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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로서는 이해 불가한 여자의 감정

남자와 여자는 늘 이렇게 싸운다

                   (다음 글은 이해 가능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복음이 될 것이다.)


                                 어떤 남자의 이야기


여자 친구가 갑자기 뒤집어져 버리니까, 저는 억울하거든요. 제 여자 친구가 나보고 "왜 그렇게 눈치가 없느냐"그래요 저는 그 상황이 그렇게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여자 친구가 건강검진을 받아야 하는 어려운 상황인 줄은 알았지만,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검진 결과도 별 이상 없는 것으로 잘 나왔거든요. 그런데 검진인 끝난 후에 여자 친구가 뒤집어졌어요. '왜 그렇게 무관심하냐?' '나는 힘들어 죽을 뻔했는데, 왜 너는 그렇게 룰루랄라 할 수 있느냐?' 등등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그런 상황을 배우지 못해서 제가 상황대처능력이 떨어지니까 그런 능력을 따로 배워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남자와 여자는 일평생 이렇게 싸운다

 

내가 그런 상황을 배워서 내가 여자 앞에서 상황에 맞게 대처를 잘해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여자의 감정에 대처하는 법을 놓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기준은 여자의 감정이다. 감정이 진리이다. 남자는 자꾸 판단을 한다. 맥락이 없다. 왜 갑자기 저러나? 여자가 감정을 뒤집고, 맥락 없이 이야기할 때는, 여자가 남자에 대해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자가 남자에게 온갖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 사랑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일 저 남자에게서 기대할 것이 없다 싶으면, 여자는 자기감정을 안 드러내고 자포자기한다. '저 남자는 저것밖에 안 되니까, 내 감정을 드러내 봤자 무슨 뜻인지도 모를 것이니까, 그냥 넘어가자' 

특히 중년기 넘어가는 부부가 둘로 갈라진다. 아내가 남편에게 자기감정을 그때그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드러내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아내가 '저 남자는 아무리 내 감정을 드러내도 아무런 반응을 않으니까, 또는 엉뚱한 반응을 하니까 그냥 넘어가자' 하면서 포기하는 부부가 있다.

전자는 100 가정 중 한 가정 정도 있고, 나머지 99%는 후자이다.

포기하는 이유는,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이며, 부부관계란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나이스 하게 잘 지내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둘 중에 하나를 원한다면, 어느 쪽이 되고 싶은가? 전자입니다.

여자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감정을 드러낸다고 해서, 그 상황을 절대 이해하는 방식으로 가면 안 되는 것이다. 

그냥 그 자리에서 내가 이해하는 방식을 내려놓고, 여자의 감정에 맞춰서, '미안하다' 하며 여자의 감정에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 맞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는 감정을 멈추지 않는다.

여자는 내가 이렇게 삐지고, 맥락 없이 변덕스럽고 할 때, 남자는 어디까지 받아주느냐, 그 관계의 바운더리를 보게 된다. 

그럴 때, 여자가 제일 솔직해진다. 여자는 가까운 남자에게 그렇게 표현하지, 마음을 닫은 남자, 앞으로 멀리하고 싶은 남자에게는 절대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여자가 심각해질 때, 여자가 감정이 격해질 때, 여자가 남자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한다. 

그런데 남자는 그 상황에서 여자가 원하는 답을 찾기가 굉장히 어렵다.

여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감정에 관한 단순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순간, 남자는 마치 우주를 대하는 것 같다.

그래서 대개 그 상황에서 여자의 질문에 대해 오답을 말한다.

그 오답 때문에 여자는 더 심한 감정을 드러내면서 뒤집어진다. 

  "밖에서는 그렇게 똑똑한 척하면서 다니면서, 또는 평소에 그렇게 책을 많이 읽으면서, 왜 이런 질문조차 제대로 답변을 못하느냐?"

라며 다그칠 때, 남자는 마치 바보가 된 듯, 멍해진다.

여자 친구와 상황에 처할 때, 그때그때 상황에 대한 이해나 그 상황에 대한 대처법을 터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여자의 감정에 맞춰서 나를 조절해야 한다. 

그 순간 여자가 발현하는 주파수를 찾아서 나도 같은 파장의 주파수를 내 보내면 된다. 

그렇게 맞출 때는 나의 이해 방식, 상황 대처 방식, 사회적으로 통용하는 방식 등을 딱 내려놔야 한다. 

어떤 남자는 내가 이과 출신이라서 여자를 이해를 못 하나?

이과 출신은 A가 있어야 B가 나오는 것이고 하는 식으로 프로세스가 딱 떨어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신이 여자를 이해할기 힘든가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과 출신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문과출신도 마찬가지다.

문과 출신은,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떤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고, 저 책에서는 저렇게 말했는데, 왜 여자의 말은 그 범주에 안 들어 오지?라고 생각한다.


여자에게 이과적인 방식도 문과적인 방식도 안 통한다. 

왜 남자는 굳이 여자의 이런 감정을 맞닥뜨려야 하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남성 일변도의 굳어져 가는 사고를 막아 준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이해할 수 없음으로 인해서 갈등하며 싸운다. 

