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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남이대녀 결혼 못하는 이유

역가의 차이

여자는 역가가 높다.

역가가 높다는 것을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쉽다.

첫째, 상황에 대한 변화가 빠르다는 것이다.

둘째, 어떤 역경에도 잘 견뎌낸다는 말이다. 


빠른 변화


2000년 이전 미국이나 캐나다 이민을 간 부부가 이혼하는 경우가 잦다고 한다.

부부간에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 방법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남자는 한국에 있으나 미국에 있으나 큰 변화가 없다.

어울릴만한 친구 그룹을 찾아서 함께 골프 치고 술 마시며 했던 이야기 또 하고...

그런데 여자는 환경의 변화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한국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억압받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던 여자가 미국을 가서 교포들과 교제를 하는 중에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억압받고 살아왔는가를 알게 되면서 억울해한다.

교포사회에서 어울리다 보면 교포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살고 있는가를 발견하면서 자신도 새롭게 발견되기를 원하면서 새로운 삶을 꿈꾼다.

이 정도 되면 이제 미국 사회에 와서도 변할 생각이 없는 남편이 걸림돌이다.

그래서 이혼을 감행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역경 극복

한국 여성은 바로 어떤 환경에서도 잘 견뎌 낸다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멀리 올라갈 것도 없이 조선 시대까지만 올라가도 여성들의 희생과 헌신은 쉽게 인정된다. 

조선시데의 양반 가문 정도 되면, 남편이 벼슬을 하지 않는 한, 그 가정의 경제는 매우 어렵게 마련이다.

오늘날과 같이 남자가 취직하여 온 가정을 먹여 살리는 일은 조선시대에는 불가능했다.

말이 양반이지, 양반가문에 태어나서 학문에 힘쓴 결과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얻지 못하면 남자는 대개 동네 한량이에 불과하다.

마치 고시 공부하는 남편을 위해 뒷바라지 해 주는 여자의 입장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조선시대 정상적인 양반 가문의 선비라면, 비슷한 계층의 동료들과 모여 유람을 다니며 풍류를 즐길 줄 알아야 하고, 기생집을 들락거리며 첩을 한 명쯤 거느리는 것은 당연했다. 

아내는 남편의 유흥비까지 대야 했고, 심지어 기생집에서 머무는 동안의 비용을 지불할 수 있도록 삼지돈을 넉넉하게 넣어 줘야 하는 것조차도 아내의 몫이 된다.

조선시대 각 가정의 경제적 문제는 아내들이 다 해결해 왔다. 

그런 정신을 물려받은 한국 여성들은 한국 여성들의 집단 무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 여성은 어느 민족 보다 모성성이 강하기 때문에, 남편을 위해 또는 가정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렇지만 오늘날 젊은 여성들은 이런 모성성을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엄마 같은 여자를 찾는 남자들

지금의 부모세대까지만 해도 남자가 여자를 찾을 때는 엄마 같은 여자를 찾았다.

또한 여자들도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모성성을 많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어머니 역할을 하는 데에 매우 익숙해 있었다.

결혼한 후에는, 남편은 자신의 아내에게 자신가 생각하는 여성성을 투사하는 데 그 여성성이란 바로 모성성인 것이다.

모름지기 조선시대부터, 또는 그 이전부터 대대로 여자들은 결혼 후에도 모성성을 발휘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바람직한 여인상은 바로 [현모양처]이기 때문에 결혼한 여자가 온 가족을 위해 모성성을 사용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현대 사회에 접어들면서부터 여기에도 변화가 생겨 여성들이 '내가 언제까지 엄마 역할만 해야 하느냐?' 하며 자신의 여성성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런 여성성에 눈뜨게 된 것도 불과 몇십 년 전이다.

중년에 접어든 여성들 중에 화병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여성들도 의식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평균수명이 60~70세일 경우, 그런 의식변화도 가족구조나 부부관계 구조를 크게 바꾸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전통적인 여성상을 가지고만 살아온 부분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그 억울함이 한동안 화병으로 나타나다가, 최근에는 유방암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가게 되었다.

유방암 환자의 주된 호소는 '나는 억울하다'는 것이다. 


'죽을 때는 그냥 못 죽겠다. 남편 얼굴이라고 다 긁어놓고 죽겠다'


고 통곡하는 여성들도 있다.

어떤 유방암 환자는 죽는 순간까지도 남편에 대한 저주를 멈추지 않았다.


억울함을 그런 병증으로 드러내지 않는 한, 남자들은 아내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역가가 낮은 남편은 아내가 억울함으로 통곡을 해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 

결국 여성들이 가족을 위해, 특히 남편에게도 계속해서 모성성을 사용해 온 것에 대한 억울함이다.

