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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3 : 노아의 자살과 그 의미

나는 백이삭의 아들이다

이민진의 [파친코]는 일본에서 살아가는 조선인의 삶을 매우 우울한 정서를 바탕으로 기술하며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나라는 암울했던 시기가 있었지만 그 암울한 먹구름이 걷히고, 어느새 해가 용솟음쳐 올라 중천에 머물러 빛과 열의 절정을 알리듯, 우리는 희망에 찬 시대정신이 만들어내는 쾌창함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 사는 조선인은 암울했던 시기를 벗어나긴 했으나 마치 장마철처럼 지속되는 장대 비가 걷히기도 하지만, 우중충한 날씨로 언제 다시 비가 올지 몰라 늘 우산을 들고 다녀야 하는 우울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다.

[파친코] 안에서 묘사되는 조선인들은 일본인의 그림자와 한국인의 그림자, 중첩된 그림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게 중첩된 그림자가 가장 진하게 드리워 있는 인물은 바로 '노아'이다.


스토리가 내러티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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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민진은 소설 전반의 흐름 안에서 선자라는 여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1900년대를 운명론적으로 살아가는 '여자의 일생'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첫 번째 목적으로 삼은 것 같다.

작가는 선자의 여자로서의 운명론적인 일생은 남자에 의해 삶의 좌표가 달라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선자는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애인 같은 고한수와 아버지 같은 백 이삭이라는 두 남자에 의해 좌우되는 두 가지 심리를 보여준다.

작가는 한 여인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욕망의 갈등을 통합하지 못해 현실에서 두 남자를 통해 욕망의 두 갈래 길을 제시한다.

선자의 욕망을 통합하지 못한 결과 분열되는 삶의 혼돈은 늘 불행을 예고하고 있다.

이 소설에는 시대가 주는 우울함 말고도 선자의 욕망의 분열로 인한 미래 예측 불가능성이 소설 전반에 정서적 우울감을 뿌려 놓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자가 가장 우려했던 일, 자신이 저지른 일이기에 피할 수 없는 운명을 기다려야 했던 일이 드디어 발생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노아의 자살>이다.


노아의 자살사건은 이 소설의 전반적 흐름을 하나의 초점으로 일단락 짓게 하는 중요한 매듭이다.

수많은 사건 이야기가 시간 속에서 그냥 흘러가다가 소설의 정체성을 찾게 하는 사건을 맞이하면서 일상적인 이야기(story)가 의미를 낳는 서사(narrative)로 변모하는 계기로 만드는 사건이 바로 <노아의 자살> 사건이다.

이 소설이 그냥 스토리 텔링으로 그쳤다면 끝없이 전개될 일상적인 이야기의 나열에 불과할 것이다.

노아의 자살이야말로 이 이야기를 대하소설로 만드는 핵심적인 요소를 이루는 사건이다.

노아의 자살은 잘 흘러가는 이야기를 다시 돌아가게 만들어 주요 인물의 역할의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게 만든다.

독자들은 노아의 자살을 생각하면서 '왜 자살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쭉 읽어 내려가다가 마지막 장면에 도달하면서 다시 책장을 앞으로 돌리게 된다.



노아는 왜 자살을 선택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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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머니 선자의 남성성의 분열


선자의 두 남자, 고한수는 사랑의 대상이었다면, 백이삭은 존경의 대상이었다.

선자에게 있어 돈에 삶을 걸고 살아가는 고한수는 이 땅에서의 오욕칠정의 대상이라면, 선한 성품을 가진 백이삭은 경외의 대상이자 '죽어서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대상'(2권, 376)이었다.

선자에게 고한수는 자신의 몸과 순결을 빼앗아 간 사람이라면, 백한수는 순결한 영혼과 숭고한 정신을 가져다준 사람이다.

(좀 난해한 정신분석학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고한수는 현실적인 눈앞에 보이는 이상적 자아로서 대상이라면, 백이삭은 미래의 꿈과 비전을 제시하는 영혼으로 품어주는 자아이상으로서 대상이다.)

선자는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포기할 수 없었다.

선자는 한수를 떠나 백이삭과 결혼하였을 때 한수를 애도함으로 떠나보내지 못했고,

백이삭이 죽었을 때도 애도하지 못했다.

선자의 남성성을 통합하지 못한, 두 마음을 가진 분열!!

그래서 선자는 평생 마음속에 두 남자를 품고 살았다.

이 분열이 노아에게 자살을 가져다주었다.


2. 아버지가 주어준 거룩한 이름, 백노아


노아의 두 아버지에 대한 태도는 매우 극단적이다.

고한수에 대한 경멸과 백이삭에 대한 존경이 노아에게 늘 공존했다.

백이삭이 죽은 지 오래되어도 노아는 한 번도 아버지의 자리를 고한수에게 내어준 적이 없었다.

노아에게 있어 고한수는 야쿠자이자 고리대금업자로서 조선인의 이름을 더럽히는 악인에 불과했다.

노아는 단지 와세다대학 졸업이라는 영광을 담보로 한수의 돈이 잠시 빌렸을 뿐이다.


과연 노아는 고한수를 계속 만나면서 그가 아버지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노아의 의식은 몰랐지만 무의식은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답변은 좀 궁색하다.

노아의 무의식까지 내려가지 않아도 전의식은 알고 있었을 것 같다.

노아는 일본인도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닌, 조선인은 그야말로 선택받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와세다 대학이 주는 영광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 영광 때문에 경멸하는 한수가 아버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제공하는 모든 혜택을 누렸을 것이다.

