 낡은 문화의 파괴:
4대 낡은 것(낡은 관습, 문화, 습관, 사상)을 파괴하여 새로운 사회주의 문화를 창조하고자 했다. 여기에는 지식인에 대한 공격, 문화재 철거, 중국 전통문화 탄압 등이 포함됐다.
문화혁명은 수천 년의 중국 역사와 문화적 자료들을 파괴했다.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간자체는 수천 년의 역사적 문화적 자료와의 단절을 가져오는 부정적 효과를 낳고 있다.
3. 권위의 타도
주로 젊은이들로 구성된 홍위병은 기존 권력 구조를 붕괴시키기 위해 교사, 공무원, 심지어 가족을 포함한 권위자들에 도전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홍위병은 권력구조에 도전하고 해체하려고 했다.
그들의 도전은 평소 자신과 가장 가까이 지냈던 권위자들의 죽음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프랑스에서는 학생과 노동자가 권위주의 정권과 보수적인 문화 규범에 맞서 단결했다.
중국에서 홍위병은 권위를 타도하고 자본주의와 전통적 요소를 근절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청년들은 두 혁명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에서는 대학생 청년들이 시위의 최전선에 섰고, 중국에서는 주로 중고등 대학생들로 구성된 홍위대가 문화 대혁명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젊은이들의 이러한 참여는 두 운동 모두에 역동적이고 때로는 급진적인 에너지를 가져왔다.
두 혁명 모두 중요한 문화적, 이념적 변화를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68년 프랑스혁명은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의 부상에 기여하여 오랜 지적 틀에 도전했다.
중국의 문화 대혁명은 비록 국가의 문화유산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낡은 문화 관습을 근절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문화를 주입하려고 했다.
두 혁명의 유산은 복잡하고 다면적이다.
프랑스 68 혁명은 사회적, 문화적 규범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권위와 개인의 자유에 대한 다음 세대의 견해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리오타르가 제창한 포스트모더니즘에 편승해 견고하게 유지되어 온 구조주의를 해체하는 후기 구조주의 철학 사조를 낳았다.
중국의 문화 대혁명은 중국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중국의 문화적, 지적 지형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중국은 지금까지 서구적 근대사회와 근대문화를 맛본 적이 없다.
근대화를 맛본 적이 없어 중국은 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할 수 없다.
오로지 공산주의만이,,, 5000년 역사상 굶어 죽는 사람이 없는 사회를 만든 것은 공산주의뿐이었기 때문에 그 이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가 없다.
그들의 찬란한 문화 속에는 나, 주체가 없다.
수많은 수려한 한시 속에는 1인칭 주어가 없다.
근대화를 맛본 적이 없어, 근대사회의 모순을 알지조차 못하고, 뭐가 결핍되어 있는지, 무엇을 성취하지 못했는지를 알기 못한다.
조국에 대한 만족도가 가장 높은 나라, 90% 이상의 국민이 자신의 나라에 대해 만족하고 있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근대를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형성된 주체가 없고, '나'라는 개인이 없다.
민주주의는 모순과 결핍과 갈등 및 논쟁을 전제로 하지만, 공산주의는 이것들을 허용하지 않는다.
중국은 자신들이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채워지지 욕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신을 주장할 수 있는 정신적 심급인 자아(ego)도 고유한 자기(self)도 작동시키지 못한다.
오로지 당이 개인의 심급을 당이 원하는 대로 작동시키고 있을 뿐이다.
당만이 1인칭이자 시진핑만 1인칭이다.
대한민국은 5000만 명 각자가 '존엄'이자 1인칭의 자아를 가지고 있지만, 북한은 김정은만 홀로 '존엄'이자 유일한 1인칭이듯이...
중국이 일방적인 당주도로 경제근대화를 이루었다고 주장해도 그 국민들은 근대사회를 경험한 적이 없다.
국민이 근대사회를 경험한 적이 없다는 말은, 주체적 자아로 살아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프랑스의 68 혁명은 문화혁명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혁명의 진원지와 뿌리가 다르다.
데카르트가 프랑스인이 아닌가?
데카르트는 스스로 생각하는 1인칭 주체적 자아를 개발했다.
프랑스혁명은 1789년에 일어나 봉건제를 폐지해 시민사회를 이룩하여 법 앞에 평등이라는 근대적 주체를 만들었다.
프랑스혁명의 주축이 된 중산층 부르주아 계층의 부상으로 자본주의를 이끄는 선두 주자가 되었고, 국가가 가톨릭 교회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토지를 압수하는 등 세속화에 기여했다.
자유, 평등, 박애를 모토로 한 혁명은 보다 폭넓은 참여를 유도하는 무대가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참정권 확대를 통해 국민주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프랑스혁명은 혁명은 전통적인 사회 계층을 무너뜨리고 능력주의 사상을 장려하여 프랑스의 미래 사회, 정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대개 민주주의의 발달을 역사적으로 검토할 때, 프랑스혁명의 기여를 언급한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프랑스혁명은 실패한 혁명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프랑스혁명 역시 전통적인 이분법적 순환논리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혁명은 폭정을 타도하고 자유를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루이 16세의 절대왕정에서 로베스 피에르가 이끄는 공포정치의 극단적 권위주의로 바뀌었다.
