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체성애적 가학, 자기 몸에 대한 가학

이 글은 자체성애적 단계에서의 자기 가혹성과 그것이 정신증(psychosis)으로 표현되는 방식을 다룬다. 자해적이거나 죽음 충동적인 행위에는 깊은 심리적 고통과 무의식의 가학성이 얽혀 있다. 글은 정신분석적 개념을 바탕으로 하며, 당뇨병 환자의 반복적인 저혈당 유도, 감정 억압과 자기 처벌, 그리고 자살적 쾌감에 대한 탐닉 등 다양한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자기 파괴성에 주목한다.

자체성애적 단계는 프로이트의 초기 심리성적 발달 단계로, 리비도가 자신에게 향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외부 대상과의 관계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과 욕구 충족이 중심이 된다.


자체성애적 단계에서의 자기 가혹성 — 정신증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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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안으로 파고들어 가는 고통은, 때때로 타인에게조차 닿을 수 없는 깊은 지하에 존재한다. 그 어둠 속에서 인간은 타인의 목소리보다 자기 내면의 독백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이 독백이 향하는 대상은 종종 자기 자신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정신증적 자기 가혹성이라는 복잡한 정신 내적 구조를 목격한다.


자체성애적 단계, 즉 오이디푸스 이전의 정신 발달 단계에서 아동은 자신과 외부 세계를 충분히 구분하지 못하며, 외부의 대상을 내면에 흡수하거나 동일시하는 방식으로 자아를 형성한다. 이 시기의 정동은 원시적이고 전능적이며, 때로는 파괴적이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충분한 안정과 애착이 주어지지 않으면, 아이는 <내면화된 ‘나쁜 대상’>과 결합하게 된다. 이 나쁜 대상은 자신을 꾸짖고, 처벌하며, 끝내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가혹한 심판자가 된다. 이 심판자의 언어는 이성의 언어가 아니며, 상징의 언어조차 아니다. 몸의 언어, 고통의 언어, 쾌락의 언어로 나타난다.


자살 동호회, Autoerotic Asphyx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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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식과 쾌락: Autoerotic Asphyxia란 무엇인가

자살을 습관적으로 하는 동호회가 있다. 교수형에 처하듯이, 천정에 밧줄을 묶은 채 목을 매달아 자살을 시도하는 중 고통을 즐기고 숨이 끊어질 때 쾌감을 즐기는 것이다. 그것을 Autoerotic Asphysia라고 한다. 이는 저산소증에서 오는 질식이 실행되는 순간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성적 쾌감 이상의 것을 느끼는 것이다. 자살 도중 쾌감을 즐기는 중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순간 손에 쥐고 있던 칼로 목을 매달고 있는 줄을 끊는 방식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밧줄로 목을 매다는 방식 외에 비닐봉지, 랩, 레인 코트 베개 포장지 등으로 질식을 유도하기도 한다.

이 현상은 저산소증 상태—즉, 뇌에 산소가 부족해지는 상태—에서 성적 쾌감이 강화된다는 점에 기반한다. 숨이 막히는 위기 상황 속에서 긴장감과 성적 고조가 극대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자위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성적 클라이맥스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고통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 든다.


반복되는 자살 시도, 쾌감의 중독

일부는 이 행위를 일회적인 실험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반복한다. 일종의 ‘죽음을 가장한 자위’처럼 행해지는 이 위험한 행위는, 자살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실제 목적은 죽음이 아닌 강렬한 쾌감에 있다. 사용되는 도구는 다양하다. 전통적인 밧줄 외에도, 비닐봉지, 랩, 레인코트, 심지어 베개 포장지 등으로 질식을 유도하기도 한다. 가장 흔한 방식은 목을 조르며 절정에 이르는 순간 손에 쥔 칼로 줄을 끊는 방식인데, 실패할 경우 실제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고통, 쾌락, 그리고 자기 파괴의 경계


이 현상은 단순한 성적 일탈로 보기 어려우며, 자기 학대와 자기 파괴적 충동이 결합된 복합적인 심리적 문제를 드러낸다. 고통을 쾌감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는 심각한 정신 내적 갈등이 깔려 있다. 이와 같은 자기 파괴적 행위는 종종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죄책감, 억압된 공격성 등과 연관되며, 죽음을 향한 상상 속에서 일시적인 해방감을 경험하고자 하는 무의식의 움직임일 수 있다.