이렇게 그 상황을 파악해서 여자와 이런 갈등을 겪지 않기 위해 딱딱 맞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서로 잘 싸워 내는 것 자체이다. 

이런 싸움을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가까워지고, 더 깊은 연대감을 가지게 된다. 

여자가 어떤 상황에서 남자로부터 공감받지 못해서 서운함을 그대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남자는 끔찍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여자가 남자를 포기하지 않고 싸워 줬다는 사실이다.

그 여자는 이 남자에게 기대하는 바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뭘 기대하는가?

바로 변화와 발달을 위한 기대이다. 

여자가 남자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으면, 싸울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 여자는 그런 남자와 결혼한다고 해도, 

  "내가 이 남자와 결혼을 해도, 내가 그로부터 기대할 것은 없구나. 내 인생은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라고 포기하며 고만고만하게 살아갈 것이다. 

남자가 여자가 처한 상황(암진단)에 대해 1의 높이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별 것 아니구나 하는 생각으로, 그리고 여자를 별 것 아니라는 암시를 주기 위해 위로하기 위해 농담하고, 룰루랄라 했다.

나중에 상황이 끝난 지 며칠 후, 여자는 10의 감정의 크기를 드러내면서, 

  "그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 그런데 너는 내게 위로한답시고, 그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고, 혼자 룰루랄라 하면서 자신의 쾌활함을 내게 전달하고자 했다. 그때는 찝찝했지만 왜 찝찝했는지도 모른 채 지냈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까 너는 내 기분이나 처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공감할 생각조차 없이 혼자 룰루라라 한 것 아니냐?"

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남자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의 갭이 9가 있었다.   

남자는 9의 갭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는 9의 갭을 가감 없이 다 드러냈다는 것,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그 여자가 그 남자를 사랑하는 증거가 된다. 

여자는 남자의 상태를 이미 알고 있다.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이 남자에게 기대할 것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9의 갭을 드러내면서 맥락 없는 감정을 드러낸 것은, 

 "내가 이 남자한테서 더 얻어내야 할 것, 더 기대할 것이 더 많다는 것"

을 말한다. 

나는 아내와 싸운 지 40년이 넘었다. 

40년 동안 싸워도 여전히 싸울 것이 남아 있다.

결혼한 지 40년이 지나도 여전히 여자의 감정에 대해 생소하여 아직도 이런저런 실수를 하면서 아내의 감정을 건드린다.

아내의 감정을 이해해 오면서, 변화된 나의 발달 역사가 있다.

아내의 감정 앞에 설 때는 끔찍한 순간이지만, 아내 감정을 이해하고 나면 나는 그만큼 변화를 이룩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아내에게 감사하는 것은, 아내가 내게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방식으로 내게 싸워 준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감사가 되는 사실을 확연하게 알게 된 것은 바로 나의 부모님의 부부싸움이다.

격한 상황에 처하여 부모님이 서로 싸울 때가 되면, 나의 아버지는 늘 이렇게 방어하셨다.

  "당신, 아직도 내 성질 모르나? 나는 이런 상황에서 이런 사람이야. 왜 수십 년을 살면서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 내 성질이 이렇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그렇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싸움을 걸었다.

아버지는 이런 태도 때문에 젊을 때나 노인이 되어서나 크게 변하신 것이 없다. 



왜 꼭 여성성인가?


부부간에 이런 싸움은 어느 부부나 똑같은 방식으로 한다.

이렇게 싸우지 않는 부부가 있다면 그것은 부부관계를 다시 점검해 봐야 한다.


어떤 결혼한 딸이 자신의 부모님께 울면서 다음과 같이 하소연하였다. 


    "아빠! 우리 맨날 싸워"

    "무슨 문제로 싸우는데?"

    "엄마 아빠가 싸우는 이유하고 똑같아."


나의 결론은 이것이다.(이것은 부부관계에서 매우 중요하다)

"아내가 남편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것 자체가 복이다."

"남자는 여자가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너무 고마운 것이다."

문제의 부부는,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나이스 하게 너무너무 잘 지내는 경우이다. 

50대의 그런 잉꼬부부 한 쌍이 주변 부부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아 오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이혼을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 부부는 큰 갈등이 발생하자 제대로 싸워서 서로 일전을 겨룬 후, 서로 엄청난 실망에 빠져 그 즉시 이혼하고 말았다. 

부부 싸움을 자주 한다고 해서 큰 위기가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부부싸움을 통해 눈앞에 가로막힌 험산준령을 넘는 것이다. 

험산 준령을 하나 넘고 나면, 더 높은 험산 준령이 기다리고 있다.

더 큰 산맥을 넘기 위해 평소에 작은 싸움을 잘 싸워야 한다.   

남자는 아내의 감정을 이해해 가면서, 자신 안에 있는 감정, 즉 여성성을 발견하게 된다.

나중에는 아내의 여성성과 남편의 여성성의 만남이 곧 성숙한 부부의 만남이 된다.

왜 하필이면 여성성인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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