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중심에 자기(self)가 있다는

이상적 자아와 자아이상, 신앙과 가족관계의 유사성

엄마를 바라보던 시선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우리는 누구나 엄마를 향한 눈빛으로 신을 향해 나아간다. 유아기에 엄마의 품은 전능했고, 그녀의 인정은 곧 나의 생존이었다. 이 시기의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이상적 자아(Ideal Ego)의 세계다. 이 시기의 나는 엄마가 웃어주면 기뻤고, 엄마가 찡그리면 나를 잘못된 존재로 여겼다. 나의 존재감은 엄마의 시선에 달려 있었고, 나는 그 시선에 맞추어 자신을 꾸몄다.


신앙 초기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다.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시고, 축복을 주시면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느낀다. 기복적인 믿음, 구약적 믿음의 양상이다. 내가 기도하면 바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전제가 여기에 숨어 있다. 마치 엄마의 기분이 곧 나의 존재를 결정하던 유아기의 감각처럼, 하나님 역시 외부에 있는 권위로 존재하며, 그분의 반응에 따라 나의 믿음이 요동친다. 이때 만나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이상적 자아와 ‘구약적 믿음’의 유사성


‘이상적 자아’는 사랑받기 위해 스스로를 꾸미는 자아다. 불안한 존재감을 견디기 어려워, 외부의 기준과 시선에 맞춰 자신을 정돈한다. 엄마의 눈이 나의 거울이고, 가족의 기대가 나의 윤리가 되며, 공동체의 칭찬이 나의 종교가 된다. 신앙이 깊어지지 않으면, 교회생활조차 이 ‘이상적 자아’의 놀이터로 전락하기 쉽다. 교회 안에서 인정받고 싶고, 누군가 나의 신앙을 칭찬해 주길 바란다. 목사님의 기도가 나를 살리고, 하나님의 능력은 기적과 치유로만 측정된다. 목사님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를 절대 의심해서는 안된다.'고 강권한다.

가족 중에 누가 아프면, '꼭 우리 목사님께 기도를 받아야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심한 경우, 병이 나면 목사님의 기도를 받지 않고 바로 병원으로 가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내가 믿음이 없어 보이면 어떻게 하지?' 하는 염려가 깊어진다. 또 집안에 나쁜 일이 생기면, '내가 십일조를 안 내서 이런 일이 생기나?' 하며 죄책감이 깊어진다. 이런 것이 '이상적 자아'로서의 신앙인의 모습이다.


이러한 신앙의 구조는 구약적 신앙의 흔적과 맞닿아 있다. 율법과 축복, 전쟁과 승리, 천사를 통한 메시지, 선지자를 통한 기름 부음은 외부의 권위로부터 안심받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내 인생에 찾아 오는 고난을 해석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는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일이? 전능하신 분이라면 왜 침묵하시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내가 왜 이렇게 이혼을 하도록 내 버려 주실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이상적 자아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의 그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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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이상과 신약적 믿음: 자기(self) 중심을 갖는 신앙


자아이상(Ego Ideal)’은 아버지의 시선이 개입하면서 형성된다. 엄마와의 2자 관계에서 벗어나, 사회의 규범, 도덕,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되는 3자 구조가 자아이상의 무대다. 이 자아는 더 이상 사랑받기 위한 자기가 아니라, 살아가는 ‘나’로 존재한다. 타인을 이해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며, 관계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가는 자아다.


신앙도 이 지점에서 성숙해진다. 신약적 믿음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만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고난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새롭게 본다. 더 이상 기적이나 외부 중재자에 의존하지 않고, 내면에 중심을 둔 신앙이다. 일상에서의 조용한 예배, 작고 일상적인 위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 이것이 자아이상적 신앙의 모습이다.


가족과의 거리, 그리고 신앙 안의 자유


가족과의 관계는 자아의 발달을 끊임없이 시험하는 장이다.

상담현장에서, 그녀는 가족 안에서의 죄책감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다. 막내로서 오랫동안 형제들을 챙겨오다가 이혼하면서 형제들을 돌보는 것이 힘겨워졌다. 모임을 가지면 항상 막내가 결제하고, 선물 사가고, 돈을 달라하면 돈도 뜯기고, 입원 중인 어머니 간병을 5명의 형제는 나만 믿고 아무도 참여하지 않는 등. '이제 못하겠다' 손을 드니, 5방향(형제), 10방향(형제부부)에서 비난과 욕설이 들어온다.


'그래, 좋다! 이제는 욕을 먹어도 더 이상은 이런 짓을 못하겠다.'


해서 명절 때도 집안에서 홀로 칩거했다. 이번에는 죄책감 없이 외로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형제들이 나를 괘씸해 할 것에 대해, 예전에는 불안했는데, 이제는 통괘하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형제들이 내게 화를 낼까봐 전전긍긍하였는데, 이번에는 형제들의 화난 얼굴들을 떠올리며 유쾌한 상상을 즐겼다.

그녀는 지금 이상적 자아에서 자아 이상으로 옮겨가 있고, 자아발달을 도모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형제들을 보지 않으면 죄인가요?”라는 물음에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어 온 집단적 사고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이는 아직 이상적 자아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다. 잘못은 타인이 했는데, 죄책감은 나의 몫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미분화된 자아가 감당하는 몫이며, 이상적 자아의 모습이다.

이것은 종종 신앙의 언어로 포장된다. “효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 받는다”는 식의 미신적인 신앙도 그 일환이다.


하지만 그녀는 점차 변화하고 있었다. 늘 손을 벌려 온 형제들을 보지 않아도 죄책감이 줄어들고, 보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졌다. 상담자의 말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다는 스스로 분별하고, 외부 기적에 집착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아들과 단둘이 드리는 조용한 예배 안에서 안정을 찾는다. 이 변화는 단순한 행동의 변화가 아니다. 내면에 중심이 생겨 나고 있고, 그 중심으로부터 삶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자아 분화와 신앙의 성숙은 이렇게 동시에 일어난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확신


성숙한 신앙은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확신에서 시작된다. 이 확신은 외부의 조건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확신은 내 안에 자기(self)가 있다는 확신으로 나타난다. 가족이 나를 비난해도, 목회자가 실망스러워도, 하나님의 응답이 지연되어도, 내 삶에 고난이 찾아 와도 내면의 중심, self는 무너지지 않는다. 이는 이상적 자아에서 자아 이상으로 이주했다(또는 하고 있다)는 뜻이며, 이제 나는 ‘누군가가 원하는 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나’로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은 가족 안에서의 나를 자유롭게 한다. 내가 불필요한 죄책감을 내려놓고, 사랑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준다. 때로는 거리를 두는 것이 사랑이고, 침묵이 연민일 수 있다. 자아 이상이 있는 신자는 이런 복잡한 감정을 믿음 안에서 품을 수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희생자도, 구원자도 아닌, 한 명의 책임 있는 인간으로 서게 된다.


마무리하며: 나의 중심,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이상적 자아에서 자아 이상으로, 구약적 신앙에서 신약적 신앙으로, 가족의 시선에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이 모든 변화의 핵심은 ‘나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이다.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실 때, 우리는 사랑받기 위한 자기를 내려놓고, 진짜 나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때 신앙은 더 이상 종교가 아니라, 생명이 된다.


가족과의 관계도, 사회적 역할도 이 중심에서 재정렬된다. 관계에 얽매이지 않지만, 책임을 감당하며 산다. 죄책감에 붙들리지 않고, 자유함 가운데 머문다. 그것이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아의 성숙이며, 참된 믿음의 길이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나는 나로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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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백이 믿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로 서게 된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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