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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분석: K여성의 꿈, 아들의 이상적 자아로서 부모상

3시 30분, 한 꿈의 시작


깊은 새벽, 시간은 3시 30분. 잠에서 깬 것도, 완전히 잠들어 있던 것도 아닌 어중간한 시각에 나는 꿈을 꾸었다. 모두가 수학여행을 떠난 날, 나는 홀로 집에 남아 있었다. 다들 지금쯤 목적지에 도착했겠지, 피곤하겠지. 가지 않길 잘했다는 묘한 안도감과 함께 눈을 떴다. 동시에, 가족들도 어떤 여행을 다녀왔다며 돌아온다. 도착한 시간은 똑같이 3시 30분.


잠을 깨면서 문득 깨달았다. 3시 30분. ‘3살 6개월’, 그러니까 만 42개월. 바로 그 시기다. 마침내 아들도 지금 그 나이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도, 바로 그 무렵의 일이 하나 떠올랐다. 내 생애 최초의 기억. 말보다 감정이 먼저였던 시절의 장면이 꿈을 타고 되살아난다.


기억의 문이 열릴 때


옆집 언니를 따라 시내에 나갔던 날이었다. 진열된 구두가 신기해 구경하던 나를 구둣방 아저씨가 안으로 불러들였다. 별다른 의심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저 어른이 부르니 따라갔을 뿐. 하지만 가게 안에서 그는 말했다. “우리 딸 하자.” 그는 집에 가지 못하게 나를 붙잡았다. 납치였다. 겨우 도망쳐 나왔고, 집에 가니 엄마는 울면서 나를 때렸다. 그리고 그 옆엔 경찰이 서 있었다.


나는 내 안에 묵직한 죄책감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왜 엄마는 울었을까. 왜 나를 때렸을까. 나는 뭔가 엄청난 잘못을 한 걸까. 아무도 내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내 존재 전체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기억인가 환상인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용기를 내어 이 기억을 엄마에게 꺼냈다. 하지만 엄마는 단호히 말했다.


“무슨 경찰? 경찰은 온 적 없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은 어딘가 비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럼 나는 도대체 뭘 기억하고 있는 걸까?


프로이트는 아이들이 종종 실제 사건이 아닌 ‘환상’을 기억 속에 저장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감정을 해석하거나 감당하기 위해 무의식이 만들어낸 구조다. 아이는 실제보다 더 감정적으로 이해되는 방식으로 세상을 구성한다. 나는 그날, 내 두려움을 설명해 줄 경찰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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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아의 탄생


경찰의 이미지는 단지 누군가의 역할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마음속에서 ‘벌하는 자’로 형상화된 초자아였다. 나는 너무 이른 시기에, 너무 복잡한 감정을 맞닥뜨렸다. 어른의 분노, 두려움, 혼란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감당할 수 없는 그 감정을 하나의 상징으로 환원시켰다. 바로 ‘경찰’이었다.


그 경찰은 실제 인물이 아니라, 내 감정을 질서 있게 구조화하기 위해 내면에서 만든 인물이었다. 나는 그에게 스스로를 넘기고, 재판받고, 벌받았다. 아무도 나를 혼내지 않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 나를 심판하고 있었다.


기억은 감정의 구조물이다


기억은 종종 감정의 구조물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끊임없이 떠오른다는 것은, 거기에 아직 회수되지 못한 에너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해결되지 않은 감정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친다. 상상으로 만든 장면일지라도, 감정이 실재한 만큼 그 영향력 또한 실재한다.


나는 이제 그 감정의 에너지를 회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에 매여 있던 에너지를 현재의 나에게 되돌려주는 행위다. 죄책감을 내려놓고, 나를 벌하는 초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과정이다.


아들의 초자아, 이상적 자아로서 부모상


이 모든 과정을 되짚으며 다시금 마주한 진실은, 내 아들이 지금 정확히 그 42개월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지금 나와 똑같은 위치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 그러니까 내 남편은 아이에게 친구처럼 다가갈 뿐, 권위를 가진 인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아이에게 규율을 제시하고 금지를 설정하는 초자아의 기능을 대신해 줄 어른이, 지금 그의 곁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이는 어떻게 자신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할까? 아이는 스스로 초자아를 만들어낸다. 나처럼. 나의 내면에서 경찰이 출현했듯, 아이 역시 자기를 판단하고 제한할 수 있는 ‘누군가’를 자기 안에서 구성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데 이 초자아는 외부의 사랑과 균형 속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기에, 자칫하면 가혹하고 심판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이러한 초자아는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오로지 스스로의 상상 속에 만든 ‘이상적 자아로서의 부모상’이 된다. 그리고 아이는 끊임없이 그 기준을 맞추려 스스로를 몰아세운다. “나는 아빠처럼 되지 말아야지.” 이 말은 겉보기엔 성숙한 결심 같지만, 실제로는 분열된 내면을 낳는다. 삶의 방향이 사랑이 아니라 혐오로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초자아가 축복의 목소리가 아니라, 징벌의 메아리로 기능하게 되는 과정이다.


우리는 아이의 내면에 어떤 초자아가 자라고 있는지를 섬세하게 살펴야 한다. 초자아는 단순히 훈육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결국 ‘나는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하는가’를 결정짓는 내면의 나침반이다. 그 나침반이 과도하게 비판적이거나 심판적이라면, 아이는 자기 안에서 자신과 싸우며 살게 될 것이다.


감정의 회수, 기억의 자유


이제는 그때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경찰은 너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심판의 얼굴일 뿐이라고. 그리고 너는 그 상상을 통해, 세상의 복잡한 감정을 감당하고자 했던 용감한 아이였다고.


그 기억은 남겨두되, 그 안에 붙들려 있던 감정의 에너지는 회수하자. 그것을 오늘을 살아갈 힘으로 다시 가져오자. 아이도, 나도, 더는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지 않도록. 사랑과 이해로 이루어진 새로운 초자아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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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맺음: 죄책감이라는 유령에서 벗어나기


죄책감은 때로 기억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 죄책감이 만들어낸 무의식의 구조는, 한 세대를 넘어 다음 세대로 이어지기도 한다. 내가 내 기억 속 경찰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나의 아이도 자기만의 상상 속 경찰을 만들지 않아도 되는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상상과 기억, 감정과 현실 사이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경계를 이해하고 되돌아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 더 이상 과거의 죄책감이 아닌, 지금의 나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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