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들어온 엄마의 규범이 소아 당뇨가 되다

이상적 자아로 살지 못하고, 자아 이상으로 산 여성

어릴 적부터 늘 엄마의 기준 안에서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다. 자신의 감정보다 엄마의 기분을 먼저 살폈고, 자신의 기준보다는 타인의 기대를 따라야 했다.

그렇게 억눌린 감정은 어느 순간부터 몸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발병한 당뇨는 단순한 질병이 아니었다.

이상적 자아를 억압하고 자아이상의 명령에 복종했던 지난 삶의 흔적이었다.


이 글은 ‘이상적 자아와 자아이상’이라는 정신분석적 구조를 통해 그녀의 고통을 살펴본다.

몸과 감정, 그리고 자아의 회복에 대해 천천히 성찰해 본다.


엄마의 기준 안에서만 살아온 나


자아이상의 갑옷 속에서 병든 이상적 자아의 이야기

"이제 내 감정으로 숨 쉬고 싶어요."

그녀는 마흔 살이다.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30년 넘게 당뇨병을 앓고 있다.

그녀의 인생은 매 끼니마다 혈당 수치를 계산하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인슐린 주사를 놓는 방식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것은 단지 몸의 관리가 아니었다. 삶 전체가 ‘정해진 수치’를 기준으로만 유지되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었다.

처음 그녀가 상담실에 들어섰을 때, 나는 오래전부터 어떤 틀 안에서 자신을 살아낸 사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조용하고 공손한 말투, 정리된 외모,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꺼내는 말들. 그녀는 결코 ‘엉망’이 되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제가 저 자신을 위해 살고 있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항상 누군가의 잣대에 맞춰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어릴 땐 엄마였고, 지금은… 그냥 습관처럼 계속 그래요.”


그녀는 어릴 적부터 착한 아이, ‘예의 바른 딸’, ‘엄마의 기분을 잘 살피는 아이’였다.

그리고 그 기준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의 삶도, 감정도, 심지어 병마저도—엄마의 세계에서 허락된 범주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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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이상, 엄마의 언어로 짜인 갑옷


정신분석에서는 우리가 ‘이상적으로 살고 싶은 자기’를 이상적 자아라 부르고,

외부에서 주입된, 사회나 부모의 기대에 맞춰야 한다는 기준을 '자아이상(自我理想)'이라고 말한다.


이상적 자아는 ‘내가 정말로 되고 싶은 나’지만,

자아 이상은 ‘이래야만 사랑받는 나’이다.


그녀는 삶의 초입부터 이상적 자아가 아닌, 철저히 자아이상의 명령에 따라 살아왔다.

엄마가 싫어하는 건 나도 싫어해야 했고,

엄마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면 칭찬을 받았고,

엄마가 슬퍼하면 내가 웃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 생각, 욕구를 엄마의 기준에 먼저 맞춰 필터링했다.

“엄마가 보기에 이건 좀…”

“엄마는 늘 저런 사람을 싫어했으니까…”

“엄마가 피곤해하니까 내가 감정 표현하면 안 되지…”


어릴 적에는 그 필터가 곧 사랑받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 필터가 점점 그녀의 내면을 장악하면서, 진짜 ‘나’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상적 자아는 점점 위축되었고, 자아 이상은 갑옷처럼 그녀를 조여왔다.


이상적 자아의 억압이 몸에 새겨질 때


초등학교 2학년, 그녀는 소아 당뇨 진단을 받았다. 당시 의사조차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특별한 유전적 소인도, 환경 요인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날부터 식사, 운동, 수면, 감정마저도 더욱 철저하게 ‘관리’ 해야 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늘 문제였다.


그녀는 그 병을 억울하다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땐… 그냥 그런가 보다 했어요. 엄마가 너무 많이 울어서, 제가 엄마를 달래줬거든요. ‘괜찮아, 엄마. 나 잘할게.’ 그게 제일 먼저 나왔던 말이었어요.”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내면에서 이상적 자아가 꺼진 채, 자아 이상이 더 강화된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자기감정은 잠재우고, 엄마의 감정을 먼저 받아들여야 했던 어린아이. 그 아이는 자신이 아프다는 걸 말하기보다,

‘아픈 나로 인해 엄마가 괴로워하지 않도록’ 살아가야 했다.


