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 자아와 자아이상
한때 ADHD는 원래 없던 병인데, 제약회사들이 약을 팔기 위해 병명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것은 2008년, 자주 인용되는 ADHD 전문가인 하버드 대학교의 Joseph Biederman이 2000년부터 2007년 사이에 제약 회사로부터 160만 달러를 받았다는 사실을 하버드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https://en.wikipedia.org/wiki/Attention_deficit_hyperactivity_disorder) 지면서 그런 이야기들이 떠돌게 된 것 같다.
특히 ADHD는 개인의 목표가 없거나, 가치관이 불분명할 때, 혹은 삶에 초점이 없을 때 주의력이 결핍되어 삶이 흐트러지는 상태로 정의되기 쉽다.
사람이 특정 목표를 설정하게 되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에너지 집중하게 되어 있다. 그러한 에너지 집중은 ADHD 증상을 가진 사람도 특정 목표 없어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어떤 분명한 목표가 생기게 되면, 남다를 집중력을 모으게 된다.
한때 우리 학교 사회에서 ADHD약은 공부 잘하는 약으로 통하면서, ADHD증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아이들도 공부에 집중력을 모으기 위해 처방을 받기에 주저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약의 부작용도 함께 회자되었다. 열명 중 하나가 자살충동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사냥꾼이 평소에는 느슨하게 지내다가 사냥할 때가 되면 눈이 반짝이며 집중하는 것처럼, ADHD도 일상에서는 집중하지 못하다가 특정 목표나 '사냥할 대상'이 정해지면 에너지가 치솟는 특성을 가진다.
다만 그가 사는 사회가 농경 시대 사회 기준과의 불일치로 인한 '병' 인식이 지적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특성이 '병'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농경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이 정해진 루틴에 따라 집중하며 살아야 하는 사회적 기준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수렵 채취 시대에는 정상적이었던 특성이 농경 시대의 루틴화된 삶에 맞지 않아 문제가 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인 것이다.
모든 청소년들이 각자 분명한 꿈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 중에는 공부보다 친구들과 노는 것이 더 소중할 수 있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가 좀 더 집중해서 학생답게 공부를 열심히 해서 부모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해 보일 수 있다. 자녀가 꿈이나 목표가 없기 때문에 부모가 억지로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를 해 준다.
"일단 공부를 잘해 놔야 나중에 꿈이 생길 때 꿈을 쉽게 달성할 수 있게 되고, 기회가 찾아오면 그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공부도 못 하는 중에 나중에 꿈이 생기면, 그 꿈을 달성하기가 요원해지고, 중요한 기회가 찾아왔는데, 공부 실력이 없으면 기회를 놓쳐 버리기 십상이다."
이것이 부모들이 자녀를 공부로 잡아가는 기본 개념이다.
공부에 대한 의욕도, 미래에 대한 욕망도 없는 아이를 어떻게든 책상 앞으로 가둬둘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ADHD약을 먹이는 것이다.
그 결과, 열명 중 한 명의 자살 충동이라는 것은 떠도는 소문정도로 여길 수 있어도, 사냥꾼의 기질을 타고난 자녀의 야성을 죽여 놔 버렸기 때문에 스스로 꿈꿀 수 있는 미래에 발휘할 능력까지 끌어내려 버린다는 것이다.
ADHD인 자녀는 일반적인 삶 속에서 평균적으로 모든 것을 잘하는 사람과 달리, 특정 한 분야에서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가동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러한 잠재력을 죽여 버릴 가능성을 낳게 된다.
정신분석학의 시선에서 ADHD는 현대 사회가 규정한 ‘정상’이라는 프레임에 맞지 않는 아이의 리비도, 즉 내면의 충동과 에너지가 표현되는 방식의 하나일 수 있다. 아이 입장에서는, 현대사회가 규정한 '정상'프레임에 편입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정상 프레임에 들어가다가는 자신의 잠재력은 억압되어 인생의 어느 순간 발휘될 기회마저 억압해 버린 채, 남의 시선을 의식한 '평준화된 인간'으로 사는 것에 그쳐 버릴 수 있다.