감정의 억압과 자기 처벌

40세 남성 당뇨병 환자는 어린 시절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던 환경에서 자라났다. 사랑받기 위해, 혹은 엄마의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그는 감정을 억누르고 말았다. 그러나 억압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감정은 자기 몸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돌아왔다. 그는 당뇨병이라는 육체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병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다. 이는 그의 존재가 자신을 응징하는 방식이며, 동시에 엄마에게 보내는 무언의 복수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정해준 자녀 스케줄, 공부 등 일상을 장악하였기에 아들은 착하게 보여야 했기 때문에 당뇨를 일으키는 일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억압된 공격성이 결국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꼴이 되었지만, 그것은 일종의 자기 처벌이자, 자신의 삶을 옭아 맨 엄마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다.

정신증에서의 자기 가혹성은 이렇게 시작된다. “당신이 나를 이렇게 키운 결과 나는 이렇게 죽어간다”는 말이, 저혈당 쇼크라는 실천 행위를 통해 매번 반복된다.


죽음 직전의 쾌감, 혹은 환멸의 구원

그는 엄마를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해 저혈당 상태로 자신을 몰아가면서 드디어 기절하게 되고, 그때야 엄마가 달려와서 119로 실어가게 된다. 그의 무의식은 자신의 삶을 말살한 엄마에 대한 보복으로 죽음 길목까지 자신을 끌고 가는 극적인 형태의 드라마를 매번 써야 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일종의 중독현상을 불러일으킨 것은 내가 보기에는 기절하는 순간에 이르는 마지막 단계에 찾아오는 고통 속에 짧고 짜릿한 쾌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신증에서 가장 무서운 점은, 죽음조차도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해방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는 반복적으로 자신을 저혈당 상태로 몰아넣고 기절한다. 그것은 마치 죽음의 클라이맥스와도 같다. 여기에는 ‘죽고 싶다’는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살아 있음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는 감각이 있다. 유사한 맥락에서 등장하는 Autoerotic Asphyxia(자체성애적 질식 행위)는 단순한 자살 시도가 아니다. 이는 죽음에 이르는 경계선에서 감각의 절정을 경험하려는 욕망, 그리고 스스로를 절대적인 타자(신, 어머니, 혹은 심판자) 앞에 제물로 바치는 행위에 가깝다.

이러한 행위들은, 의식적으로는 쾌감을 동반하지만,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나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깊은 자기혐오의 반영이다. 그 벌은 생존을 위협할 만큼 가혹하고, 스스로에게 가해진다는 점에서 정신증의 핵심 구조, 즉 자기 자신이 동시에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역설을 드러낸다.



3. 정신증에서의 자아: 자기-파괴적 주체


자체성애적 단계의 핵심은, ‘너’와 ‘나’의 구분이 약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타인을 향해야 할 분노와 고통이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이 여성은 엄마에 대한 분노를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기 몸에 병을 일으키고, 자신을 쓰러뜨리며, 자기 몸을 엄마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한 도구로 삼았다. 정신증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분열된 자아는 자기 내부에서 대상을 형성하고, 그 대상은 나를 벌하고, 모욕하고, 제거하려 든다. 자신의 내면에 ‘자기 파괴의 명령’을 수행하는 심판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정신증의 자기 가혹성은, 때로는 상징을 통하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직진한다. 그것이 기절이고, 자해이고, 질식이고, 반복되는 병의 악화이다. 이 행동들은 논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지만, 정신 내적 역동에서는 너무도 일관되다. 이는 처벌을 갈망하고, 사랑을 요구하며, 동시에 자신을 말소시키려는 이중의 욕망이 충돌는 자리다.


맺으며: 정신증의 자기 가혹성을 이해한다는 것


정신증은 비이성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상징 이전의 진실이 육체를 통해 외치는 구조다. 그리고 이 구조의 핵심은 ‘자기를 벌하고, 자기 존재를 삭제하려는 무의식’이다. 정신분석은 이 무의식을 단죄하거나 교정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파괴적인 언어를 이해하려 한다.


“왜 그 여자는 병원에 입원하려고 자기 몸을 망가뜨릴까?”

“왜 그는 질식 직전의 쾌감을 갈망하며 목에 밧줄을 거는가?”


그 이유는, 그들에게 그것이 유일한 생존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말할 수 없을 때, 사람은 고통 자체가 된다. 그것이 정신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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