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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분석 : 내 안의 영적 여정, 하나님의 인도하심

꿈내용


어딘가를 가는데 언덕과 골목을 지나 아이들이 놀고 있는 얼음빙판을 지나감. 나도 가도 되나 하면서 노는 듯 그곳을 통과함. 차를 타는데 차에 기사가 없고 일행이랑 탔음. 뒷좌석에 여자분이랑 탔는데 무인조종처럼 그냥 운행됨. 일행 여자분이 중간에 내리고 나는 선교회에 도착했는데 그때 차주인이 무전기 들고 배웅을 나와 저분 차구나 알게 됨. 갔더니 아는 사람이 안내해 줌. 기도 시간이라 밖에서 기다리면서 오가는 사람들과 인사함. 만나는 사람 마다 전에 알던 사람이라 반겨줌. 안내해 주는 사람도 웃으면서 이미 다 알고 있어서 소개가 필요 없다며 웃음.


인간은 종종 꿈에서 삶의 진실을 만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는 감지하지 못하는 것들을, 꿈은 때때로 조용히 펼쳐 보여준다. 그것은 지나온 삶의 단편이기도 하고, 다가올 미래의 징후이기도 하며, 더 깊이 들어가자면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내면의 음성이기도 하다.


빙판 위에서 만난 어린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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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아이들이 얼음 위에서 노는 장면으로 시작됐다. 공터 같은 골목, 사람만 다닐 수 있는 좁은 언덕길, 그 위에서 자유롭게 미끄러지며 노는 아이들. 나는 ‘나도 가도 될까?’ 하고 조심스럽게 그들 사이로 들어섰다. 마치 어린 시절의 나와 마주한 듯한 순간이었다.

빙판 위의 아이들은 ‘놀이’의 세계에 속한 존재들이다. 놀이란 목적이 없는 자유, 어떤 성취나 완성도 없이 그저 존재함 그 자체로 허용되는 시간이다. 인생의 많은 시기가 목적과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사실 우리의 영혼은 종종 이런 무용(無用)의 순간을 갈망한다. 신학자 아브라함 헤셀이 말했듯, ‘안식은 시간을 성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 말은, 안식과 놀이는 닮아있다. 둘 다 효율과 성과를 멈추고 ‘존재의 기쁨’을 허용한다.

나는 그 얼음 위를 걷는 나 자신이, 어린 시절의 나를 조심스럽게 통과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감정과 기억의 얇은 얼음을 밟듯, 조심스럽고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호기심 어린 발걸음이었다. 이 꿈의 시작은, 내 안에 여전히 살아있는 순전한 감정, 자유, 유년기의 한 조각을 깨우는 장면이었다.


무인 운전의 차, 그리고 선교회로 가는 길


이후 나는 운전사 없는 차를 탔다. 일행과 함께 뒷좌석에 앉아 있었지만, 차는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나는 또다시 의문을 품는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운전자가 없는 차는, 내 삶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흐름 위에 놓여 있다는 자각을 상징했다. 그러나 그 차는 흔들림 없이 목적지로 향했고, 나는 무사히 선교회에 도착했다.


삶의 많은 여정은 마치 무인자동차를 타는 것과 같다. 우리는 계획하고 조종하려 하지만, 실은 삶의 대부분은 통제 바깥에서 벌어진다. 특히 신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놓여 있고, 우리보다 먼저 가 계신 하나님의 뜻이 인생을 이끌어간다. 나는 그 꿈에서, 내가 조정하지 않아도 괜찮은 삶, 혹은 통제할 수 없는 감정과 현실 속에서도 ‘잘 가고 있다’는 평안을 얻었다. 그것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끄시는 여정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장면이 던지는 영적인 메시지는 분명했다. 인생은 무질서하고 예측 불가능한 여정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도 보이지 않는 인도자, 즉 하나님의 손이 있다. 우리가 목적지를 정하지 않아도, 때로는 길을 잃은 것 같아도, 삶은 결국 우리가 도달해야 할 곳으로 이끌린다. 그 신비로운 운행을 경험한 순간, 나는 불안보다는 신뢰를 느꼈다.


