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 자아(Ideal Ego)와 자아 이상(Ego Ideal) 사이에서
'나는 왜 이렇게 눈치를 보며 살까?'
이 질문은 많은 여성 내담자들이 상담실에 와서 처음으로 꺼내놓는 말이다.
이들은 어릴 적부터 ‘엄마가 좋아하는 딸’, ‘말 잘 듣는 아이’, ‘기특한 아이’로 살아왔다. 그렇게 살면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살면서 안정된 애착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며 그 ‘엄마가 바라는 나’가 내 안의 진짜 자아를 잠식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여기서 정신분석에서는 ‘이상적 자아(Ideal Ego)’라는 개념을 꺼낼 수 있다.
이상적 자아는 엄마의 눈 속에 비친 ‘이상적인 나’이다. 아기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처음 인식하듯, 엄마의 표정과 반응을 통해 자신을 비추고 해석하며 ‘나는 이런 사람이어야 사랑받는다’는 내면의 기준을 세우게 된다. 이 시기는 매우 자기애적이며,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에 머무는 시기이다.
엄마가 “넌 참 착하구나”, “네가 있어서 엄마는 행복해”라고 말할 때, 아이는 그렇게 존재해야만 의미가 있다고 받아들인다. 이때 생긴 ‘이상적 자아’는 일종의 거울 속 이미지이며, 욕망의 시작점이기도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욕망하는 이유는, 엄마의 눈 안에서 그 모습이 사랑받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이상적 자아’가 성장의 멈춤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엄마가 바라는 모습에 머무르다 보면, 타인의 시선과 기대에만 맞춰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특히 스스로를 돌보지 못한 채 타인의 욕망을 채우는 데 집중하는 사람일수록, ‘나’는 사라지고 역할만 남게 된다.
성장은 어느 순간 ‘불편함’을 느끼는 데서 시작된다.
예를 들어, 영우라는 인물은 자신이 좋아하는 운동화를 신고,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꺼내 입으며 ‘내가 좋은 것’에만 몰두한다. 어쩌면 그는 여전히 자신 안의 이상적 자아에 머물러 있다.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받아주기를, 무조건적으로 응원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살아가며 규범과 윤리, 책임과 역할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내면화하며 새로운 자아의 층위로 들어서게 된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자아이상(Ego Ideal)>이다.
자아 이상은 ‘아버지의 이름’을 통해 대표되는 사회적 상징계 속에서 형성된다.
이것은 단지 친부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과 질서, 윤리와 도덕을 상징하는 초자아적 기준이다. 이제 우리는 ‘엄마가 바라는 나’가 아니라, ‘세상이 기대하는 성숙한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단지 사랑받기 위해 예쁘게 웃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을 위해 나를 규율하고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부터 인간은 진짜 ‘성숙’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어릴 적 이상적 자아가 욕망의 출발점이었다면, 자아 이상은 그 욕망을 윤리적으로 정제하고, 사회적 책임감과 의미로 전환시키는 힘이다.
예를 들어 상담자가 스튜에게 “직업을 가져라”, “규칙적인 생활을 해라”라고 말하는 것은 그를 ‘자아이상’의 단계로 이끌기 위한 제안이다.
자아 이상은 나에게 고통과 수치심, 도전과 좌절을 경험하게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아이’에서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 주체’로 변모한다. 그것은 단지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살아가려는 의지를 의미한다.
상담을 하다 보면, 중년의 여성들이 이런 고백을 종종 한다.
“나 요즘 여자 아닌 것 같아.”
그 말은 단순한 외모나 성별에 대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자기 정체성에 대한 비명이다. 아이의 엄마, 남편의 아내, 누군가의 며느리로 살아가다 보면, 나는 ‘기능’으로 존재할 뿐, 나 자신의 고유한 삶은 사라져 버린다.
이때 여성들은 종종 이상적 자아에 머무는 무의식적 상태에서 괴로워한다.
그들은 여전히 엄마가 바라는 착한 딸, 가족이 기대하는 희생적인 엄마, 사회가 요구하는 견고한 주부로 살아가며 자신을 소진시킨다. 그러나 그 삶이 더 이상 내면을 채워주지 못할 때, 우울이나 무기력, 혹은 통증이라는 방식으로 신체가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다.
이제는 이 지점을 건너야 한다.
‘엄마가 바라는 나’가 아닌,
‘내가 살아가고 싶은 나’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상적 자아에서 자아 이상으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그것은 나에게 감정의 권리를 되돌려주는 길이며, 나를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출발점이다.
성숙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더 이상 사랑받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상태’ 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존재로서의 나이다.
이제는 내 감정, 내 욕망, 내 몸의 신호에 귀 기울이며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묻고 대답해야 할 때이다.
엄마의 거울에서 빠져나와,
내면의 나를 직면하고,
세상의 규범과 나만의 가치를 결합하여
더 넓고 깊은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자아이상’을 품은 성숙한 삶이다.
프시케는 많은 고난을 겪고 신이 된다.
그 여정은 여성의 성숙 과정을 상징한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상처받고, 기대에 지치고, 관계에 소진되면서도
다시 나를 찾기 위해 걷는 그 길.
이상적 자아가 나의 시작이었다면,
자아 이상은 나의 성장이자 귀환이다.
내가 다시 나로 살아가기 위한,
프시케의 내면 여정이 시작되는 곳.
이제는 내가 나를 키워야 할 시간이다.
‘여자’로서, ‘사람’으로서,
‘진짜 나’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