 이런 부모 세대를 지켜본 이대녀들은 남자를 보는 눈, 결혼을 통해 기대하는 마음, 부부관계를 통해 보는 자신의 미래의 모습에 대해 도무지 긍정적인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부모세대를 바라보는 이대남과 이대녀 사이의 시각의 차이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남자와 여자의 역가의 차이임에 틀림이 없다. 

여자의 시각은 엄청나게 변하고 있는데, 남자는 조선시대나 2000년 이전이나 2000년 이후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대녀는 그런 남자를 위해 더 이상 자기희생을 하는 시대를 끝장 내고 싶다.


모성성을 사용하지 않는 현대 여성


오늘날 20대 30대 초반 여성들은 어릴 때부터 모성성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2000년 이전에는 가정 내에 가부장적인 분위기와 남아선호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런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아이들이 잘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히스테리화해야만 했다.

히스테리 화한다는 것은, 어릴 때부터 여성적인 면모를 확 드러낼 수 없었기에 자신의 몸을 남성화시키게 되었다는 말이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너무 여성적 분위기로 성장하여 음흉한 남성들의 눈에 잘 띄게 되면 그 여자는 남성적 시선에 의해 위협을 당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남자들의 사회에서 눈에 띄지 않게 되려고 히스테리화시켜야만 했다.

자신의 몸을 남성화시키고 나면, 그런 여성은 여성적 본성 중 여성성을 선택하지 않고 대신에 모성성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하여 여성의 남성화와 모성성은 서로 친화력을 가지게 된다. 


그렇지만 지금의 이대녀들은 어릴 때부터 아들이 아니라 딸로 태어나서 환영받은 세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남자와 비교당하지 않고 자라게 되었다.

그녀에게 가부장적 질서라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어 왔다.

그래서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을 감출 필요도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덜 떨어진 남자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어머니 세대처럼 여성성을 굳이 감출 필요도 없었고, 과감하게 여성성을 드러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온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여자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20대 남자, 30대 남자를 상담해 보면, 그의 아버지 세대인 내가 보기에도 의식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어떤 남자는 여자친구의 감정변화 때문에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중에 상담실 문을 두드렸다.

여자가 말하는 대로 따라 하다 보면 남자는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는 결혼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여자는 이해가 안 된다고 한다.  

나는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를 안다.

내가 한 마디로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여자는 남자가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당신 머리로 이해가 되는 여자라면, 그 여자는 이미 매력 없는 여자이다."


그들의 부모세대 여성들은 오히려 남편을 한없이 이해하느라고 바빴다. 

여자 나이 50세가 넘어서면, 여자는 더 이상 남편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

여성성이 발휘되면서, 감정의 흐름을 좇아가느라 바쁘게 되면, 남자는 갑자기 변한 아내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감정 중심의 여성성을 찾아가는 아내를 이해하기는 힘들다.

여성성을 회복한 여성은 더 이상 이해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모성성을 사용하지 않는 이대녀(30대 중반까지 포함)는 어머니와 같이 살고 싶지 않아, 여성성을 가지고 자기 시대를 30년을 앞당겨 살아간다. 

모성적 케어만 받아 오다가 응석받이가 되어 역가가 낮은 남자로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임에도 그들의 여성성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여성성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여성일수록 자신의 감정에 민감하다.

감정에 민감하게 살아가는 여성을 보는 남자의 마음은 매우 복잡하다. 


  '이 여자는 변덕이 죽 끓듯이 하는데, 내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 여자의 변덕에 맞춰 주다 보면 나의 정체성이 흔들릴 수밖에 없구나.'

   '저 여자는 여기 있는 듯하여 여기에 와보면, 어느새 저기 가 있고, 저기로 좇아가보면 어느새 다른 곳에 가 있다. 그래서 저 여자는 종잡을 수가 없다.'

   '내가 저렇게 종잡을 수 없는 여자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


부모 세대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백번 양보해서 모성성을 사용해 왔지만, 지금 세대의 여성은 모성성을 사용할 이유가 없어졌다.

젊은 세대가 이혼이 많아지는 현상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모성성을 사용하지 않고 여성성을 사용하는 여성은 남자의 비리, 남자의 왜곡된 성격, 남편의 자기애적 성향 등을 그냥 참지 못하고 삼진 아웃시켜 버린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를 이해할 수 없고, 여자는 여자대로 남자를 이해해 주고 싶지 않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돌싱이 많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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