선교회에서 만난 환대의 공동체


꿈속의 나는 선교회에 도착했고, 그곳에서는 낯설지 않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가 나를 알고 있었고, 나 역시 그들을 아는 듯했다. 심지어 소개도 필요 없다고 말했다. 내가 오래도록 속해 있었던 듯한 그 공동체, 나는 거기서 반가움과 평안을 느꼈다.


이 장면은 ‘영적인 귀환’을 상징한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타자와 만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나’가 된다. 그리고 꿈속에서 만난 이 환대의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거기서 나는 혼자가 아니었고, 나를 아는 이들이 있었고, 나 역시 그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는 ‘일체감’의 체험이었고, 존재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감각이었다.


내가 그렇게 도착한 공동체의 문 앞에는 차주인이 무전기를 들고 서 있었다.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탄 차의 주인이었다. 나는 그 순간 알았다. 이 모든 여정의 배후에는 어떤 존재의 인도와 준비가 있었다는 것을. 그는 무의식의 안내자이자, 하나님 그 자체였다.


그 순간, 꿈이 아닌 내 삶 전체가 하나의 여정으로 느껴졌다. 지금까지의 불안한 여정, 크고 작은 실패와 방황, 기쁨과 슬픔 속에서도, 결국 나는 하나님의 인도 아래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우리가 어디에 도달하든, 그곳은 하나님이 미리 기다리고 계시는 자리였다.


불안의 근원과 해방의 실마리


나는 이 꿈을 통해 내 안의 불안의 뿌리를 다시 자각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막막함, 두려움, 세상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이는 내 어머니의 불안에서 유전처럼 전해진 것이기도 했고, 스스로 삶을 조절해야만 했던 내적 강박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최근 일상 속에서 단순한 세탁실 누수 문제를 마주했을 때, 나는 생각보다 큰 스트레스를 경험했다. 아파트 관리실에 전화를 걸고, 공사를 요청하는 간단한 절차임에도, 나는 감정적으로 무력했고 그저 피하고만 싶었다. 꿈은 이 일상의 반응을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내가 지금 ‘해결할 수 없는 존재’처럼 느끼는 감정은, 실은 과거로부터 온 오래된 두려움의 찌꺼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꿈은 나를 가르쳤다. “통제하지 않아도 괜찮다. 여정은 진행되고 있고, 너는 잘 가고 있다.” 이 단순한 깨달음은 불안으로 꽉 조여진 내 삶에 작은 숨통을 열어주었다.


마음속 아이스팩을 내려놓는 시간


꿈의 해석은 또 다른 현실을 건드렸다. 나는 물건을 쌓아두는 습관이 있다. 특히 아이스팩을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는 버릇. 그 차가운 무게감은, 마치 내 마음속 어딘가에도 쌓여 있는 감정의 찌꺼기 같았다. 하지만 최근에야 그것들을 나누고 비우면서, 내가 왜 그것들을 붙잡고 있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살면서 우리는 무언가를 ‘비축’해야 안심이 된다고 느낀다. 그것이 물건이든, 감정이든, 사람과의 관계든. 그러나 신앙의 여정은 다르다. 비축보다는 내려놓음, 소유보다는 나눔, 통제보다는 신뢰. 하나님은 우리에게 ‘쌓아두는 것’보다 ‘흘려보내는 것’을 가르치신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는 저장보다 생산, 불안보다 신뢰의 삶을 배워야 한다.


이 꿈은 나에게 그런 전환을 요청한 듯하다. 이제는 내 안의 차가운 아이스팩들, 무거운 감정들, 쓸모없이 쌓여 있는 과거의 기억들을 정리할 시간이다. 그것은 단순한 정리가 아니라, 더 가볍게, 더 자유롭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르기 위한 준비다.


삶은 늘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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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꿈을 통해 다시금 그 사실을 확인했다. 어릴 적부터 불안을 품고 살아온 나에게, 하나님은 ‘네가 가는 길은 내가 준비한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나를 반겨주는 공동체가, 나를 기다리는 안내자가, 그리고 내가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평안이 있었다.


삶이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이 작은 진실 하나를 붙잡아야 한다.나는 잘 가고 있다.” 하나님이 나의 차주인이며, 내가 닿을 그 자리는 이미 그분이 마련하신 곳이라는 것을. 꿈은 그렇게, 말없이 내게 복음을 전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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