그런데 한수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 하는 노아의 여자 친구 하루키가 한수를 보자 두 사람이 부자 관계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보는 것을 알게 된 노아는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 스스로 자신을 속여 온 배신감이 한수와 연결된 지금까지의 삶을 통째로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노아는 한수가 주는 경제적 혜택, 와세다 대학, 하루키와의 뜨거운 사랑, 엄마, 그리고 자신의 이름까지도 버리고 잠적했다.


3. 파친코와 조선인


노아는 재일 조선인으로서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사회에서 일본인과 경쟁하며 당당하게 살고 싶었다.

그 꿈이 깨지자, 그가 몸 담은 곳은 바로 파친코 업계였다.

파친코는 일본 법률상 도박이 아닌 놀이로 간주되지만 정작 그런 놀이를 하는 일본인은 도박으로 여긴다.

놀이이지만 도박이 바로 파친코이다.

그래서 오늘날 일본에는 우리나라의 PC방처럼 전국적으로 퍼져 있다.

도박을 놀이처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파친코이다.

파친코의 이러한 이중성이 재일 조선인의 신분적 이중성과 유사하다.

그들은 조선인이면서 일본인처럼 살아야 하는 아픔과 설움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차별과 억압으로 생계가 힘들어지자 재일교포들이 새로 개척한 사업이 바로 파친코 사업이었다."(thedaynews.co.kr. 22.08.25)

노아는 가족과 한수를 피해 파친코 업계로 숨어들었다.

노아는 한수와 파친코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경멸의 대상이라는 측면에서 동일시이다.

노아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해서 일본 기업에서 일본인과 당당하게 경쟁하는 조선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깨뜨렸다.

한수로 인해 꿈이 좌절되었지만, 핍박받는 조선인으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해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일본에서 파친코는 차별받는 조선인을 표상하는 것이기 때문에 파친코로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기껏 고한수가 되는 것에 불과했다.

노아는 한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와세다 대학을 포기했지만, 파친코 업계에 들어가서 고한수의 삶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노아는 진짜 일본인 기업에서 일하고 싶어 했다. 파친코 게임장에서는 일하기 싫어했다."(2권, 82)


노아는 최소한 파친코와 조선인을 분리시키고 싶었다.

조선인으로서 수치심은 감당할 수 있어도 파친코 사업을 하는 조선인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노아는 일본인으로 신분 세탁하여 파친코 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노아가 지키고 싶었던 두 가지를 엿볼 수 있다.

첫째, 노아는 조선인의 자부심을 지키고 싶었다.

둘째, 이름 없는 사생아로 살아갈 뻔했던 자신에게 백이삭이 엄마와 결혼함으로써 부여받은 백노아라는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이 두 가지가 이 소설에 담겨있는 핵심 가치가 아닌가 싶다.


어느 날, 어머니 선자가 아무 예고 없이 노아를 찾아왔다.

십몇 년 동안 일본인으로 신분 세탁하여 결혼도 하고 파친코 사업에 참여하고 있을 때, 어머니의 방문을 반갑기도 하였으나 자신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았다.

선자의 방문은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보존하기 위해 타락한 일본인으로 살고 싶었지만 타락한 조선인으로 살라는 요청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어 노아는 자살을 선택했다.



자아(ego)를 죽여 자기(self)를 보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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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자살을 이 정도에서 이해를 끝내는 것은 뭔가 부족함을 남긴다.

좀 더 심층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사람 안에는 외부 현실과 닿아 있는 인격 기관으로 자아(ego)라는 것이 있고, 자신의 내면세계와 닿아 있는 자기(self)라는 것이 있다.

사도바울은 이를 두고 겉사람과 속 사람이라 표현하였다(고린도후서 4:16, 에베소서 4:22-24).

자아는 나의 주체이지만, 자기는 나의 주인이다.

내가 아는 나는 바로 자아이다.

자기는 내 안에 있지만, 내가 다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나와 너, 그와 우리, 그리고 자연과 우주, 심지어 신과도 연결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크게 억울함을 당할 때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자살 중에는 억울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억울함에 사무쳐서도 아닌 경우가 있다.

조선시대 이야기 중에는 원치 않게 몸이 더럽혀져 치욕에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여인들이 있다.

이런 경우 자신의 내면 안, 마음의 보좌에 있는 자기를 살리기 위해 자아를 죽이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사람은 자살을 결심하는 과정, 그리고 자살하는 순간은 곧 명확한 자기 정체성을 찾는 순간일 것이다.


백이삭이 그랬다.

신사 참배에 반대하여 감옥에 갇혀 매일 죽음을 직면하며 살아온 2년 동안, 삶의 희망을 잃고도 자기 정체성을 놓치지 않았다.

백이삭은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 현실의 삶의 희망을 놔 버리자 자신 안에 자아(ego)가 기능을 잃어버리게 되면서 정체성의 자리에서 명약관화한 자기(self)를 발견했을 것이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기를 각오한 사람이나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신앙을 지킨 순교자들의 내면의 상태는 바로 이러했을 것 같다.

노아의 자아는 늘 피할 수 없는 고한수와의 현실적인 삶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면, 자기는 백이삭의 순결한 영혼과 숭고한 정신과 연결된다.

노아의 자살은 다음과 같은 메아리를 들려준다.


"나는 백이삭의 아들이다"


아무리 그래도 자살을 더 이상 미화할 수는 없다.

이점이 [파친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비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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