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자녀관계, 세대차에 따른 이상적 자아와 자아이상

'부모라면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말이 익숙했던 세대가 있다. 자녀를 위해 자신을 지우며 살아온 부모들, 특히 여성들은 ‘좋은 엄마’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내야 했다. 하지만 세대는 달라지고 있다. 부모세대는 '효'라는 자아이상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의 자녀 세대에 그런 자아이상의 기준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부모들도 자각해 가고 있다. '효'와 같은 '자아 이상'적 사회적 기준이 아닌, 내면의 목소리 즉 '이상적 자아'를 따라 살아가려는 자녀 세대 앞에서, 부모는 새로운 자리를 고민하게 된다.

변화하는 가족관계 속에서 모성과 부모 됨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누군가의 기대를 채우는 존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존재하는 부모 됨이 필요한 시대다.


모성과 가족의 이름으로 오랫동안 자신을 잊고 살아온 이들에게, 세대의 차이 속에서도 함께 자라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하고자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부모 됨의 변화


어느 날, 한 중년 여성이 상담실에 들어섰다. 자녀 셋을 모두 대학에 보낸 뒤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며 고개를 떨군다. 첫째는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둘째는 군 복무 중이며, 막내도 제법 자기 몫을 잘 해낸다. 누가 봐도 ‘성공적인 엄마’였다. 그런데 정작 그녀는 말한다.


“이제 자녀들을 다 키워놨는데, 나란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어요.”


자녀를 위해 헌신하고,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해 온 수많은 부모들. 특히 여성들은 ‘좋은 엄마’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지워가며 살아왔다. 이들의 마음에는 늘 하나의 기준이 있었다. 바로 '자아이상(ideal ego)’이라는 무형의 상징이다. 자아 이상은 사회가 요구하는 모범적인 자기상으로,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한 기준점이다.

하지만 지금, 세대는 분명히 달라졌다. 부모 세대가 따라갔던 자아 이상이 자녀 세대에게는 더 이상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이제 자녀들은 이상적 자아(ego ideal), 즉 내면에서 우러나는 욕망과 성장의 방향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이 글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세대 차이를 통해 ‘이상적 자아’와 ‘자아이상’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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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부모’라는 자아이상의 무게


우리 부모 세대에게 자녀는 존재의 이유이자 목적이었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명확했다. 아이를 잘 먹이고, 좋은 학교에 보내며, 결혼까지 잘 시켜야 했다. 이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부모는 자신의 감정, 욕망, 고통을 뒤로 미뤘다. 자기 시간을 갖는 것조차 죄책감으로 느껴졌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사실 ‘이상’이라기보다 ‘의무’에 가까웠다. ‘좋은 엄마’, ‘좋은 아빠’가 된다는 건 사회가 정한 틀에 자신을 맞추는 일이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는 점차 희미해졌다.


'자아이상'은 타자의 욕망을 자기 내면에 주입한 이미지다. 우리는 자아이상을 좇으며 살아가지만, 그것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허상이다. 그 허상을 향해 달려갈수록 우리는 더 지치고, 더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자녀 세대, 이상적 자아를 살아가다


반면 오늘날의 자녀 세대는 다르다. 그들은 질문한다.


“나는 정말 이 삶을 원하는가?”

“결혼은 왜 해야 하지?”

“내가 부모가 되면, 어떤 방식으로 아이와 함께 살고 싶은가?”


이들은 ‘남들이 다 하는 삶’을 살아가기보다, ‘내가 선택한 삶’을 지향한다.

이상적 자아란, 나 자신의 내면적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방향이다. 더불어 이상적 자아를 향해 사는 사람(그가 건강한 사람이라면)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욕망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얼마 전 한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유서 깊은 가문의 5대 독자였던 한 남성이 40을 앞두고 결혼을 결심했다. 오랜 비혼주의자였던 그는 한 여성을 만나 마음을 열었다. 그 기쁜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말했다.


“이제 며느리랑 제사상도 같이 차리고, 도란도란 사는 모습 보겠네.”


하지만 아들은 단호했다.


“그런 거 안 하는 조건으로 결혼하는 건데요.”


그 순간 어머니의 오랜 기대는 허무하게 사라졌다.

이 장면은 세대차가 만들어낸 갈등처럼 보일 수 있지만, 더 깊게 들여다보면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의 전환을 보여주는 사례다. 자아이상으로서의 가족이 무너지고, 이상적 자아로서의 관계가 시작되는 신호이기도 하다.


모성은 다시 고려되어야 한다


우리는 ‘좋은 엄마’라는 이미지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늘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남편을 내조하며, 부모에게 효도하는 여성이 바로 ‘모성’의 전형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모성도 다시 상상해야 한다. ‘나를 지우는 모성’에서 ‘나로 존재하는 모성’으로 전환해야 할 시간이다. '이상적 자아'로서의 엄마는 자녀에게 끝없이 무언가를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녀가 스스로 자기 삶을 감당하게 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알고, 그것을 자녀에게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엄마 밑에서 자란 아이는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운다.


엄마가 제대로 숨 쉬지 못하는 집에서는 자녀도 자유로울 수 없다. 부모가 자기 존재를 존중받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자녀도 언젠가 같은 삶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진짜 세대차란, 겉으로 드러난 취향이나 말투가 아니라, 바로 삶의 방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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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관계


부모 됨은 이제 권위가 아니라 동반자성의 자리로 이동하고 있다. 과거에는 부모가 위에, 자녀가 아래에 있었지만, 이제는 서로의 감정을 존중하고, 각자의 삶을 응원하는 관계로 바뀌고 있다.


이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상적 자아’를 향한 서로의 노력이다. 부모는 더 이상 ‘이상적인 부모’가 되려 애쓰기보다, 스스로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녀 또한 ‘부모의 기대를 채워야 하는 자식’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한 사람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마무리하며: 이상에서 존재로


이제 우리는 자아이상의 그림자를 넘어서야 한다. 부모라는 이름 아래 무언가를 끊임없이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존재로서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부모 역시 감정을 가진 존재이며, 욕망을 가진 인간이다. 그 정직함이야말로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묻는다면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떤 부모이고 싶은가?”

“나는 어떤 자식으로 살아가고 싶은가?”

이 질문은 단지 가족관계의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의 삶의 질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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