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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중 조는 상담자

상담자가 졸고 있는 이유


상담을 하다 보면 상담자로서 도무지 원치 않는 상황이 벌어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정신이 맑았고, 전혀 피곤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떤 내담자가 상담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게를 더해오기 시작한다. 속으로는 이미 졸고 있으면서 간신히 눈을 뜨고 앉아 있다.


‘이상하다. 이분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난 정말 멀쩡했는데…이 환자가 들어오자마자 왜 이렇게 졸리지?’


초자 시절에는 실제로 내담자 앞에서 꾸벅꾸벅 졸았던 적도 있다. 그 내담자는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아니, 피곤한 건 난데, 왜 상담자가 졸고 있지?”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서 용인에서 두 시간 운전해 왔는데…”

“내가 더 피곤한 거 아니에요?”


그 내담자는 후일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고, 당황해서 사과했다. 내 몸이 피곤한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넘어가려 했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그 내담자와의 상담에서만 반복적으로 졸음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단순한 수면 부족이나 컨디션 탓이라고 보기엔 석연치 않았다.


또, 그날은 어떤 슈퍼비전을 하던 상황이었다. 나의 제자 중에 두 가지 사례를 가지고 와서 슈퍼비전을 받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 첫 번째 사례가 시작하자마자, 눈꺼풀이 내려앉아 항우장사라도 그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나는 제자에게


"아무래도 내가 지금 사례의 주인공의 내면 상태가 내 안에서 전이가 일어나는 것 같아 눈이 자꾸 감깁니다. 그렇지만 내 머리는 계속 듣고 있으니 내가 자더라도 계속 이야기하라"


고 주문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랬다. 눈이 감겨 잠들었는데, 나의 제자가 읊어대는 이야기는 다 듣고 있었다. 이 경우는 내 앞의 슈퍼바이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가져온 사례의 주인공의 정서적 상태가 내게 전이를 일으켜 졸음으로 나를 압도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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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실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일


이러한 현상은 정신분석학에서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는 내담자가 자신의 감정이나 무의식의 일부분을 상담자에게 ‘투사’하고, 상담자는 그것을 마치 자기 자신의 감정처럼 ‘느끼게 되는’ 심리 현상이다. 단순한 투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담자가 그 감정 상태를 몸으로, 정서로, 전체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 내담자는 외형상 멀쩡히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정서적으로는 무기력하고 피로에 짓눌려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피곤함을 직적 표현하지 않거나, 감정화하지 못한 채 계속 억눌러 둔 무엇인가가 상담자에게 투사하여 상담자로 하여금 졸음이 오는 신체반응으로 체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감정을 억누른 채 말을 이어가는 동안, 그 감정은 말 너머로, 표정과 기류, 몸짓 속으로 스며들어 상담자에게로 향한다. 나는 피곤하지 않았는데, 그 감정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졸음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상담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담자의 내면 상태를 몸으로 받아들여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담자가 졸릴 때마다 “이건 내담자 탓입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분석가는 항상 자기 상태에 대한 메타인지를 유지하고, 피로가 신체적 원인인지, 관계적 전이인지 유보하며 탐색해야 한다. 하지만 한 내담자와의 만남에서 반복적으로 특정 감정이나 신체 상태가 유발된다면, 그것은 상담자 자신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상담자가 상담 중에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내담자에게는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상담자의 졸림은 내담자의 심리적 졸림이 타자(상담자) 안에서 투사적 동일시 형태로 구현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상담자는 인지해야 한다.


전이의 관점에서 다시 보기


전이(transference)는 내담자가 과거 중요한 대상(예: 부모, 교사)에게 느꼈던 감정을 현재의 상담자에게 무의식적으로 옮겨오는 심리적 반복이다. 앞선 사례에서 내담자는 어쩌면 “나는 항상 피곤했지만, 아무도 나의 피로를 알아주지 않았다”는 경험을 안고 살아왔을지 모른다. 때로는 자신이 힘들 때, 오히려 주변 어른들이 더 지쳐 보였고, 그들의 피곤함을 배려하느라 자신의 감정은 숨겨야 했을 수도 있다.

이런 전이의 배경 속에서 상담자의 졸음은 그가 과거에 겪었던 상황을 다시 반복하게 만든다. 상담자가 조는 모습은 단순한 졸음이 아니라, 내담자의 무의식 속 장면—“내가 힘들다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을 재현한다. 그러니까 상담자의 졸음은 단순한 신체적 해프닝이 아니라, 내담자의 과거 감정을 현실로 끌어오는 연극무대가 되는 셈이다.

“피곤한 건 난데, 왜 상담자가 졸지?”라고 웃으며 말했던 내담자의 반응은, 그 기묘한 전이의 장면을 일종의 유머로 방어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에는 어쩌면 오랫동안 이해받지 못한 채 축적된 감정의 층이 숨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상담실은 무의식이 말하는 공간이다


상담실에서는 말보다 더 큰 말이 오간다. 말로 하지 않은 것이 말이 되고, 내담자가 의식하지 못하는 감정이 상담자의 몸에서 체현된다. 그래서 상담자는 상담자의 자리에서 계속 깨어 있어야 한다. 때로는 조는 자신을 성찰하면서, 내 안에 깃든 타인의 무의식을 듣는다. 졸림조차도 진료의 일부가 된다.

상담자는 언제나 자신을 관찰하는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신에게 조용히 묻는다.


“이 졸음은 누구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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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은 단순한 생리 반응이 아니라, 감정의 언어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그 졸음은 내담자의 상태를 비언어적으로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내담자의 말은 활발해 보이지만, 내면은 지치고, 피곤하고, 표현되지 못한 감정이 쌓여 있을 수 있다.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오늘 상담실에 앉으신 순간 제가 갑자기 몹시 졸렸어요. 혹시 요즘 많이 지치신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어 요.

이런 식으로 정신적 현실을 상징적으로 되돌려주는 것이 그 상담 진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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