자기감정을 억압한 결과, 몸이 스스로를 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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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처벌로서 당뇨병

그녀는 어릴 적부터 엄마의 감정과 생각, 잔소리를 ‘기준’ 삼아 살아왔다. 스스로의 감정은 허락되지 않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보단 엄마가 어떻게 생각할지를 먼저 고려했다. 갈등이 생기면 화를 내는 대신 자기 자신을 참았고, 불만이 생기면 그 불만을 누르고 오히려 엄마를 염려했다. 공격성을 드러내기보단, 차라리 자신을 누르기로 선택한 것이다.

이처럼 억압된 감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말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한 감정은 결국 ‘몸’을 통해 증상으로 표현된다. 초등학교 2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에 찾아온 소아 당뇨병은, 단순한 신체 질병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자기 처벌>이었다.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몸이 대신 앓았다. 고통스러울수록, 엄마도 괴로워졌다. 그러니 이 병은 단순히 자신을 향한 벌이 아니라, 엄마를 괴롭게 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자신이 힘들어짐으로써, 엄마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엄마와 딸의 동체성>이라는 심리기제가 만들어낸 고통의 역설이었다. 분리되지 못한 자아는, 감정조차 분리되지 못한 채 몸에 저장되었다. 결국 그녀는, 엄마를 향한 내면의 공격성을 자신에게 돌리고, 그것을 통해 엄마를 동시에 고통스럽게 하는 복잡한 무의식의 역학 안에 갇혀 있었다.


이 자기 처벌의 메커니즘은 지금까지도 그녀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40이 된 지금도 당뇨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몸은 그녀의 무의식과 감정의 복합적인 반응을 ‘증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병을 앓은 것이 아니라, 병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자기감정을 억눌러온 것이었다.

몸의 고통은 감정의 소리를 대신 낸 것이고, 수치화된 혈당 관리는 삶의 모든 기준을 타인의 시선에 맞추는 훈련이 되었다.


당뇨병이 준 침묵의 의미, ‘말하지 못한 분노’


심리적으로 당뇨는 종종 말해지지 못한 분노, 통제되지 못한 감정, 그리고 자기 처벌의 정서와 연결된다.

그녀는 결코 엄마에게 화를 내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좋은 사람이었고,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조건’을 달고 있었고, 그 조건은 언제나 ‘네가 엄마 말을 잘 들을 때’라는 전제가 붙어 있었다.

엄마는 자기감정 표현이 서툰 사람이었다. 감정적 언어보다는, 논리와 지적 조언으로 그녀를 지도했다.

그녀는 엄마의 말투, 표정, 한숨 속에서 늘 ‘판단받는 느낌’을 경험했고,

자신의 감정은 “그건 이기적인 거야” “그런 생각하면 안 돼”라는 말로 억제되었다.


그리고 억눌린 감정은 병이 되었다.

몸으로 새겨진 감정의 각인.

그것이 바로 당뇨병이었다.


이제는, 내 감정으로 살아보고 싶어요


상담 과정에서 그녀는 처음엔 감정을 말하는 것조차 낯설어했다.


“기분이요? 그냥 괜찮아요.”

“화가 나냐고요? 음… 아니요. 전 화를 잘 안 내요.”


그녀가 말하는 ‘괜찮아요’는 자아이상의 언어였다. 그 기준에 벗어나지 않기 위해 감정을 감추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치료가 깊어질수록, 그녀는 조금씩 이상적 자아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엄마가 저한테 너무 많은 걸 기대한 것 같아요.”

“엄마는 자주 상처받는 사람인데… 그 감정을 제가 다 책임져야 했어요.”

“제가 아팠던 건… 그냥 아픈 게 아니라, 감정을 억눌러온 결과 같아요.”


그녀는 처음으로 자기감정을 ‘자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려고, 상처 주지 않으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진짜 내 마음이 어떤지를 탐색하고, 표현하고, 살아내려는 시도를 했다.


글을 맺으며: 이상적 자아를 되찾는 시간


그녀는 여전히 당뇨를 앓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그 병이 ‘자기 몸이 대신 말하던 감정의 언어’였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몸에게만 그 역할을 맡기지 않으려 한다.


자아이상의 갑옷을 벗고,

억눌렸던 이상적 자아의 목소리를 회복하는 것—

그것이 그녀의 진짜 치유였다.


“엄마가 원했던 딸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내가 되어보고 싶어요.”


이 말은 그녀가 처음으로 자기 삶의 주어가 되었던 순간, 이상적 자아를 회복하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 순간, 나는 그녀 안에서 병보다 더 깊은 고통이 치유되기 시작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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