이러한 극단 사이의 진자 변동은 안정적이고 온건한 정부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혁명은 평등을 추구했지만, 종종 한 형태의 불평등을 다른 형태로 대체하는 결과를 낳았다.
서로 다른 파벌, 예를 들어 자코뱅 대 지롱댕 사이의 권력 투쟁과 독재자로서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궁극적인 부상은 현실과 이상의 이분법적 대립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이다.
심신 이원론으로 시작된 데카르트의 이분법은 주객 이원론으로 형식화된다.
데카르트로 인해 근대적 주체를 만들어 냈지만, 근대적 주체는 객체를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겨 개발 대상, 정복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제국주의를 만들어내는 주된 요인이 된다.
이렇게 볼 때 프랑스의 사상적, 정치적 혁명은 모두 실패로 끝난 셈이다.
그것은 68 혁명도 마찬가지이다.
1968년 혁명은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여학생의 남학생 기숙사 출입을 허용하되 그 반대는 허용하지 않는 정책에 항의하는 낭트대학교의 겉으로는 솔직해 보이는 성평등 요구에서 시작됐다.
이 시위는 차별에 반대하고 성해방과 여성의 권리를 증진하기 위한 더 광범위한 운동으로 빠르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혁명의 접근 방식은 종종 사회 규범을 억압과 해방이라는 엄격한 범주로 양극화하는 이분법적 사고로 특징지어졌습니다.
1968년 혁명의 핵심 측면은 권위주의와 전통적 문화 규범에 대한 반대였다.
이 운동은 전통적인 성 역할, 가족 구조, 성적 관습 등 기존의 권위 구조를 해체하려고 했다.
새로운 것을 선호하고 낡은 것을 거부하는 것은 종종 권위가 본질적으로 억압적이며 자유가 본질적으로 미덕이라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견해로 이어졌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일부 전통적인 구조의 복잡성과 잠재적인 이점을 인식하지 못하여 건설적인 대화가 무너지고 안정적인 개혁의 가능성이 무너졌다.
1968년 혁명은 종교(신), 역사, 기성 이데올로기 등 거대 담론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러한 반대는 이러한 거대 담론을 억압의 도구로 위치시키고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완전한 거부가 필요하다는 이분법적 견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 이분법적 접근 방식은 이러한 담론이 사회적 결속과 정체성을 제공하는 데 있어 수행하는 미묘한 역할을 무시했다.
이러한 무시는 이념적 분열을 초래하고 응집력 있고 지속 가능한 사회 질서의 발전을 방해했다.
권위에 대한 운동의 급진적 반대는 절대적인 자유의 추구가 혼란과 불안정을 초래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초래했다.
극단적인 반권위주의 적 입장은 모든 형태의 구조화된 통치가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어 효과적인 리더십과 조직적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형태의 권위에 대한 거부와 그에 따른 어떤 형태의 질서에 대한 필요성 사이의 이러한 진자는 프랑스혁명의 실패를 반영했다.
프랑스혁명에서는 군주제가 무너지고 이어서 공포정치 하에서 권위주의 통치가 등장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68년 혁명의 평등 추구는 종종 한 형태의 불평등을 다른 형태로 대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추진하고자 하는 '차별금지법'과 같다.
그런 법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기 위해 대다수를 억압하고 차별하는 역차별이 발생하게 한다.
전통적인 권력 구조를 해체하는 데 초점을 맞춘 운동은 때때로 새로운 형태의 배제와 차별을 가져온다.
성적 해방과 개인의 자유를 장려하는 동시에, 이 운동은 때때로 전통적인 가치관을 고수하거나 자유와 해방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딱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을 소외시켰다.
이는 진보적인 변화라는 미명 하에 새로운 사회적 분열과 지속적인 불평등의 순환을 만들어냈다.
문화혁명은 중국의 전통과 문화유산, 역사와의 단절을 가져 옴으로써 엄청난 퇴보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것을 실패로 보지 않는다.
공산주의적 혁명의 완성을 위한 과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근대적 시민사회를 경험하지 못한 그들은 오직 5000년 역사상 백성의 굶주림을 해결해 준 유일한 체제로 여기기 때문에 그들의 결핍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물질적 결핍을 채워준 훌륭한 체제라는 자부심이 전부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정서적 결핍, 욕망의 결핍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데카르트, 프랑스혁명, 68 혁명, 후기 구조주의 등 모든 혁명은 실패한 혁명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근대적 시민사회를 경험했기 때문에, 근대사회의 이상을 이분법적으로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실패와 결핍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결핍에 배고파하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결핍은 오로지 중간영역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
중국에는 근대적 사회를 경험한 적이 없어 중간영역이 생성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프랑스는 데카르트 이후 이분법적 사유를 해 왔기 때문에 중간영역이 들어갈 틈새가 남아 있다.
- to be continu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