ADHD 아동의 또 다른 특징은 특정한 주제나 대상에 대해 과도하게 몰입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에서 이것은 단순한 과잉집중이 아니라, 억눌린 리비도가 목표를 발견했을 때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으로 본다. 즉, 에너지는 줄곧 존재해 왔으며, 그것이 어디로도 향하지 못하고 떠돌다 어떤 방향을 만났을 때 비로소 형태를 갖추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ADHD는 단지 ‘산만한 아이’가 아니라, 오히려 ‘무엇을 향해 달릴지 몰라 방황하는 아이’이다.
오늘날 많은 부모들은 자녀가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진단을 받았다는 말에 적잖이 당황하거나, 때론 안도한다. 그 말은, 자녀에게 일종의 '꼬리표'를 붙임으로써, 약을 먹게 함으로써 자녀를 쉽게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 앞에 사회의 요구, 학업성적, 사회적으로 규정된 '정상 프레임', 이를 위한 약물치료이라는 외부의 조건들을 들어 <자아이상>의 카테고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여기에 자녀의 고유한 존재나 자기실현을 위한 욕망과 같은 <이상적 자아>의 범주는 없다.
<이상적 자아>는 자기밖에 모르고 미성숙한 나르시시스트도 그 범주에 들어가지만, 자기애가 잘 채워져 성숙한 관계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자기만족을 극대화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포함된다.
<자아이상>은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도덕적 규범을 가지고 있지만, 남 신경 쓰거나, 외부적 조건에 자신의 삶과 존재를 맞춰야 하는 불행감을 가지고 살 수 있다.
오늘날 현대인 중 ADHD의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 방 청소를 제때 하지 못하는 사람, 이불 개기를 미루는 사람, 식사 후 설거지를 바로 하지 않는 사람, 청소를 한꺼번에 몰아서 하는 사람, 손님이 오지 않으면 평생 집을 쓰레기통처럼 방치하는 사람,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살아가는 사람, 수면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사람,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 사람, 적절한 시점에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 특히 요즘 젊은 여성들 중 자기 방을 말 그대로 쓰레기장처럼 만들어놓고 살아가는 경우까지 생각해 보면, 이와 같은 ADHD적 특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하지만 예외는 존재한다. 바로 철저하게 강박적인 사람이다. 그는 위에서 언급한 항목 중 하나라도 마음에 걸리면, 그것을 해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해 자신의 삶의 에너지를 그 일에 집중시키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ADHD 증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종의 강박적 성향이 필요하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그렇다면 정반대에 위치한 ADHD와 강박증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물론 이것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예전에 ‘공부하거나 일하는 책상이 지저분한 사람은 창조적인 사람이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 말은 ADHD적 특징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그들은 주변을 정리하는 데 에너지를 쓰기보다는 창의적인 활동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사람들이다.
ADHD 성향을 지닌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이상적 자아’를 따라 살아가는 반면, 강박증 성향의 사람은 타인의 시선을 자신의 욕망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자아 이상’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고 이 ‘자아 이상’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는 자신의 내면적 욕망, 존재의 힘, 고유한 가치를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한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은 학업에 있어 남다른 성과를 보이던 이였다. 청소년기에는 뚜렷한 꿈 없이 부모의 뜻을 따라 서울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지만, 마흔다섯이 되던 해, 잘 나가던 로펌을 정리하고 한의사가 되겠다고 수능을 치른 끝에 지방의 한 한의대에 입학해 결국 한의사가 되었다. 그는 오랜 시간 부모가 원하는 삶을 살며 ‘자아 이상’을 실현했지만, 결국 자신의 꿈을 찾아 ‘이상적 자아’에 기반한 삶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정신분석은 인간을 규범으로 재단하지 않는다. 증상은 언제나 그 사람의 고통을 나타내는 신호이자, 억압된 무의식이 말하고자 하는 방식이다. ADHD 역시 그 고통의 표현이며, 개인의 에너지가 흐르고자 하나 그 방향을 상실한 채 분산된 상태라 할 수 있다. 흔히 ADHD 아동이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한 가지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산만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정신분석적으로 보면, 이는 아이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중요한 열망과 연결되지 못한 채, 외부의 강제된 규칙이나 일상에 맞추어 살아야 할 때 발생하는 심리적 저항이다.
ADHD의 본질은 목표의 부재에 있다기보다는, 목표와 연결되지 못한 에너지의 고립이라 할 수 있다. 아이가 삶의 방향을 발견하고, 그 방향과 자신의 내면적 열망이 연결되면, ADHD로 불렸던 에너지는 위대한 집중력과 창조력으로 전환된다. 실제로 ADHD 진단을 받았던 이들 중 다수가 특정 분야에서 천재성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그들이 가진 에너지가 병이 아니라, 다만 아직 통로를 찾지 못한 창조적 자산임을 보여준다.
정신분석은 무엇보다 그 아이가 가진 에너지의 의미를 물으며, 그것이 어떤 억압에서 비롯되었는지, 어떤 욕망을 향해 가고 싶은지 귀 기울인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병’이라는 외피는 벗겨지고, 한 인간의 고유한 서사와 마주하게 된다. ADHD는 더 이상 증상의 목록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열어가는 하나의 열쇠일 수 있다. 이 열쇠를 억지로 잠그기보다, 어떻게 돌려 여는가가 더 중요하다. 정신분석은 언제나 그렇게 묻는다. 이 증상은 당신의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가,라고.
남의 시선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효율적인 시대가 있었다. 최소한 2000년 이전에는 평균수명 70세였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ADHD 증상자처럼 별다른 타임스케줄 없이 여유 있게 산다거나 널 부르지게 산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았다. 늦은 나이에 자신의 인생을 수정한다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의 방향을 잘못 잡았다 할지라도 그동안 살아온 패턴대로 사는 것이 맞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의 불안까지도 염두에 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ADHD 증상자들은 남이 정해 놓은 타임 스케줄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 그것은 결혼 생활도 그렇게 바뀌고 있다. 2000년 이전에는 이혼을 한다는 것은 가문의 수치이면서, 개인적으로 사회적 불이익까지 감수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100세 시대를 맞으면서, 이혼도 괜찮고, 돌싱도 괜찮고, 재혼이 뭐 어때서가 되었으며, 심지어 졸혼까지 나왔다.
50대가 된 주병진 씨가 최근 소개팅을 하면서, 여자들에게 물어보고 자신도 답변한 특별한 질문과 답변이 있다.
"왜 여태껏 결혼 안 하셨어요?"
주병진 본인도 이 질문을 받으면서 대상 여성과 공통된 답을 내놓았다.
"실패할까 봐 두려워서요"
100세 시대에는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어떤 내담자가 결혼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상황에서 똑같은 두려움을 드러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결혼하고 1주일 만에 돌아온다고 해도, 결혼을 한번 해 봤잖느냐? 실패할까 봐 두려워서 아예 결혼을 시도조차 못해 보는 것보다, 1주일 만에 돌아온다 할지라도 결혼을 해 봤지 않느냐?"
실패할까 봐 두려워 숫총각, 숫처녀로 남는 것보다, 실패한 돌싱남, 돌싱녀가 훨씬 낫다. 후자는 결혼을 새롭게 기획할 수 있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여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을 평생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그렇다. ADHD도 마찬가지다. 주어진 일이나 공부를 잘 해내기 위해 약을 복용하고 일의 효율을 높여, 매 순간 필요한 과제를 착실히 수행하며 겉보기엔 ‘만능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기다리며, 때로는 실패하고 좌절하는 시간을 통과해 나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진짜 욕망을 발견하는 일이다.
100년을 살아가는 인생의 시간 속에서, 누군가가 정해놓은 틀에 맞춰 살아가는 <자아 이상>을 따르기보다는, 내가 원하고, 내가 꿈꾸며, 나만의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이상적 자아>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